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22)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22화(122/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22화
* * *
베르티움에서 있었던 기간은 고작 며칠에 불과했는데도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아직도 그곳에서 들었던 거대한 소음이 귀에서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베르티움을 빠져나와 이동하는 동안 나는 계속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륵.
상념에 빠져 있던 내 뺨에 문득 온기가 닿았다.
시선을 들자 나를 응시하고 있는 카시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이 스쳐 지나간 곳은 아까 베르티움에서 닉스에게 공격당해 긁혔던 위치였다.
상처는 벌써 다 아물어 있었지만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카시스는 그것을 닦아 내듯이 손을 움직였다.
뒤이어 아까 베인 귀를 비롯해 자잘한 상처를 입었던 부위에 차례로 그의 손이 닿았다.
닉스의 피에 젖은 내 손도 카시스에 의해 정화되었다.
“카시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란트, 누가 죽였어?”
고요한 물음에 내게 닿아 있던 카시스의 손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느덧 카시스의 눈빛이 조금 변해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이윽고 그가 내게서 손을 떼며 닫혀 있던 입술을 뗐다.
“내가.”
뒤이어 흘러나온 카시스의 목소리는 억양 없이 느껴질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죽였어.”
애초에 데온과 카시스, 둘 중 하나가 란트를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의 마지막은 어땠어?”
어쩌면 이것은 카시스에게 하면 안 되는 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심장에 깊숙이 퍼져 있던 독을 미처 삼켜 내지 못해 지금 이 순간의 오롯한 진심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사람의 마지막이 아주 고통스러웠던 거라면 좋겠어.”
카시스가 내 양쪽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 후 그가 정면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뒤이어 속삭임에 가까운 나직한 물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내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말해.”
내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라도 망설임 없이 전부 해 줄 것처럼 곧고 진실 된 눈빛이었다.
그 역시도 베르티움 내에서의 대화를 통해 내가 이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내 속마음이 그에게 읽혀질까 봐 눈을 감았다.
죽어서까지 아실을 욕되게 만든 란트 아그리체를 죽이고 싶다.
아실의 시신을 굳이 일으켜 세워 그의 안식을 방해한 노엘 베르티움을 죽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바보같이 망설여 닉스를 죽이지 못한 나를 죽이고 싶다.
사납게 날뛰는 살의가 가시처럼 속을 찔렀다.
지금 마차의 뒷부분에 짐처럼 실려 있을 닉스를 생각하자 또 가슴에 스산한 한기가 번졌다.
“손 잡아 줘.”
그래서 나는 지금 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했다.
다소 뜬금없다고 여길 법도 한데, 카시스는 곧바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내 요구대로 손을 붙드는 대신 내 몸을 끌어당겨 품에 가득 감싸 안았다.
밀착된 몸에서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베르티움에 있는 동안 계속 뼈가 시린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카시스와 붙어 있으니 그제야 몸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카시스의 팔이 내 허리를 꽉 옥죄었다.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느린 손길에 서서히 마음의 안정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한동안 온전히 누려 왔던 평온한 시간이 끝났음을 예감했다.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다시 바빠질 것이 분명했다.
“카시스.”
나지막한 내 부름에 카시스가 말하라는 듯이 내 머리에 뺨을 기댔다.
“나, 다시 록사나 아그리체가 될 거야.”
잠시 느려졌던 카시스의 손이 내 목덜미를 받쳤다.
그 후 이마에 새털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카시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않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나 역시 어느 한쪽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당신도 내 옆에 계속 있어.”
그래서 욕심껏 요구하자, 나를 끌어안은 카시스의 힘이 한결 더 강해졌다.
“그래.”
이번에도 카시스는 기꺼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할게.”
나도 카시스를 더 힘껏 끌어안았다.
혼자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 내 옆에 그가 있어 다행이었다.
12. 또 한 번의 전환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거지?”
고요하다 못해 무겁게 주위를 짓누르고 있던 정적이 마침내 깨졌다.
성긴 시선이 부서진 침묵의 잔해 속을 성큼 가로질렀다.
