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27)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27화(227/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외전 18화
외전 4. 다소 불건전한 망각 :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들이 흔히 걸리는 그 병
어느 날 눈을 뜨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가물거리는 시야에 비치는 방 안의 구조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여기가 란트의 집무실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나 왜 책상에 누워 있어?’
심지어 내가 잠들어 있던 곳은 란트의 집무실 책상 위였다.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지금 이 안에 있는 게 나 혼자뿐이라 아무도 내 방종함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내가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눈을 뜨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은 서둘러 책상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무언가가 발에 채어서 보니, 웬 장부 같은 것이 몇 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뭐야, 기억은 안 나지만 혹시 내가 어질러 놓은 건가?
시간이 없어 짧게 고민하다가, 급한 대로 떨어진 것을 주워 가까운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것 말고 내가 남긴 듯한 다른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물건은 더 건드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란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다행히 집무실 밖에서 마주친 사용인은 없었다.
방 안에서 긴장했던 탓인지,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난 것이 느껴졌다.
언제 다른 사람을 만날지 몰라 평소처럼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혼란했다.
내가 어쩌다 란트의 집무실에 가게 됐는지, 또 그 안에서 잠들기 전까지 뭘 하던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걷지 않아 반가운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밀리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에밀리도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시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록사나 수…….”
“에밀리,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지?”
일단은 란트의 행적을 파악하려고 물었다.
그러면서 에밀리를 지나쳐 걷자, 그녀가 여느 때처럼 내 뒤를 따라왔다.
혹시 모를 추궁을 피하려면 내가 왜 그의 방에 갔었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내야 했다.
란트가 불러서 집무실에 들른 거라면 그나마 들켰을 때 변명할 구실이 있었지만, 만약 아니라면 내가 몰래 그 안에 들어갔던 사실 자체를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런데 매우 드물게도, 에밀리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말에 반문했다.
“아버지 말이야.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느냐고 물었어.”
그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꾸중하는 대신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에밀리가 내놓은 답변은 여전히 내 성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미욱하여 질문하신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데 에밀리까지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눈매를 찌푸리며 뒤에 있는 에밀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어서 그녀가 덧붙인 말을 듣고 아연함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제가 알기로 란트 전 수장님의 시신과 위패는 따로 안치하지 않아 아그리체 어디에도…….”
“뭐?”
란트 전 수장?
시신과 위패?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에밀리가 지금 나를 놀리나? 아니면 혹시 란트나 다른 사람의 명으로 날 시험하려고 반응을 떠보기라도 하는 건가?
그러나 에밀리의 얼굴 어디에서도 그런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 온 에밀리라면, 이런 방식으로 날 기만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에밀리는 지금 나만큼이나 당혹감 어린 눈을 한 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내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을 정면에서 제대로 마주한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익숙한 에밀리의 얼굴에서 미묘하게 낯선 느낌이 풍겼다.
잠시 후 나는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물었다.
“에밀리. 네가 올해로 몇 살이지?”
“스물여섯 살입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밀리가 지금 스물여섯 살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지금 열여섯 살이니, 에밀리는 스물두 살이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하지만 뒤이어 에밀리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꺼낸 말을 들었을 때, 또 한 번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록사나 수장님.”
이번에는 전율을 닮은 날카로운 감각이 등줄기를 긁고 지나갔다.
“제가 알아야 할 문제가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잇따른 에밀리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동요가 묻어 있었다.
“혹시 기억에…… 혼란이 있으신 겁니까?”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에밀리를 향해 명령했다.
“에밀리, 네가 지금의 나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봐.”
* * *
에밀리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지금 내 나이는 스무 살.
제레미와 함께 아그리체의 수장직에 올라 있으며, 전대 수장이었던 내 아버지 란트는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그리체를 떠나 중간 구역에서 마리아와 함께 지내고 있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 기억에는 거의 4년의 공백이 있었다.
에밀리는 내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의원을 부르러 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도 소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먼저 내 방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용인들이 고개 숙여 내게 인사했다. 나는 태연한 낯을 하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사용인들의 얼굴은 기묘하게도 모두 밝았다.
그것 또한 괴리감이 들어서, 정말 이곳이 내가 알고 있는 아그리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에밀리의 설명을 듣고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혼란한 기분이 드는 건 여전했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생일을 두 달 앞둔 열여섯 살이었으니까.
