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2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23화(123/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23화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맞는지, 지금 시에라의 얼굴은 록사나와 굉장히 많이 닮아 있었다.
특히 데온을 응시하는 혐오감 어린 싸늘한 눈빛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데온의 예측 범주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너를 동정한다.”
그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화한 적 없던 데온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시에라는 그런 그를 향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 너를 동정하는 사람은 나뿐일 거야.”
그것은 분명 데온이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너를 경멸할 자격도, 동정할 자격도 충분하지.”
이제껏 누가 감히 그를 동정할 수 있었을까.
“우습군.”
더군다나 그 상대가 시에라라니.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전부터 간혹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가?”
데온의 입가에 조롱 섞인 냉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그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날 살렸다는 거냐.”
그러나 그에게서 변화를 이끌어 낸 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너를 용서한다는 말 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건 내가 다시 죽었다 태어나도 불가능하니까.”
조금 전까지의 데온처럼 이번에는 시에라가 무감정한 모습으로 읊조렸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덧붙여진 말에 데온의 눈에 한층 더 강렬한 예기가 어렸다.
“그래. 내 아들을 죽인 네가 내 딸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정말 돌았군. 그따위 헛소리나 지껄이다니.”
“아니, 헛소리가 아니라 넌 정말 사나의 충실한 개지. 짖으라면 짖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작 너 스스로는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아그리체에서 빠져나온 이후, 시에라는 겁을 상실한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내가 너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은 이유도 그것과 다르지 않아. 넌 아직 내 딸에게 쓰임이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이렇게 목전에 두고 이따위 소리를 주저 없이 내뱉을 리가 없었다.
“쓸모 있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아그리체의 방식이잖니.”
그것이 데온을 살린 이유라면 정말이지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겁 없이 입을 놀리는 건 거기까지만 해. 점점 봐주기도 힘들어지니까.”
데온은 시에라에게 서늘히 경고했다.
“아그리체에서 날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데려와 치료시킨 것이 대단한 은혜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내 생각에는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고도 목숨줄을 연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벽에 붙어 서 있던 에밀리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 왔다.
데온의 몸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감히 제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인가.
데온의 미소에 살얼음이 꼈다.
“심복 따위에게 얕보이다니 나도 꼴이 우스워졌군.”
철컹.
그는 손을 움직여 손목과 발목을 감싸고 있는 족쇄를 부숴 버렸다.
“재미없는 놀음은 이쯤 해서 끝내도록 하지.”
지금까지 시에라에게 장단을 맞춰 준 것은 데온 나름대로의 어울리지 않는 관용이었다.
데온은 그녀가 지금 무릎 위에 놓인 저 칼로 그를 찌르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어쩌면 그 기다림 속에는 아주 희미한 기대가 녹아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데온이 내준 기회를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이것으로 목숨값은 충분히 갚은 셈이었다.
하지만 시에라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그녀에게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녀의 입장에서도 그리 아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내 딸에게 가렴.”
시에라 역시 데온을 결박하고 있는 도구들의 무가치함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에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딸에게 가서…….”
데온은 바닥을 딛고 내려서 의자에 앉은 시에라를 서느렇게 내려다보았다.
“언제든 그 아이를 위해 죽어. 그러라고 살려 준 목숨이니까.”
위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이 칼날처럼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웠다.
그러나 시에라는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서슬 퍼런 눈빛이 당장이라도 그런 그녀를 찔러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데온은 시에라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유지되었던 그들의 기묘했던 시간은 끝이 났다.
그동안 이곳에서 생각보다 많은 날들을 소모했던 만큼 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데온은 곧장 중립 지역을 떠나 아그리체로 이동했다.
* * *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아그리체에는 아직까지도 지난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늦겨울에서 초봄이 되었으나 아그리체의 풍경은 여전히 삭막했다.
데온은 기억보다 훨씬 한적한 느낌을 풍기는 저택의 모습을 잠깐 두 눈에 담았다.
