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60)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60화(160/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60화
밖에서는 확실히 표정 관리를 더 잘하게 된 것 같은데, 그 반작용인지 내 앞에서는 예전보다 반응이 솔직해진 것 같았다.
제레미는 그 이상 길게 대화하면 사실 이 일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금방 들킬 것 같아, 바드리사 가스토르에게 ‘가문의 중차대한 일을 이렇게 대충 논의할 수는 없으니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자’고 말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제레미가 어떻게 허세를 부렸을지 익히 상상이 갔다.
그렇다면 바드리사의 입장에서는 아그리체에서 그들에게 더 좋은 대가를 받아 내기 위해 일부러 뜸을 들인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들이 아그리체에 바라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이 너무 지나친 대가만 아니라면 가스토르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그것을 이용하려 하는 우리가 얼마나 악독하게 느껴질까 싶었다.
하지만 아그리체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동안 위그드라실 안에서 여러 모임에 참석해 상황을 살피며 느낀 것인데, 란트가 죽은 오늘날 5가문 사이에서의 아그리체의 입지는 상당히 비좁다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로 좋지 않던 아그리체의 이미지가 겨울 이후로 완전히 바닥을 친 데다, 란트의 뒤를 이어 새로 수장이 된 제레미도 갓 성인이 된 까마득하게 젊은 청년이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가문에서도 은연 중에 아그리체를 만만히 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속내를 휘페리온처럼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지난번에 전해 들은 입구에서의 마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아그리체를 적나라하게 무시하는 발언을 해도 당당히 따져 묻지 못하는 것이 현재 아그리체의 위치였다.
하지만 베르티움에서도 느낀 것처럼, 다른 가문들 역시 앞에서는 고결해 보일지언정 뒤에서는 아그리체와 크고 작은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해서 생긴 것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늘을 우러러 정말 아그리체와 조금의 접점도 없었던 것은 란트와 완전한 대립 관계였던 페델리안 정도일까.
베르티움처럼 대놓고 불법적인 거래를 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휘페리온 역시 마물 때문에 아그리체에 물자 공급을 받고 있었다.
또 지금껏 표면적으로 페델리안처럼 아그리체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하던 가스토르도 실상은 이름을 숨긴 채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그리체가 예전부터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으면서도 지금까지 존속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난겨울 아그리체는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아그리체는 오늘날까지도 이렇게 남아 있었고, 란트가 죽은 이후에도 그가 뿌려 놓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그리체는 완전히 공중 분해 되지 않고 다시 그 명맥을 잇기로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내가 직접 바드리사 가스토르와 대면할 생각이었다.
“제레미. 내가 알고 있는 걸 설명해 줄게.”
하지만 위그드라실에 와서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너와 상의했으면 해.”
“상의라고? 나하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제레미가 멈칫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면 제레미가 그것을 따르는 형태였다.
우리 둘 모두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제레미도 그것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내 말이 낯설 만도 했다.
“응. 네 의견을 듣고 싶어.”
하지만 제레미는 내가 없는 동안 혼자서 아그리체를 잘 이끌어 왔다.
가족인 나는 옆에서 동생의 성장을 응원해야 마땅했고, 예전보다 자란 제레미의 모습이 기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내 생각을 너한테 말해 줄 테니까…….”
조금 전 카시스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도 깨닫는 바가 있었고 말이다.
내 눈에야 언제까지나 마냥 어려 보이는 동생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제레미가 내 그늘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같이 결정하자.”
그래서 말하자 제레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다가 곧 불이 밝혀진 것처럼 낯빛이 서서히 환해졌다.
꼭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어린아이같이 들뜬 표정이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조금 웃고 말았다.
* * *
그날 저녁에 판도라와 만났다.
“들어요. 취향을 몰라서 제가 좋아하는 차로 내오게 했어요.”
“네, 차향이 좋네요.”
그녀는 왠지 이렇게 나와 단둘이 차를 마시고 있는 상황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좀 더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판도라와 나는 서로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먼저 이 자리를 마련하기를 원했던 것도 판도라였다.
아마 그녀 역시 나하고 한가로운 잡담이나 나누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판도라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래도 지금의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 나와 달리 판도라는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가 그녀에게는 낯선 내 방이라 더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쩐지 마주한 판도라의 얼굴에서 희미한 망설임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저, 선뜻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다행히 판도라는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이 없는지 입을 열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그리체 양을 따로 만나고자 한 것은…….”
그런데 이어진 말이 뜻밖이었다.
“일전의 일을 사과하고 싶어서요.”
나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
일전의 일이라면, 페델리안의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 말고는 그녀와 내가 엮였던 일이 없는데.
내 시선을 받은 판도라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한결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때는 제가 확실히 무례했어요. 초면인데도 다짜고짜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한 데다 위협까지 가했으니.”
