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69)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169화(169/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69화
* * *
록사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잘 익은 과일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안에 접시 위에 놓인 선홍색의 동그란 형태가 담겼다. 조금 전 방에 들렀던 사용인이 희귀한 과일이 들어왔으니 맛을 보라며 주고 간 것이었다.
제레미는 잘하고 있을까.
록사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곧 가슴 밑바닥에 희미하게 깔린 염려를 털어 버렸다.
제레미는 잘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뻗어진 가느다란 손가락이 붉은 과실을 접시 위에서 느리게 굴리기 시작했다.
록사나가 위그드라실에 와서 하려는 일은 어떤 의미로 과일을 따는 것과 비슷했다.
성급한 마음에 설익은 과실을 따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 떫고 시큼한 맛에 결국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뱉어 낼 것이 분명했으니.
그래서 가스토르와의 만남도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 생각되었다.
가스토르의 초조함과 조급함, 그리고 아그리체에 대한 혐오와 분기가 무르익어, 그들이 먼저 아그리체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가 가장 적기였다.
분명 가스토르는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최선의 해결책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을 때, 그 놀라움과 벅찬 감정은 얼마나 클 것인가.
황홀경에 가까운 안도감에 사로잡혀 시야를 넓게 가질 틈이 있겠는가.
애초에 그 원인이 어디에 있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인지는 잠시 묻어 두고, 뜻밖에 주어진 호의를 그와 동일한 호의로 되갚고 싶어지지는 않을까.
게다가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문제이지 않았던가.
물론 록사나는 제레미에게 말했던 대로 가스토르에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페델리안을 제외하고 남은 세 가문 중에 아그리체가 새로이 맞이할 동맹자로 가스토르를 선택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호의와 신의를 갖고 있었다.
베르티움은 이미 옛 아그리체 못지않게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으니 제외였다.
휘페리온은 속에 독을 품은 구렁이를 백 마리쯤 숨겨 두고 있을 것 같은 작자들이라 록사나의 미학에 어긋났을뿐더러 깊은 관계를 맺기에도 적합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가스토르는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가문이었다.
특히 수장인 바드리사는 란트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성품이 곧았고, 그 후계자인 류자크 역시 그녀를 빼닮았으니.
아그리체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면 가스토르가 최상의 선택이었다.
물론 록사나가 본 소설 속에서는 류자크 역시 노엘이나 오르카와 마찬가지로 다소 정신 상태가 이상한 남주인공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실제 그의 성격은 소설과 차이가 있는 듯했다. 어디에서 생긴 차별성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애초에 록사나의 존재 자체도 규칙성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니.
그래서 이런 류자크라면 그가 수장이 되어서도 장기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록사나가 지켜본 결과, 류자크는 어떤 의미로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기까지 했으니 이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심지 곧은 가스토르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홍역을 치르게 된 것은 록사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아그리체에서 생산한 마약은 정말 그 독성이 지독할 정도였다.
그것은 3년 전 카시스가 아그리체에 붙잡혀 있을 때 한창 마리아가 돌보던 독초들 중 하나였는데, 효과를 열 배 강화시키는 데 성공해 결국 란트가 그것을 중립 구역의 암시장에 유통시켰다.
바드리사의 남편이 어쩌다 거기에 손을 대게 되었는지는 몰랐고, 또 그에 얽힌 사연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그리체의 독초밭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해독약의 모종까지도 깡그리 잃을 뻔했으니.
과실을 움직이던 록사나의 손이 멈추었다.
록사나가 다시 아그리체의 이름으로 위그드라실에 온 데에는 복잡한 마음이 작용했다.
그 결과, 결국 록사나는 제레미가 그녀를 위해 지키고 있는 아그리체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함께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지난겨울 제 손으로 아그리체를 무너뜨릴 때만 해도 두 번 다시는 그곳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그리체에 남은 제레미의 존재를 확인한 데 이어, 베르티움에서 그녀의 오빠인 아실의 거죽을 뒤집어쓴 닉스를 보는 순간.
록사나는 그녀가 등지고 떠나온 아그리체가 더 이상 과거의 잔해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미래의 선택지가 되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란트 아그리체는 죽어서까지 기어이 록사나의 앞에 제 흔적을 남겨 놓았고, 그것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때 록사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의 첫 시작점인 아그리체로 다시 한 번 돌아가기로.
그리고 란트의 첫 시작점이기도 할 그들의 아그리체에서, 그가 새겨 놓은 흔적을 이 손으로 하나씩 지워 없애 주고야 말리라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란트가 만들었던 그의 왕국, 옛 아그리체의 모습을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도록.
록사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그녀 혼자 바삐 움직인다고 해서 그 본질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은밀히, 서서히.
그렇게 물에 번지듯이 아그리체의 본질을 바꿔 나가는 것이 록사나가 바라는 일이었다.
