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46)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46화(146/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46화
* * *
처음에 그것은 형체 없는 검은 안개였다.
하지만 모래 바람처럼 떠밀려와 한 덩어리로 뭉친 그것은 어느새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되었다.
‘…….’
거기에서 유일한 색채를 가진 피 같은 붉은 눈이 미동 없이 닉스를 응시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에 그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눈앞에 조용히 도사리고 서서 소리 없이 그를 주시하는 시선에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닉스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붉은 눈을 마주했다.
마침내 새까만 그림자의 손이 그를 향해 뻗어졌다.
푸욱!
“헉……!”
가슴 한복판에 섬뜩한 통증이 파고드는 순간 닉스는 깊은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곧바로 심장부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외상도 없었다.
그저 늘 일정한 박동을 유지하던 그의 심장이 오늘따라 요란하리만치 크게 쿵쾅거리며 뛰고 있을 뿐이었다.
“인형도 악몽을 꾸는 모양이지?”
바로 그때, 고요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닉스는 그 음성을 쫓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밤이 깊었는지, 깜깜한 방 안에 어스름한 달빛이 스미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방 안에 존재했던 누군가의 몸에도 시린 달빛이 쏟아졌다.
은은한 빛 무리가 머무는 머리칼에도, 그 사이로 드러난 갸름한 얼굴에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동그스름한 어깨에도 하얀 빛이 덧씌워졌다.
조금 전 닉스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록사나였다.
파티라도 즐기다 왔는지,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몽?”
방금 전 들었던 말을 무심코 상기한 닉스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내가 지금 꿈을 꿨다고?”
“그걸 나한테 물어 봤자.”
록사나가 고개를 삐뚤게 기울이자 그녀의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다 문득 닉스는 지금의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잠깐, 그런데 너…….”
어째서 록사나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렇게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페델리안의 지하 감옥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지금 그가 갇혀 있는 이곳 위그드라실까지 이동하는 동안, 록사나는 내내 그의 앞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굉장히 자연스럽게 그의 눈앞에 나타나 말을 걸고 있었다.
퍼뜩, 닉스는 페델리안에서 록사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너, 날 속였지?”
지금까지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록사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닉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베르티움으로 보내 준다더니 얘기가 다르잖아! 들어 보니 여긴 위그드라실이라고 하던데! 게다가 베르티움의 인형술에 대한 청문회 얘기는 또 뭐야? 애초에 노엘이 날 버렸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 아니야?”
록사나는 도끼눈을 뜨는 닉스를 보며 성가심을 느꼈다.
역시 베르티움에서 먼저 공격해 왔더라면 일이 쉬워졌을 텐데 조금 아쉬워졌다.
위그드라실에 들어오기 전에 아예 베르티움에 대한 닉스의 믿음을 좀 더 깨부숴 놓고 싶었는데.
그래서 겸사겸사 베르티움의 인체 실험에 대한 신랄한 증언을 닉스의 입으로 들을 수 있으면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빨라지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차적인 목적은 닉스가 주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괴로워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녀가 닉스에게 품은 이 마음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굳이 이 심정을 말로써 설명하자면 그런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녀가 지금껏 매일같이 싸늘한 분노를 태우며 데온을 옆에 두고 있었던 것과 비슷했다.
닉스를 죽이고자 했던 마음은 그날 베르티움을 떠나면서 사라졌다.
물론 이제 와서 그에게 온유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또 모를까.
록사나는 이 인형에게 살아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절망과 고통을 안겨 주고 싶었다.
베르티움에서 아실의 탈을 뒤집어쓴 닉스의 간교함에 홀려 주저했던 단 한 순간.
기껏해야 1초 남짓밖에 되지 않는 그 망설임의 순간을, 록사나는 아직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만큼은 눈앞에 있던 닉스를 완전한 아실처럼 느꼈기 때문에 더더욱.
록사나는 뒤늦은 분노를 표출하는 닉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게 입술을 뗐다.
“너, 데온을 만났다지?”
그 순간 닉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끄럽게 나불거리던 입도 굳게 다물어졌고, 눈의 깜빡임조차 굳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록사나가 대답 없이 말을 돌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불현듯 닉스는 페델리안의 행렬에 있을 때 마주쳤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
카시스 페델리안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이 바로 ‘데온 아그리체’였다.
그 다음으로, 조금 전 환영처럼 나타나 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검은 그림자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가슴에 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혹시 그 남자도 여기에 있어?”
