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17)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17화(217/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외전 8화
바로 그 순간 고막을 뚫고 들어온 가차 없는 말에 제레미는 입을 벌린 채로 굳어졌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건, 그건 너도 마찬가지……!”
그러나 제레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시스가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레미로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카시스의 모습은 나흘 전과 마찬가지로 아주 반짝반짝하게 빛이 났다.
어둠 속에서도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는 은빛 머리칼이 달빛을 먹어 더욱 윤이 나게 반짝거렸다.
뿐만 아니라 방금 전에 막 씻은 사람처럼 깨끗하고 뽀송한 얼굴에서도 투명한 광택이 도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에게서는 조금의 땀내도 나지 않았다.
분명 며칠 내내 바깥을 쏘다닌 건 제레미와 똑같은데, 카시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결하고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건 록사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레미의 시야에 있던 록사나 역시 머리카락은 별빛을 머금은 듯이 찰랑거렸고, 백옥 같은 얼굴은 물론이요, 옷 밖으로 드러난 손끝까지 맑은 샘물에 갓 담갔다 꺼낸 것처럼 깨끗했다.
셋 중에 오직 카시스에게 관리받지 않은 제레미만이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카시스의 탓이 아니었다.
그가 일부러 치사하게 제레미만 빼놓고 정화의 기운을 사용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제라도 네가 부탁한다면 내가 말끔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카시스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제레미는 닭살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첫날에 단 한 번, 카시스에게 잔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디까지나 일의 효율을 위해서 마지못해 정화를 허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폐델리안 특유의 기운이 솜털 하나하나까지 간질이며 온몸의 내밀한 곳까지 스며들어 휩쓰는 그 느낌은 차마 인내심을 갖고 참아 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자마자 소름이 끼쳐서 저절로 몸서리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진저리 칠 정도로 싫다고 부득불 거부를 하니 나로서도 별수 없는 일이지.”
카시스가 그런 제레미를 향해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돌아가 제레미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 호수는 동쪽. 네 소중한 록사나의 후각과 시각을 마비시키지 않을 정도로 청결한 상태가 되었을 때 돌아와라.”
당연히 제레미는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몹시도 현실적인 문제였으니 별수 없었다.
잠깐 잊고 있긴 했으나, 카시스 때문에 한번 자각하고 나니 그 역시도 몸이 꿉꿉해 당장 씻고 싶어졌다.
“이 씨, 그럼 빗물로 씻게 아까 말하든가!”
제레미는 마지막까지 카시스를 욕하면서 거의 그친 비를 뚫고 동쪽으로 달려갔다.
* * *
“제레미를 너무 놀리지 마.”
카시스가 돌아왔을 때, 록사나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무릎을 모아 팔로 감싸고 그 위에 턱을 괸 록사나의 뒤로 모닥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굽이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져 부드러운 음영을 그린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스며 있는 채였다.
“그래도 아직 순진한 면이 있어서 그런 말 하면 정말 믿는단 말이야.”
카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록사나에게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포를 집어 들었다.
“무슨 소리야?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는데.”
“진짜 못 봐 줄 정도로 더럽지는 않았잖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기준이 다른가 보군.”
록사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카시스를 묘한 웃음을 띤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카시스가 바닥에서 주워 든 모포를 털어 낸 뒤 록사나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사실 지금은 초여름이라 이렇게까지 보온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인 데다 비가 온 뒤라서 확실히 공기가 쌀쌀했다.
그래도 역시 모닥불에 모포까지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더운 정도는 아니어서 록사나는 카시스의 호의를 달게 받아들였다.
“피곤하면 두 시간 정도는 더 자도 될 거야.”
“아니야, 난 잘 만큼 잤어. 당신이야말로 눈은 좀 붙였어?”
“나도 충분히 잤어.”
두 사람 다 이미 잠이 깨서 다시 자리에 누울 마음은 없었다.
다가온 카시스가 자연스럽게 록사나의 옆에 앉았다. 록사나도 몸을 움직여 옆쪽에 카시스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후 그녀가 물었다.
“내가 안 볼 때도 제레미가 많이 귀찮게 해?”
사실 지금까지 목격한 광경만으로도 상황을 알 만하긴 했다.
그래도 록사나 때문에 본격적으로 못되게 굴지는 못하고, 어린애가 심술을 부리는 수준으로 깔짝거리기만 하는 제레미의 모습이 오히려 애잔했다.
카시스의 생각도 동일했다.
“심한 정도는 아니야. 나한테 남동생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귀여우니까 이해해 줘.”
장난스럽게 덧붙인 록사나의 말에 카시스는 무심코 진심이냐고 물을 뻔했다.
제레미 아그리체가 귀엽다니. 록사나가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할 소리였다.
“그래. 나도 앞으로 그 얼굴을 20년쯤 보다 보면 언젠가는 아주 조금이나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회의적인 전망이었다.
카시스는 한숨을 닮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록사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간지러운 온기가 파고들어 깊게 얽혔다.
맞닿은 살갗을 타고 따스한 체온과 함께 정결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록사나는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피로가 가시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타닥타닥, 모닥불 위로 작은 불씨가 튀었다.
문득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왠지 상황이 좀 익숙하네. 전에 당신하고 이렇게 둘이 밖에 있었을 때 생각난다.”