물론 록사나는 자신이 티 한 점 없이 결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정의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지키기 어려운 다짐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일처럼 저울추가 명백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간절함을 무기로 삼아 원하는 것을 부당하게 갈취해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록사나와 제레미는 가스토르를 협박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우호적인 새로운 동맹 관계를 형성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쯤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
그러다 문득 록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막 그녀가 위그드라실에 심어 두었던 나비 중 하나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비를 소환해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확인한 록사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딘가로 급히 이동하고 말았다.
* * *
닉스 역시 노엘이 위그드라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매일 그래 왔듯이 오늘도 닉스의 상태를 보러 들어왔던 보초가 바닥에 기운 없이 드러누워 있는 그를 보고 알려 준 것이었다.
페델리안의 피도 눈물도 없는 심복들과 달리 그래도 다른 가문 소속의 보초들은 닉스에 대한 동정심을 조금쯤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인형이라 해도 일단 겉으로 보기에 사람과 다를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쉽게 연민을 품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이후로 오랜만에 닉스의 머릿속은 빌어먹을 악몽 대신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
노엘이 위그드라실에 있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초조한 마음이 부상했다.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조급해졌다. 정작 그 ‘무언가’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철그럭.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는 동안 연결된 사슬에서 소리가 났다.
닉스의 눈이 손목에 채워진 쇳덩이에 닿았다.
“…….”
문득 또 꿈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닉스는 무의식중에 손목을 더듬었다.
꿈을 꾸고 난 뒤에 종종 그랬듯이 그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꿈속의 내용을 상기하고 있었다.
찰그락…….
거기서 본 대로 손을 움직여 본 것은 닉스에게 있어 별다른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철컹. 찰그랑!
하지만 곧이어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짧게 울리며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닉스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뭐, 뭐야?”
얼마나 당황했던지 말까지 더듬었다.
지금 그의 발치에 떨어진 것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목을 옥죄고 있던 족쇄였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닉스가 잠시 후 입술을 꾹 깨문 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였다.
철컹!
이번에는 발목에 있던 족쇄를 해제했다.
닉스가 사지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이나 해방감과는 거리가 먼 감정에 젖은 닉스의 얼굴은 다소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잠깐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닉스가 곧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를 묶어 놓고 있던 족쇄는 이미 풀어졌고, 지금 이 방 안에는 그를 감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위그드라실 안에는 그의 주인인 노엘이 와 있었다.
닉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저 밖으로 나가면 필히 보초와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뒤이어 그의 푸른 눈동자가 고정된 곳은 철창으로 막힌 창문이었다.
그는 저 철창을 소리 없이 제거하는 방법도 꿈을 통해 알고 있었다.
* * *
아그리체의 식솔 중 한 명으로, 올해 봄부터 열여덟 살이 된 지젤은 남몰래 덤불 속에 들어가 주변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휘페리온과의 도박 자리에서 카드를 날려 그들에게 겁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손을 털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네. 길옆에 휘페리온을 골려 줄 수 있을 만한 게 있다고 해서 와 봤는데.
혹시 이 길이 아닌가? 그것을 발견한 이복형제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보았다고 했으니, 어쩌면 다른 산책로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이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을 고려하고 있던 찰나였다.
풀썩!
별안간 갑자기 옆쪽에서 무언가가 휙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지점은 그녀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덤불 바로 옆의 길목이었다.
의문을 품고 고개를 돌린 지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날렵하게 착지한 자세로 주저앉아 있는 어떤 소년이었다.
햇빛에 반사된 금발이 유독 환하게 반짝였다.
아무래도 길의 반대쪽에 있던 건물에서 지금 막 뛰어내린 듯했다.
그녀가 시선을 움직인 것과 거의 동시에 소년도 고개를 들었다.
“어?”
그 순간 지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누군가와 닮았다.
경황이 없어 그런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 보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다가…… 소년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순간 머릿속에 부유하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로 어제도 얼굴을 보았던 그녀의 이복 언니 록사나와 상당히 닮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저 밑바닥에 묻혀 있던 옛 기억을 더욱 깊숙이 파헤치자, 록사나의 위로 덧씌워지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비록 오래전 과거에 사라진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직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당시 록사나와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던 아그리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유년 시절, 저택 내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늘 웃는 낯으로 먼저 다가와 사탕 따위를 손에 쥐여 주곤 하던 별종.
아그리체에 어울리지 않게 티 없이 맑고 선량한 미소를 가지고 있던 사람.
꼭 천사같이 아름다워, 특히 록사나와 함께 나란히 서 있을 때면 이 아그리체가 천국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던 소년.
그리고 아버지 란트에 의해 폐기 처분 선고를 받고 데온의 손에 죽은 이복형제.
“아실……?”
마침내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이 소년의 빈자리에 멍하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