불길한 직감이 스멀스멀 척추를 기어올랐다.
닉스는 무의식중에 긴장하며 목소리를 작게 죽였다.
록사나에게 조금 전까지 무엇을 따져 묻고 있었는지도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남자를 처음 보았던 날부터 오늘까지 줄곧 그래 왔듯이, 지금도 보이지 않게 그를 쫓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섬뜩한 붉은 눈동자를 생각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너무나 쉽게 의미를 잃었다.
땀을 흘릴 수 없는 몸임에도 닉스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너, 그가 누구인지 알아?”
“이 몸의 원주인을 죽인 사람이잖아.”
닉스는 불안히 주변을 훑으며 대꾸했다.
그에 록사나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닉스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걸 알지? 데온이 네게 그런 말을 하던가?”
“아니, 그냥…….”
닉스는 그 당시 느꼈던 끔찍한 기분을 상기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냥 알 수 있었어.”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거지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 남자를 생각하면 온 몸의 털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찰그락.
닉스는 손을 들어 괜스레 콧잔등을 매만졌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의 몸에 붙은 쇠사슬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닉스의 행동에 잠깐 록사나의 눈길이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닉스는 데온을 만났던 밤, 충격에 허덕이고 있던 그의 몸에 밀려들었던 청량한 기운을 떠올렸다.
실비아 페델리안의 손이 닿고 있는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안온함이 온몸에 번졌던 기억이 났다.
그것을 상기하자 지금도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록사나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여기에 있어, 그 사람.”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진 소리에 닉스는 흠칫했다.
“방금 전까지 네 앞에 서 있었고.”
이어진 말에는 더군다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곧 그는 이를 드러내며 록사나에게 으르렁거렸다.
“거짓말하지 마. 또 속이려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글쎄, 거짓말일까 아닐까.”
록사나는 애매한 말을 남긴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방, 잠금장치가 영 별로더라. 손만 대도 간단히 열리던데.”
하지만 문가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가 덧붙인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들으란 듯이 읊조려진 것이었다.
“그러니 그 사람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거겠지.”
“너……!”
등 뒤에서 닉스가 약이 올라 이를 가는 소리를 들으며 록사나는 방을 나섰다.
* * *
닉스가 있는 방을 빠져나온 록사나는 다시 문고리에 있는 잠금장치들을 원상태로 되돌려 놨다.
이 정도는 아그리체에서 밥 먹듯이 배웠던 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잠금장치를 채우고 손을 내린 록사나의 눈빛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 닉스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 데온이 이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록사나는 독나비의 신호로 그것을 알고 먼저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왔을 때, 이미 데온은 사라진 뒤였다. 이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위그드라실 안에서 록사나가 부릴 수 있는 나비는 미리 꺼내서 숨겨 온 단 몇 마리 뿐이었고, 그마저도 능력치를 제대로 끌어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작해야 닉스를 가둬 놓은 방에 심어 둔 나비를 통해 데온의 침입 소식을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
한창 연회 도중이라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없었던 것과, 견고한 잠금장치를 믿고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은 안일함이 데온과 록사나의 출입을 허용했다.
다시 만나게 된 닉스는 고작 며칠 만에 제법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카시스의 말처럼 정말 그는 데온의 존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실의 육체에 남아 있던 반사 작용 같은 것이라 보아야 할까? 아니면 뇌에 남아 있던 기억의 잔상인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닉스의 그 반응은 진짜였다.
아실의 얼굴을 한 채 데온의 이름에 불안해하는 그 몰골이 속을 뒤틀리게 해서, 록사나는 공연히 닉스에게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고 왔다.
게다가 닉스를 보러 왔던 데온의 행동 역시 록사나의 신경을 긁었다.
이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미처 상정해 두지 못했던 상황인 만큼, 은근히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더군다나 데온과 닉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위그드라실 안에서 데온과 카시스가 마주치는 일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복도의 유리창에 비친 록사나의 붉은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녀는 아까 연회장에서 보았던 카시스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는데. 지금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도 모양만 이상해지겠지.
첫날부터 카시스와 단둘이 연회장을 일찍 빠져나오는 것은 너무 노골적인 그림이라, 아까 밖으로 나선 것은 록사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쉬움이 스몄다.
위그드라실에 오기 전까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종일 붙어서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우선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었으니까.
록사나는 사라진 데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연회장에 몰려 있는 틈을 타서 나비 한 마리를 어둠 속에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