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26)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26화(226/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외전 17화
* * *
사악, 사악.
그날 늦은 저녁, 방으로 돌아온 에밀리는 하루 동안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 정리했다.
녹슨 곳 하나 없이 반짝이는 날붙이가 일렁이는 불길에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은 평온한 아그리체였지만 에밀리는 소지하고 있는 무기 관리를 단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것을 다시 정리해 품 속에 갈무리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에밀리!”
에밀리가 문을 열자 그 앞에 서 있던 길레타가 활짝 웃었다.
“저녁 시간이라 있을 줄 알았어. 마침 내일 오전에 쉬는 사람들끼리 가볍게 한잔 마시려고 하는데, 에밀리도 같이 놀자!”
“나는…….”
“알아, 이따 록사나 님한테 다시 가 봐야 하는 거. 에밀리는 술 안 마셔도 돼. 식당에서 가져온 음식도 있으니까 그거나 같이 먹자. 지금 식당에 사람 엄청 많아. 에밀리, 저녁 아직이지?”
에밀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길레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길레타의 방은 가까워서 금방 열린 문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에밀리를 본 사용인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 자리에는 아까 일부 동료들이 흉봤던 리마도 있었다.
“뭐야, 에밀리도 왔네?”
그녀는 하도 조르니 마지못해 어울려 준다는 듯이 고자세를 유지한 채 앉아 있다가, 묘하게 에밀리를 반겼다.
“자 자, 문가에 서 있지 말고 에밀리도 어서 들어와!”
에밀리는 길레타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푸하! 일하고 난 뒤에 마시는 술 최고야!”
잠시 후, 누군가 공수해 온 술을 한잔 걸친 길레타가 빨개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난 진짜 죽을 만큼 돈이 궁하지 않으면 아그리체에서 일하지 말라는 소리를 전에 들어서 걱정했는데, 이번에 큰마음 먹고 면접 보러 오길 잘한 것 같아. 사람들도 다 좋고, 몇 가지 규칙만 지키면 일하기도 편하고. 혹시 여기서 먼저 일했던 사람이 밥그릇 뺏기기 싫어서 헛소문을 퍼트린 건가?”
“그건 아닐걸. 전 주인님이 계실 때는 진짜 장난 아니었대.”
“내가 옆 구역 숙소에 있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에밀리는 아침 식사 시간에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 사람들 속에서 또 묵묵히 앞에 놓인 음식을 입에 넣었다.
예전의 아그리체에서 있었던 일부 사건들이 술안줏거리가 되어 방 안에 괴담처럼 퍼져 나갔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란트가 죽은 뒤에 아그리체에 들어온 사용인들이었다.
이전부터 일해 온 사람들은 대부분 옆 구역 숙소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헉, 진짜 무섭다! 그 마님은 정말 장난 아니네. 지금은 여기 없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지금은 폐쇄된 건물들 있잖아. 정원에서 일하는 조쉬가 몰래 가 봤다가 위험한 장치가 있어서 죽을 뻔했다니까 너희도 조심해.”
“나도 들었어. 가끔 그 안에서 실종되는 사람도 있대. 귀신도 나온다던데?”
“에이, 그런 걸 믿어?”
“그런 말 하면 꼭 일부러 가 보는 애들도 있더라.”
지금은 폐쇄된 아그리체의 여러 교육 시설을 비롯해 독초를 키우는 온실과 화원, 수리가 덜 끝난 마물 사육장, 그리고 위험한 함정이 설치된 미로 정원을 포함한 일부 구역은 신입 사용인들의 출입이 엄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공포심을 부풀린 소문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수장님들은 두 분 다 좋은 분들이라 다행이지.”
“제레미 수장님도 봄까지는 다들 시선만 스쳐도 벌벌 떨었잖아.”
“맞네. 록사나 님이 들어오시면서 분위기가 좀 달라졌지. 다른 도련님, 아가씨들도 전보다 덜 무서워졌고 말이야.”
“난 사실 제레미 수장님은 지금도 무서워.”
“공동 수장이긴 하지만 역시 아그리체 최고 실세는 록사나 수장님이지?”
사용인들은 대개 제레미를 무서운 주인, 록사나를 다정한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미를 온순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록사나라는 사실도 지금은 모두 알아차린 뒤였다.
“흥, 쟤들은 뭐 저런 당연한 소리를 이제 안 것처럼 떠들고 있어? 그러니까 쟤들이 아직도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지. 하여간 수준 떨어진다니까.”
그때 리마가 작게 콧바람을 흘렸다. 모두들 끼리끼리 수다를 떨고 있어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에밀리가 유일했다.
리마는 꼭 일부러 에밀리에게 들으라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다음 순간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에밀리, 넌 왜 기성 사용인들이 쓰는 옆 숙소로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거야? 넌 조건이 되잖아. 나라면 바로 옆 구역으로 옮겨 갔을 텐데.”