“차라리 손에 들고 있는 그 칼로 날 찌르려는 시도라도 해 보지 그래.”
데온은 벌써 한참 전부터 침대맡에 앉아 있었던 여인을 응시했다.
시에라는 미동 없이 의자에 앉아 눈앞에 있는 데온에게 침잠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낮게 읊조려진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 한 올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무미건조함을 보면, 지금의 상황이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데온이 몸의 자유를 억압당한 채 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지도 시일이 제법 지났다.
그동안 그는 세 여자와 기묘한 동거를 이어 갔다.
그 세 여자란 물론 록사나의 어머니인 시에라와 록사나의 심복인 에밀리, 그리고 시에라의 하녀였던 베스였다.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생긴 데온이었기에 기실 방 안에 고인 지독한 수면향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에라가 원하는 대로 잠자코 있어 주었다.
시에라는 지금처럼 매일같이 데온을 찾아와 그의 머리맡을 지키곤 했다.
그것이 그를 간호할 목적이 아님을 데온은 알았다.
그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짙은 장막을 두른 듯이 언제나 불투명했고, 이따금 소매 속의 단도를 만지는 손길에는 희미한 살의가 어려 있었다.
마침내 시에라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래, 지금껏 수백 번은 널 찌르는 상상을 했지.”
담담한 음성이 데온의 귓가를 간질였다.
시에라는 데온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데온은 아그리체에 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그녀의 이런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에는 이렇게 시에라와 긴 시간 얼굴을 맞댈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의 시에라는 전과 달리 데온에게서 작게나마 감흥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데온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기회는 넘치도록 많았는데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데온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아그리체에서 빠져나오기 전, 란트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 조금은 놀랍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역시 심약한 그 성격은 금방 바뀔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던가.
“만약 생각만으로 누군가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다면, 넌 이미 형편없이 난도질당했을 거야.”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시에라의 태도가 지나치게 초연했다.
시에라는 고이 품고 있던 단도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데온의 시선이 날카롭게 갈린 날붙이에 날아가 박혔다.
“용기가 나지 않았나?”
“사람을 해칠 용기, 아니면 내 손을 더럽힐 용기?”
두 사람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나지막했다.
두 사람 모두 원한으로 엮인 그들의 관계나, 둘 중 한 명의 사지가 결박되어 있는 지금의 특수한 상황 같은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을 보렴. 내가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하지 않은 건지.”
겉보기에 제압당한 측은 분명 데온 쪽이었으나 그에게서는 긴장감이나 위축된 느낌 같은 것이 조금도 풍겨 나오지 않았다.
시에라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다만 벽에 붙어 선 에밀리만이 여전히 데온을 경계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데온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여느 때처럼 에밀리가 반대했다.
그러나 기실 시에라는 에밀리의 위치가 어디든 데온을 상대하는 데 별다른 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 그런 것이었다.
아마 에밀리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시에라의 곁을 지키라는 제 주인의 명을 여전히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시에라도 에밀리를 굳이 설득하지 않은 것이었다.
“줄곧 궁금했던 게 있었어.”
시에라는 아그리체에서 사는 동안 데온의 얼굴을 마주하며 몇 번인가 묻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입 밖으로 꺼냈다.
“아실 죽일 때 어떤 생각을 했니?”
“아무것도.”
그녀가 망설인 시간에 비하면 헛웃음이 날 만큼 참으로 짧은 찰나의 순간이 지난 뒤 간략한 대답이 잇따랐다.
데온은 정말 조금의 고민이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성이었고, 그 안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시에라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이번에는 다른 것을 그에게 물었다.
“란트를 죽이려 했을 때는 어떤 감정을 느꼈지?”
“그것 역시, 아무것도.”
“만약 네 눈앞에서 마리아 님이 죽는다면 어떨까?”
“의미 없는 것을 자꾸 묻는군.”
한결같이 메마른 목소리였다.
시에라를 바라보는 데온의 눈빛과 표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에라도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넌 란트가 만들어 낸 괴물이야.”
고요하게 얼어붙은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너를 끔찍이 증오하고 경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