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64)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64화(164/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64화
* * *
데온 아그리체는 인적 없는 후원에 있었다.
저녁 연회가 끝나 갈 무렵.
땅거미 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짙은 주황색 물살이 번지고 있었다.
후원에는 록사나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화병 안의 것과 비슷한 꽃이 피어 있었다.
동일한 종류는 아니었지만 외양만큼은 매우 흡사했다.
평소 같으면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을 꽃 덤불이 데온의 눈길을 붙잡고, 거기에 이어 그의 걸음마저 향하게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데온은 손아귀에 지그시 힘을 줘 그 안에 움켜쥔 것을 바스러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서 고아하게 피어 있던 꽃이 그의 손 안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흔들림 없이 곧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얼핏 무심해 보이는 얼굴은 실상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하게 결빙된 상태였다.
짓이겨진 꽃잎이 느슨히 늘어뜨려진 손 밑으로 진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때, 붉은 기척이 시선 끝에 감겨들었다.
멈춰 있던 데온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꽃 덤불 위에서 노니는 붉은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에 눈길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것은 록사나의 독나비가 아니라 그냥 보통의 평범한 나비였다.
“이런 곳에 있었군, 자네.”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는 백의 수장인 히아킨 휘페리온의 것이었다.
힐끗 시선을 움직이자 백발이 반쯤 섞인 연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호리호리한 몸집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옅게 주름진 눈매를 접어 웃었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란트가 살아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퍽 살가운 말투였다.
위그드라실의 모임에서도 그렇고, 또 가문 간의 거래를 위해 따로 모인 자리에서 종종 얼굴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데온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시린 태도로 무감하게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히아킨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 듯, 오히려 데온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꽃을 감상하고 있었나?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만.”
데온은 히아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러나 백의 수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데온의 취미에 맞춰 주기라도 할 셈인지, 얼마간 눈앞에 있는 꽃을 감상하던 히아킨이 잠시 후 다시 입을 벌렸다.
“사실 제레미라고 하는 자네의 동생이 위그드라실의 회의 자리에 나타나 가문을 잇겠다고 말했을 때는 좀 놀랐다네.”
“…….”
“난 자네가 수장이 될 줄 알았거든.”
엷은 웃음을 띤 검은 눈동자가 저녁놀이 스민 데온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지난겨울의 하극상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 말은 히아킨이 옆에 다가와 선 이후 처음으로 데온의 시선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그리체가 유달리 그런 방면에 특출하기는 했지만 다른 가문들에도 제각각 정보책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으니까.
데온은 다시금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보고 히아킨이 허허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네는 여전히 말이 없구먼.”
그리고 히아킨 휘페리온은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뭐. 나도 수장이나 후계자가 아닌 자네에게는 딱히 볼일이 없으니까.”
데온이 하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히아킨도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그 역시 이 영양가 없는 혼자만의 대화를 그만 끝마칠 생각인지 데온에게 아까와 반대되는 의미의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럼 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그러고 나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잦아드는 소음을 느끼며 데온은 아까부터 줄곧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본래의 형체가 남지 않은 꽃의 잔해가 잔디의 녹색 물결 위로 추락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데온 아그리체.”
세상 그 무엇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이, 데온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누구보다 가장 거칠게 끌어내는 대상 중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깨진 빛이 점멸하는 것 같은 붉은 눈이 표적을 관통하듯이 움직였다.
시야에 박힌 것은 석양에 물든 은빛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남자였다.
카시스 페델리안을 보는 순간, 데온의 안에서 한시도 사라진 적 없는 살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빙해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카시스의 눈동자가 데온에게 꽂혀 들었다.
“너, 베르티움에서 뭔가 한 건가?”
차가운 물음이 데온의 고막을 긁어내렸다.
눈앞의 대적자에게 당장 달려들어 이 자리를 피로 물들일 수도 있었지만 데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무엇을?”
“무엇이든.”
데온의 얼굴에는 한 조각 변화도 떠오르지 않아 그의 표정을 통해서는 원하는 바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느리게 벌어진 데온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말이 가시덩굴처럼 카시스의 귀를 휘감았다.
“그 남자를 죽인 일을 말함인가.”
그 순간 카시스의 표정에 버석거리는 균열이 생겼다.
반면 데온은 여전히 단조로운 낯으로 그런 카시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엘 베르티움이 위그드라실에 드물게 방문할 때마다 항시 옆에 데리고 있던 남자.”
데온이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다.