리마의 말에 에밀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사람들을 보자, 중간 구역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냈던 시에라와 다른 두 사람이 떠올랐다.
에밀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짤막하게 답했다.
“별로 싫어하지 않아. 이런 분위기.”
“취향도 특이하다.”
하지만 리마는 곧 선심 쓴다는 듯이 에밀리에게 웃어 보였다.
“난 여기서 친구를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에밀리 너라면 친하게 지내도 좋아. 우린 같은 주인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에밀리는 대답 없이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런데 에밀리, 넌 록사나 님을 모시게 된 계기가 따로 있는 거야? 단순히 고용돼서 따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 너한테 딱히 야망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그리고 이어진 리마의 물음에 에밀리는 물컵을 내려놓던 손을 멈칫했다.
오래된 과거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문득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른 풀잎의 향이 섞인 가을 특유의 습윤한 공기.
바닥에 융단처럼 깔려 있던 붉게 물든 낙엽.
두꺼운 쇳덩이에 짓이겨진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던 기억.
그리고…….
“없어.”
하지만 이윽고 에밀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딱 자른 부정의 말이었다.
록사나와 처음 만났던 그날의 기억은 다른 사람과 티끌 하나만큼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오직 에밀리만의 것이었으니까.
비록 록사나는 그 오래전의 일을 벌써 잊었더라도, 에밀리의 안에서 그날의 기억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고이 간직돼 있었다.
“그래……?”
기대했던 것과 다른 에밀리의 대답에 리마가 시시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이후 그녀는 에밀리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사용인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 리마,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술 한 잔만 마신 거 아니야?”
“어어, 맞아. 그런데 이상하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쿵!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빨개진 얼굴을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리마가 가장 먼저 쓰러졌다.
“리마, 생각보다 술이 약하구나.”
“어우, 나도 뻗기 전에 그만 마셔야겠어.”
하지만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모두 리마와 같은 꼴이 되었다.
오직 에밀리만이 처음처럼 곧은 자세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달그락.
이내 찻잔을 내려놓은 에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리마를 들쳐 업었다.
그러고 나서 혹시 모를 목격자를 피해 창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에밀리가 리마를 업고 창밖으로 뛰어내려 이동하는 동안 작은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리마를 목적지에 내려 놓은 뒤, 또 다른 목표물을 데리러 이번에는 남자 숙소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에밀리가 찾는 사람은 방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렸을 때, 목표물이 현재 어디에 있을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밀리는 다시 그림자처럼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갔다.
* * *
밤의 아그리체는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으슥한 어둠이 똬리를 틀고 곳곳에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진작 하루를 마감했을 시간이라, 바깥에는 야행성 동물이 우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에밀리가 향한 곳은 출입이 엄금된 구역이었다.
철책 대신 임시로 묶어 놓은 끈을 넘어 그 안에 발을 들이자, 한결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그 후로 얼마나 걸었을까.
휘익!
어느 순간, 갑자기 두 개의 인기척이 에밀리에게 달려들었다.
챙강!
에밀리는 빠르게 단도를 뽑아 날아드는 채찍을 쳐 냈다.
유리가 박혀 특수 가공된 채찍은 칼날에도 잘리지 않고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어? 뭐야? 에밀리잖아.”
바로 코앞까지 접근했던 사람이 에밀리의 급소를 노리던 손을 내렸다.
“여긴 웬일이야?”
“우리랑 같이 놀려고 왔어?”
에밀리는 눈앞에 나타난 록사나의 이복동생들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은 샬럿이었다. 그녀는 록사나의 권속인 에밀리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록사나 수장님의 명으로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어 왔습니다.”
“아, 길 잃고 잘못 들어온 척 하던 아까 걔 말이구나.”
“한 달간 벌써 두 번이나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걸 봐줬는데 웃기지도 않지.”
그들은 알 만하다는 듯이 에밀리를 안내해 주었다.
폐쇄된 장소들 중 어떤 곳은 아그리체 이복 남매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불온한 목적을 가지고 출입 금지 구역에 발을 들이는 쥐새끼의 처리도 도맡고 있었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과 시선들이 느껴졌다.
마침내 에밀리가 도착한 곳에는 아그리체의 이복 남매들과 그녀가 찾던 사람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하여간에 꼭 이런 애들이 있다니까. 뭐 볼 게 있다고 자꾸만 여기 하나씩 기어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보물이라도 숨겨놓고 있을 것 같나?”
“심심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요즘은 근성 있는 애들이 없어서 아쉽단 말이지. 지난달에 같이 놀았던 애는 좀 재미있었는데.”
“난 그냥 다음 달에 밖으로 빼 달라고 그럴까 봐.”