그 얘기가 맞구나. 하지만 설마 사과를 할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의외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전 환영받지 못한 손님인 입장이었고, 아그리체 양은 페델리안의 정식 손님이었죠. 그 당시에는 어리석음이 앞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여러모로 부끄러운 언행이었어요.”
물론 오늘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의 태도를 보고 이번에 나를 따로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페델리안에서와 같은 이유가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페델리안과 아그리체, 두 가문 모두에 큰 결례를 끼쳤고요. 그런 부분까지 모두 포함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판도라는 페델리안에 있을 때에도 오르카의 만행을 수습하기 위해 혼자 열심이었다.
그때 독나비를 통해 본 만찬회에서 헛소리만 늘어놓던 오르카 대신 정식으로 결례를 사과하던 판도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실은 그때 페델리안을 떠나기 전부터 줄곧 사과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지 못했어요.”
판도라는 내 생각보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지금 이러는 이유가 휘페리온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든, 아니면 그녀의 말대로 순수하게 스스로의 실수를 반성하는 의미이든 간에…….
판도라에게서 이렇게 사과를 듣자 나는 조금 난처한 마음이 들었다.
“휘페리온 양.”
내가 입을 열자 판도라가 약간 긴장감 섞인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다.
나는 그렇게 운을 띄운 다음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할 말을 정리한 뒤 다시금 입술을 뗐다.
“그때 충동에 앞서 행동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요.”
비록 마물을 꺼낸 건 판도라가 먼저였지만, 어쨌든 그 전후로 유치하게 행동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 판도라의 마물에게 살의가 없었던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마물을 그런 식으로 해친 건 나도 과했어요.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러니 일단 판도라와 있었던 지난 일은 완만하게 끝맺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온화한 반응을 보이자 판도라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아니에요. 아그리체 양은 충분히 할 만한 일을 한 건데요.”
판도라는 혹시 내가 그녀를 싸늘하게 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 적잖이 안심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다 이윽고 그녀가 조금 전처럼 또 한 번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 음. 이제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청의 귀공자에게 접근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그건 이미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그때는 제가 뭘 잘못 먹었는지 잠깐 제정신이 아니어서…… 물론 이제 와서 이런 변명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요.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은 전혀 두 분 사이에 끼어들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네, 개의치 않으니 휘페리온 양도 신경 쓰지 마세요.”
판도라는 아까보다 확연히 편안해진 얼굴로 차를 마셨다.
그 후로 분위기가 풀려 소소한 대화도 몇 번 오고 갔다.
그러는 동안 느낀 건데, 판도라는 더 이상 나한테 지난 일로 인한 껄끄러움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완만하게 지난 일을 마무리 지은 것과는 별개로 아직 내게 거북함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내비치지 않았다.
의외로 판도라는 뒤끝이 없는 성격인 듯했다.
“일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휘페리온 양이 사촌분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찻잔을 손으로 느리게 매만지며 지금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냈다.
“지금 보니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오르카와 달리 차라리 판도라는 겉과 속이 동일한 유형의 사람인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대하기 쉬워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판도라의 반응이 다소 묘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져서 나는 다시 말했다.
“물론 저는 두 분에 대해 잘 모르니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아니요……!”
그러나 판도라가 깜짝 놀랄 정도로 격렬하게 부정해 왔다.
“실례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그리체 양은 사람을 보는 눈이 정말 뛰어나시군요. 맞아요, 오르카와 저는 정말 조금도 닮지 않았지요.”
……둘이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판도라는 오르카와 닮지 않았다는 내 말이 상당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제 명백한 호감마저 담겨 있었다.
그걸 보고 당연히 나는 기분이 미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다른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니 오르카와 판도라는 휘페리온의 수장에게 나름대로의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물론 판도라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 페델리안에서의 일 때문인가. 하긴, 그것 말고는 걸리는 부분이 없긴 하지.
애초에 마물을 이용해 다른 가문에 무단 침입을 한 것에서부터,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반강제로 가문에 소환된 것까지, 휘페리온의 입장에서는 밖으로 흘러나가 봤자 좋을 것이 없는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판도라도 이후 자숙하는 중인 듯했다.
반면 오르카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인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르카가 위그드라실에서 나한테 접근한 건 첫 번째 다과회 때 한 번뿐이었고, 그 후로 그는 내게 관심을 일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르카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지니 그것도 별난 일이었다.
뭐, 오르카는 그렇다 치고 판도라는…….
어쩌면 나도 조금쯤은 마음에 드는지도.
나는 내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판도라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조금만 이용할까 했는데.
그냥 관둘까.
분명 다루기는 쉬울 테지만, 꼭 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뒤이어 시선이 마주친 판도라 휘페리온을 향해 무구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