베르티움에서 카시스도 만난 적이 있던 노엘의 심복 단테.
노엘 베르티움이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없어. 단테는…… 이제…….”
위그드라실에 오기 전, 데온의 발길이 베르티움으로 향했던 것은 카시스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잠입과 은신에 능한 아그리체이니만큼 데온이라면 베르티움에 숨어들어 록사나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카시스의 몸에서 일렁이던 기세가 변했다.
화악!
다음 순간 공기 중에 은은히 흐르던 꽃향기가 한결 짙게 코끝을 찔러 들었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붉은 노을이 데온의 시야에 넘쳐흐를 듯이 가득 들어찼다.
황혼 녘에 반쯤 먹힌 카시스의 얼굴이 그 색채와는 전혀 다른 얼음 결정 같은 온도를 머금은 채 데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숨에 틀어잡힌 멱살에 목이 조였다.
데온은 카시스에 의해 메다 꽂히다시피 거칠게 밀쳐져 꽃 덤불 위에 몸을 짓눌리고 있었다.
데온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꽃잎과 무성한 초록 잎 사이로 흐트러졌다.
소란을 못 이겨 떨어진 이파리와 꽃잎이 진한 향기를 머금은 채 일순간 부상했다가 곧 바람에 잘게 흩날렸다.
“너는 도대체 왜…….”
억누른 음성이 악문 잇새로 흘러나왔다.
“늘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조각난 유리 조각 같은 눈빛이 농밀한 공기에 뒤섞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데온은 무감하리만치 시린 눈으로 그것을 마주했다.
목을 조이고 있는 손을 당장이라도 떨쳐 낼 수 있었지만 데온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 짓눌려 떨어진 하얀 꽃잎 위로 붉은 햇빛이 물들었다. 파란 잔디 위에 점점이 흩어진 꽃잎이 꼭 핏자국 같았다.
“그렇게 무엇이든 부수고 죽이는 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가?”
미동 없이 늘어져 있던 데온의 손이 들어 올려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이라도 잡아 빼 버리고 싶은 카시스의 심장 대신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다른 것을 움켜쥐었다.
파삭!
막 날아가려 하던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데온의 손 안에서 가차 없이 으스러졌다.
그것은 조금 전 데온이 보았던 것과 달리 확실한 록사나의 독나비였다.
아마도 록사나가 카시스에게 붙여 놓았을 것이다.
데온은 그것이 꼭 일종의 영역 표시 같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던 입술에 서리 낀 미소가 피어났다.
록사나는 실로 담대했다.
그녀는 화원에서의 만남 이후 데온을 따로 감시하지도 않았다.
그를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고도, 혹시나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지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것은 분명 록사나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온이 이미 길들여진 개라는 사실을.
그러니 데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의 뒤를 쫓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 자락의 시선조차 그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일 터다.
지난밤 록사나가 위그드라실을 떠나 마물 서식지로 향하는 것을 알고 뒤따랐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카시스 페델리안에게 붙여 놓은 독나비를 보고 어찌할 수 없이 속이 뒤틀렸다.
스산한 북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얼굴에 싸늘한 비틀림이 박혔다.
데온의 손에 거칠게 틀어잡힌 나비가 마침내 완전히 으스러져 먼지처럼 흩날렸다.
카시스도 자신에게 붙어 있는 독나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 카시스가 직접 허락한 일이기도 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온의 행동으로, 나비는 록사나와 교감해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소멸되었다.
“내가 노엘 베르티움의 심복을 죽인 것을 아는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카시스 페델리안.”
나직한 음성이 고요한 늦저녁의 밀도 높은 공기를 가로질렀다.
“페델리안의 신념에 맞게 지금 위그드라실에서 그 사실을 밝힐 텐가?”
데온의 물음에 카시스가 시리게 읊조렸다.
“그렇다 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쉽사리 제 살인을 긍정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실제로 데온이 베르티움 안에서 노엘의 최측근인 심복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데온은 한 점의 미동조차 없는 눈으로 카시스를 직시하며 말했다.
“내가 한 일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네가 지금 저 안에 들어가서 내가 한 일을 밝힌다 해도 말리지 않아.”
검게 보일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은 데온의 눈이 그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되면…….”
그러나 마침내 이어진 말에 카시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씹어 삼키고 싶은 기분이 되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아그리체를 다시 짊어지고 가기로 결정한 록사나에게 퍽 곤란한 일이 되겠군.”
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는 듯이 데온의 입꼬리가 가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