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06)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06화(206/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206화
* * *
“누나, 내 손 잡고 내려.”
나는 제레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떠났던 아그리체에 이렇게 다시 돌아온 기분은 기묘했다.
자리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는 나를 향해 제레미가 말 했다.
“그게, 아직 군데군데 복구가 덜 돼서.”
제레미의 말마따나, 아그리체 내부에는 아직 지난겨울의 황폐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미관상 보기 싫은 부분도 있을 텐데……. 그래도 금방 고칠 거야!”
상황에 좀 안 맞긴 했지만 제레미는 내심 들뜬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차 안에서 내내 내 눈치를 살피더니.
내가 아그리체로 돌아와 신이 난 것이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런 한편으로 제레미의 눈빛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나 있었다.
기껏 돌아온 내가 전과 달리 초라한 아그리체에 실망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조금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제레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말했다.
“아니야. 생각보다 정리가 잘 돼 있어서 놀라고 있었어.”
그러자 제레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먼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아그리체에는 네가 있으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맞잡은 손을 타고 제레미의 동요가 전해져 왔다.
곧 내 손에 가해지는 악력이 한결 강해졌다.
옆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왜인지 몽글몽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레미와 나는 손을 꼭 붙잡고 건물을 향해 걸었다.
소식을 듣고 나온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보다 수가 확연히 줄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아그리체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덩달아 밑으로 내려온 몇몇 이복형제들도 나와 제레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개중에는 제레미의 얼굴을 보고 못 볼 걸 본 듯이 더부룩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서는 이들도 있었다.
제레미가 무게감 따위는 모조리 던져 버린 낯으로 방실방실 웃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록사나 아가씨!”
그때, 누군가 내 앞으로 뛰쳐 나왔다.
나도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어서 그에게 알은척을 했다.
“요안. 아그리체에 남아 있었네.”
란트가 살아 있을 적에 줄곧 지하 감옥의 문지기를 맡았던 남자였다.
카시스가 잡혀 왔을 때 처음 안면을 튼 이후로 종종 저택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받아 주곤 했는데, 란트가 죽은 이후에도 떠나지 않고 용케 아직까지도 아그리체에서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록사나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상당히 감격한 것 같았다.
“넌 뭔데 우리 누나한테 친한 척이야?”
반대로 제레미는 갑자기 튀어나온 요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죄, 죄송합니다, 수장님. 록사나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것이 기뻐서 저도 모르게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너 이 새끼…….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 조심해. 알았어?”
“예!”
하지만 요안의 말을 들은 뒤, 막 사나워지려고 하던 제레미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그리체에 돌아와 기뻐서 그랬다는 소리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 같았다.
제레미는 언제 요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냐는 듯이 순하디순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나, 피곤할 텐데 일단 방에 가서 쉴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좀 쉬어.”
“내가 누나 방 매일 청소해 놓으라고 지시해 놨거든. 그러니까 깨끗할 거야.”
역시 제레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닉스 때문에 심각했던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나는 뿌듯해하는 제레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제레미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제레미는 곧장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복형제들에게 들르겠다고 했다.
그가 없는 사이에 혹시 별다른 일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굳이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제레미를 거절하고 혼자 계단을 올랐다.
또각.
잠시 후, 조용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지난날 이 건물까지는 불길이 닿지 않아서 그런지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이 깨끗했다.
겨울 이전보다 아그리체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수가 월등히 줄어든 탓에 괜스레 실내가 더 넓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어쩐지 아그리체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 안에 들어와 걷는 동안 예전과는 어딘가 다른 고요한 공기가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불현듯 나는 이 낯선 분위기 속에 안온함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쏴아.
열린 창문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밀려들었다.
잘게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가늘게 반짝거렸다.
그 사이에서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런가.”
아그리체는 더 이상 매분 매초 긴장하며 지내야 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곳은 이토록 낯선 색채를 입고 내가 모르던 세상이 되었다.
솨아아…….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녹색 해일이 일렁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마 그 어떤 말로도 정확히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안고서.
* * *
그날 저녁에는 제레미와 단둘이 늦은 식사를 했다.
원래 아그리체의 사람들은 각자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가족 흉내를 내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나나 다른 이복형제들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제레미는 최대한 오래 내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그동안의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것 같아서 나는 그를 일찍 방으로 돌려보냈다.