저벅.
마침내 그의 걸음이 저택의 안 쪽으로 이어졌다.
데온은 몇 개의 방과 란트 아그리체와 결전을 벌였던 장소를 거쳐 다시 처음에 섰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데온이 번거로운 일을 피해 기적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저택 내에 머무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깐, 거기 너 뭐야?”
데온이 막 저택을 빠져나가려 할 때쯤 처음으로 그를 발견한 사람이 나타났다.
데온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헉, 데온?”
그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그는 데온의 이복형제 중 하나였고, 당연히 지금까지 데온의 관심 밖에 있던 이였다.
그래서 데온은 지체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뭐, 데온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조금 전 불시에 내뱉은 음성이 상당히 컸는지,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 내에 분명 록사나는 없었다.
기실 데온도 이곳에 그녀가 있을 확률이 희박하다 여기기는 했으나 한 번쯤 확인해 볼 가치는 있다고 여겨 와 본 것일 따름이었다.
목적했던 일을 끝마쳤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앗, 잠깐!”
데온은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주저 없이 발길을 뗐다.
그는 아까 아그리체의 저택에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이번에도 홀연히 사라졌다.
* * *
“뭐? 누가 왔었다고?”
제레미의 눈매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는 위그드라실에서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저택의 문을 넘자마자 귓가에 웬 개소리가 들렸다.
“데온이었어, 정말.”
“지금까지 코빼기 하나 안 비치더니, 어쩐 일이지?”
“그런데 오자마자 그냥 갔다니까. 그냥 잠깐 들른 거였나 봐.”
“도대체 무슨 일로?”
“그걸 내가 알아?”
주변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모두들 잠깐 얼굴을 비쳤다 사라진 데온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뒤섞여 있었지만 놀라움과 의아함만큼은 공통되어 있었다.
제레미의 눈에 일순간 날카로운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온이 아그리체에 왔다는 건 록사나를 찾아서일 가능성이 컸다.
모두가 의아해할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저택에 들렀다가 다시 사라졌다고 하니 신빙성이 더욱 커졌다.
록사나 외에는 데온이 아그리체에 관심을 둘 만한 이유가 없으니까.
한동안 록사나를 사이에 두고 데온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제레미 역시 나름대로 그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끼는 한동안 조용하다가 왜 갑자기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그냥 지금까지처럼 아무 데나 처박혀서 짜져 있을 것이지.’
그래도 제레미뿐만 아니라 데온도 아직 록사나를 찾지 못한 것 같아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역시 데온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그렇지 않아도 가슴 밑자락에 깔려 있던 짜증이 스멀스멀 도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레미는 위그드라실을 빠져나올 때부터 내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일을 입 밖에 꺼냈다.
“그보다 조만간 위그드라실에서 친목회가 열릴 예정이니까 다들 그런 줄 알고 있어.”
“뭐? 친목회?”
“그래. 다섯 가문 다 참석하기로 얘기 끝났어.”
다들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냐는 듯이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거기에 우리도 가야 한다고?”
“그래.”
엄밀히 따지면 이 웃기지도 않은 친목회를 기획하게 된 원인이 아그리체와 페델리안의 반목 때문이라 할 수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들은 귀가 따가워질 정도로 소리 높여 웅성거렸다.
우리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하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물론 제레미도 거기에 동감했다.
친목회라니,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다섯 가문의 수뇌들이 머리를 맞대 의논한 회의의 결과가 겨우 이따위라니. 배를 잡고 폭소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것은 결정된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제레미는 전부 다 성가셔져서 여전히 웅성거리는 형제들을 뒤로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차라리 데온이 수장이 되었더라면…….”
혼잣말 같은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고막을 찔러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바로 그 순간 막 계단 위로 내디뎌진 제레미의 발이 우뚝 멈추어졌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음습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음성이 바닥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