문득 예전 기억이 나서 말하자 카시스도 여트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 그때는 옆에 이런 방해꾼이 없었지만.”
록사나의 고개가 카시스가 있는 방향으로 슬며시 기울어졌다.
“그런데 당신, 나랑 손만 잡고 있으려고 제레미를 그렇게 보냈어?”
카시스의 손등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은밀해졌다.
카시스의 손에도 지그시 힘이 들어가 얽힌 손가락 마디가 더욱 꽉 조여졌다.
모닥불의 따스한 빛이 섬세하게 짜인 두 사람의 얼굴을 짙게 물들였다.
“돌아왔을 때 네가 여전히 자고 있으면 그러려고 했는데.”
“그럼 지금은?”
비슷한 체온을 가진 이마와 콧대가 먼저 가볍게 닿았다.
“글쎄. 일단 제레미 아그리체가 돌아올 때까지는 다시 재우지 말까 하고.”
작게 벌어진 록사나의 입술에서 부스러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시스도 웃으며 기꺼이 그것을 달게 집어삼켰다.
벽까지 이어진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그동안 제레미가 눈에 불을 켜고 록사나의 옆에 붙어 있었던 탓에 이렇게 카시스와 단둘이 있게 된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입술을 맞댄 순간, 속에 쌓인 갈증이 더 불어났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갈급하게 서로의 숨을 갈취했다.
젖은 입술이 더 바짝 맞붙고 혀가 깊게 뒤엉켰다. 그러면서 울린 야릇한 소리가 모닥불 타는 소리 사이로 스몄다.
몸이 기울면서 록사나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모포가 떨어졌다.
원래 카시스가 제레미를 밖으로 내보낸 이유는 록사나가 잠들어 있는 동안 더 많은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였지만 그런 목적은 잠시 잊었다.
록사나와 카시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지금보다 틈 없이 가깝게 몸을 맞대고 좀 더 깊이 체온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욕심을 억눌러 참아 냈다.
미련을 담은 입술이 몇 번 더 부딪쳤다.
그런 뒤 카시스가 록사나를 끌어안고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닉스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응.”
“그래도 처음 예상보다 이렇게 멀리까지 이동한 걸 보면, 상태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모양이지.”
위로하듯이 읊조려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물살 위에 뜬 나뭇잎 같던 록사나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러게…….”
그녀는 어렴풋이 웃으며 카시스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제레미는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흡사 악령이 되어 돌아온 물귀신 같은 모습을 한 채로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그때 이미 록사나는 카시스와 아까처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야, 이제 됐냐? 구석구석 박박 씻고 왔다. 이제 속이 시원해? 어?”
보란 듯이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와 천 년 묵은 원한을 쏟아붓듯이 카시스를 노려보는 제레미의 얼굴이 말도 못하게 살벌했다.
하지만 당연히 카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벽에 기대 앉아 제레미를 그저 한 번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그 너저분한 옷은 지금 당장 갈아입을 필요가 있겠군. 몸에 묻은 물기도 전부 닦아 내고 앉아라. 록사나까지 젖게 하지 말고.”
“시발,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수건 내놔!”
소리 죽여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록사나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 한 웃음을 헛기침으로 막아 냈다.
“엇, 누나! 나 때문에 깼어?”
“제레미, 여기 이걸로 닦아. 이리 와서 불도 좀 쬐고.”
세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길을 떠난 것은 제레미의 몸을 다 말린 뒤였다.
제레미는 여전히 카시스를 죽일 것처럼 노려봤지만 그저 뒤에서 이를 갈기만 할 뿐, 그에게 시비를 더 걸지는 않았다.
어느새 비가 완전히 그쳐 먹구름까지 달아난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닉스의 흔적을 더듬어 이동했다.
하여 새벽빛이 세상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을 무렵, 마침내 그들이 밟게 된 곳은 다름 아닌 가스토르의 영역이었다.
* * *
“아니, 그 인형 자식 몸 안 좋은 거 맞아? 뭐 이렇게 멀리까지 기어 왔어?”
제레미는 가스토르의 땅을 밟자마자 떨떠름하게 얼굴을 구겼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가스토르래? 나 아직 그 빨강이 놈은 좀 별론데.”
그가 불만스럽게 툭 걷어찬 돌멩이가 앞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비 내린 대지에 희미하게 남겨진 닉스의 흔적은 가스토르의 영역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레미는 얼마 전 위그드라실에서 봤던 류자크 가스토르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쩌다 보니 가스토르와는 동맹을 맺기도 했고, 이번 친목회 때 후계자인 류자크와 이렇다 할 마찰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적의 가스토르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지난 겨울의 화합회 자리에서 류자크와 처음 만났을 때 시비가 걸려 첫인상이 영 별로였던 탓인지도 몰랐다.
물론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제레미였지만, 그는 그런 과거 따위는 진작 다 잊어버린 것처럼 투덜거렸다.
하기야, 그렇게 따지고 보면 청, 백, 적, 황, 흑 어디에도 닉스가 갈 만한 곳이 없긴 했다.
게다가 흑의 아그리체를 제외하고 그중 어디라도 제레미가 기분 좋게 갈 수 있는 곳 또한 없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닉스가 아그리체의 영역에 제 발로 먼저 찾아올 리는 절대로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