겨울부터도 계속 혼자 무리했던 데다, 위그드라실에서도 신경 쓸 일이 많았으니 제레미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그리체에서 이렇게 머물 수 있는 것도 며칠 뿐이었다.
각 가문의 수장들은 얼마 후 또다시 위그드라실에 모여야만 했다.
그곳에서 전에 없던 대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제레미를 보내고 나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나도 방을 빠져나왔다.
제레미의 말대로 방은 매일 청소를 한 듯이 깨끗했다.
하지만 경첩이 약간 뻑뻑해져 있었는지, 천천히 문을 열자 전에 없던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서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래도 바깥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제레미가 알게 되면 왠지 관리 소홀을 이유로 사용인들에게 경을 칠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문에 기름칠을 하도록 일러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복도로 나섰다.
이렇게 밤중에 아그리체의 내부를 혼자 걷고 있으려니 더욱이 지난겨울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아그리체를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에 머물렀던 란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제레미는 수장이 되어서도 이곳에 들어왔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집무실에 들어와 한동안 누구도 사용했던 흔적이 없는 실내의 모습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불을 켜지 않은 상태였기에 시야가 어두웠지만 이 정도는 금방 익숙해져서 곧 어려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방의 한구석에 있는 장식장에서 술병과 술잔을 꺼내 예전에 그랬듯이 책상에 가서 앉았다.
이곳 역시 평소에 청소는 꾸준히 해 두었던 건지, 잔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술병을 들어 거기에 술을 따라 부었다.
창밖의 불빛을 보며 쓴 액체를 한 모금 머금으니 정말 몇 달 전으로 시간이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걸치고 있던 카시스의 겉옷은 어디로 갔을까?
분명 어딘가에 떨어뜨린 게 확실한데 그게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이미 잃어버린 시일도 꽤 지나서, 지금 생각나 봐야 찾지도 못하겠지만.
생각보다 잔은 금방 비워졌다.
나는 또다시 그 안에 술을 따랐다.
창밖의 풍경도, 이 방의 적막함도,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도, 겨울의 기억을 저절로 떠올리게 할 정도로 그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실상 그 당시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럼 좀 더 홀가분한 기분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오래전에 얹힌 것이 아직 내려가지 않은 것처럼 속이 묘하게 답답했다.
그렇게 술병을 반 정도 비워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왔을 때, 기다렸던 손님이 찾아왔다.
“한 잔 줄까?”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막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향해 물었다.
이것 역시 지난겨울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것은 그때와 다른 사람이었다.
“……왜 혼자 마시고 있어?”
잠깐의 공백 뒤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그의 옷자락에 묻어 온 바깥의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를 이곳까지 인도한 나비가 내게 날아와 주위를 배회하다가 술잔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선 남자를 시야에 담았다.
가까이 다가온 카시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조용히 훑었다.
나는 내 속까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내 눈을 가만히 주시하는 카시스를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어디로 들어왔어?”
“그때 그 비밀 통로.”
“정말?”
“아니.”
내가 카시스를 발견한 것은 조금 전 그가 막 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아그리체 안으로 들어왔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의 비밀 통로를 이용했다는 말에 북쪽 경계의 대마물 서식지를 가로질러 왔다는 것인 줄 알고 놀랄 뻔했는데, 다행히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카시스의 이어진 말을 듣고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문 쪽 보안이 취약하던데.”
이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가? 설마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왔을 줄이야.
아무래도 저택 주변의 경비를 강화해야 할 듯했다. 물론 카시스에게는 별로 소용없을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 후 우리는 잠깐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렇게 그와 얼굴을 맞대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물론 독나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위그드라실에서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카시스가 중립 구역에서 데온과 닉스를 찾아갔던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시스도 마찬가지로 내게 그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이 방, 어디인지 알아?”
그러다 이내 나는 지나가듯이 말을 흘렸다.
카시스의 눈길이 한 차례 주변을 훑었다.
“수장의 집무실인가.”
그는 방 안의 모습을 보고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낸 듯했다.
나는 카시스를 보며 입술 끝을 살며시 끌어 올렸다.
“……우리, 여기서 재미있는 거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