“그보다 이번엔 장난감 판정 받으러 누가 다녀올 거야?”
그렇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다음 순간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뜩한 안광을 내는 눈동자들이 동시에 에밀리 쪽으로 휙 돌려졌다.
“아, 쥐가 한 마리 더 잡혀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쟤 에밀리 아니야?”
“야, 그거 우리가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 아니래.”
에밀리와 함께 온 이복형제가 꺼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실망을 표출했다.
에밀리는 그들을 뒤로한 채 바닥에 기절해 있는 사람을 어깨에 들쳐 메고 장소를 옮겼다.
* * *
에밀리가 향한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잠시 후에는 하루 일정을 마친 록사나도 그곳에 도착했다.
그녀는 결박된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직 의식이 없나 보네.”
“지금 깨우겠습니다.”
철썩!
에밀리가 두 사람을 깨우는 동안 록사나는 미리 준비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으, 뭐야…….”
잠시 후, 리마가 먼저 눈을 떴다.
“안녕. 좋은 밤이구나.”
그녀는 귓가에 흘러드는 나긋한 목소리에 한순간 현실을 혼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 록사나 수장님?”
하지만 록사나는 그런 리마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밤도 늦었으니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말도록 할까?”
이어서 울린 나지막한 음성에, 록사나를 보던 멍한 얼굴에서 단번에 술기운이 걷혔다.
“네가 휘페리온에서 온 끄나풀인 건 이미 알고 있어.”
그 순간 리마가 헉 숨을 들이켜면서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녀는 몸이 묶인 것도 이제 깨달은 것 같았다.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눈이 앞에 있는 록사나와 벽에 붙어 선 에밀리, 그리고 그녀의 옆쪽에 널브러진 남자에게 차례로 닿았다.
다시금 록사나에게 시선을 되돌린 리마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에밀리의 시야에 비쳤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제가 끄나풀이라니……? 누가, 누가 록사나 수장님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나요? 전 억울해요……!”
그녀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외쳤다.
록사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마는 더 적극적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부, 분명히 누명이에요. 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결코 아그리체를 배신한 일이……!”
하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앞으로 뻗어진 록사나의 손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분명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말했는데.”
록사나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며 탐스러운 머리칼이 물결치듯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벽에 걸린 촛대의 불꽃에 꼭 녹아 흐를 것처럼 빛났다.
“애초에 내가 왜 아그리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널 옆에 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그보다 더 선명한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겁 없이 떠들던 여자의 입이 돌처럼 굳어졌다.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노력이 가상해서 처음에는 네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줄 마음도 있었어. 하지만 슬슬 지루해서 말이야.”
록사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는 듯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궁금한 건 딱 두 가지야. 너를 보낸 게 히아킨인지, 오르카인지. 그리고 네 용도가 단순 세작인지, 아닌지. 거기에 따라 네 처우도 결정 지어지겠지.”
리마는 그제야 그녀가 아그리체에 들어와 단 한 순간도 록사나를 속이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록사나가 겉보기만큼 무른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부터 그걸 내가 직접 알아내려고 널 여기 데려온 거고.”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혼란을 에밀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리마는 아그리체에 들어와 꼬리를 밟힐 만한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비인간적일 정도로 육감이 발달한 록사나와 다른 아그리체 사람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읽은 록사나가 한결 부드럽게 눈앞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진 말렴. 난 불필요한 피를 보는 건 싫어하거든.”
팔랑.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나비가 하나둘씩 나타나 날개를 팔랑였다.
“그러니 저기 있는 고문 도구들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야. 대신 다른 쪽으로 널 조금 고통스럽게 만들긴 하겠지만…….”
바스락바스락,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밀폐된 지하 감옥 안에 어지럽게 퍼졌다.
그 사이로 나긋하게 녹아드는 목소리가 꼭 농도 짙게 고여 흘러내리는 달콤한 꽃의 진액 같았다.
“넌 내 사람이 아니니 네가 괴롭든 말든 별로 상관없어.”
얼음 결정처럼 싸늘한 붉은 눈이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사람을 자비심 없이 꿰뚫었다.
“그래도 내 친애하는 형제자매들이 아니라 지금 내가 네 앞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도록 해.”
이내 환각에 빠져 몸을 뒤틀기 시작한 여인의 그림자가 에밀리가 서 있는 벽면을 검게 물들였다.
그러나 록사나가 약속했듯이, 아그리체 사람이라면 응당 익숙하기 마련인 피비린내는 그녀가 지하 감옥에 있는 동안 조금도 풍겨 나오지 않았다.
에밀리의 아름다운 주인님은 오늘도 이처럼 상냥하고 다정했다.
록사나의 가장 충실한 종인 에밀리의 하루가 오늘도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