그리고 란트의 집무실에서 눈을 뜨기 전에, 분명 나는 오늘 일정대로 교육을 받으러 가고 있었다.
“…….”
그렇게 생각을 곱씹던 어느 순간 문득 걸음이 멈추어졌다.
……정말 내가 기억을 잃은 게 맞는 걸까?
아니면…….
혹시 지금 이것이 실제처럼 잘 만들어진 환상인 건 아닐까?
막 돋아난 의심에 아까부터 약간 빠르게 뛰던 가슴이 서서히 고요해지다가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처음에 란트의 집무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매일 섭취하는 독의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기억 소실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에밀리의 말을 듣고 나서는, 정말 4년의 기억이 증발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고.
하지만 지금 막 또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환각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가능성은 적지 않은 듯했다.
아실을 보았던 작년 월례 평가 때처럼 오늘 교육 시간에도 환각의 방 같은 곳에 들어가는 수업 내용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어쩐지 너무 현실감이 안 들더라.”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도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의 색채로 물든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시야에 비쳤다.
그럼 혹시 이건 내 소망이 반영된 환상인가.
란트가 죽고, 더는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미래라니.
순간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렀다.
동요하던 마음이 평정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아까부터 복도의 공기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고 있던 희미한 소음이 그제야 귀에 또렷이 인식되었다.
창밖에 두던 시선을 무심코 내린 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놀라 흠칫했다.
바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시선이 박혔다.
“제레미?”
내가 알던 소년보다 나이가 든 성인의 외양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제레미였다.
와, 생각보다 잘 자랐네.
아까부터 은근히 소란스럽더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리 지어 외출했던 사람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가만,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스무 살이면 제레미는 열아홉 살일 텐데…….
원래 소설대로라면 란트도 죽고 나도 죽고 제레미도 죽고, 다 망했어야 하는 미래지만 여기서는 전개가 달라졌나 보다.
그리고 더 이어지려던 상념은, 제레미에게 비스듬히 가려져 있던 사람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끊어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예뻤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묘한 색깔이었는데, 그게 참 특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키가 큰 남자였다.
제레미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가끔 폰타인이나 데온이 밖에 나갈 때 입는 것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빛깔의 활동성 있는 옷과 종아리까지 올라붙은 가죽 부츠가 탄력 있는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멀리서 보기에도 한눈에 띌 정도로 균형 있게 잘 단련된 몸이었다.
‘누구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의문이 들었다.
원래 아그리체에서는 란트가 따로 공무를 내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아그리체 외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아그리체는 지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손님이 방문하는 일도 없었다.
‘제레미와 같이 있는 걸 보면 저 남자도 아그리체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금방 실례되는 생각임을 인정했다.
그러기에 저 남자는 너무 귀티 나게 생겼다.
게다가 지금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모습을 보면, 제레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될 법했다.
실제로 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두 무리로 나누어진 느낌이었고.
아, 하지만 어쩌면 전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지금 이곳은 란트가 없는 미래의 아그리체였으니, 제레미나 다른 사람의 손님일지도…….
거기까지 막 생각이 닿았을 때, 창밖의 남자와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나를 발견했는지 몰라도 그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이 이번에는 완전히 정면에서 눈에 들어왔다.
좀 놀라울 정도로 내 취향에 굉장히 잘 들어맞는 잘생긴 얼굴이라 잠시나마 지금 내 상황을 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해 버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남자가 나를 보고 웃었다.
지금까지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차가운 성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어서 조금 놀랐다.
어? 그런데 잠깐.
은발하고 금안?
그건 페델리안 특징인데…….
아니야, 하지만 페델리안이 왜 지금 여기에 있겠어?
다시 한 번 제대로 보려고 했을 때, 남자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도 잡생각을 떨치고 창가에서 떨어져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환각이 맞다면, 이제 그만 깨어나게 뺨이라도 세게 쳐 볼까 싶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중, 누군가 밑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까 창밖으로 보았던 그 남자였다.
“록사나.”
가만히 서 있어도 빛이 나는 것 같은 수려한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보였다.
“오늘은 바빠서 마중 나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귀에 흘러든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순간 심장을 덜컹 떨어뜨릴 정도로 다정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발을 멈추었다.
그동안 긴 다리를 이용해 몇 걸음 만에 여유롭게 내가 있는 계단까지 올라온 남자가 바로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여트막한 미소를 지었다.
“예정보다 좀 늦어서 미안해.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