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31)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31화(231/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외전 22화
* * *
나는 막 방 안으로 들어온 데온 아그리체를 보고 침묵했다.
늘 보아 온 서늘한 붉은 눈이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똑바로 직시해 왔다.
“……뭐지?”
데온이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됐다.
“밖에 서 있는 네 권속도 그렇고, 너도 오늘따라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군.”
남다른 무게감을 가진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페델리안이 왔는데도 저택 안이 묘하게 조용하던데, 관련이 있나?”
나는 서늘한 기분을 안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남자를 응시했다.
에밀리와 제레미에게 진작 이야기를 들었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데온 아그리체도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좀 더 나이 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내 기억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가 내 명으로 휘페리온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이미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다.
나는 데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매 밑으로 드러난 그의 한쪽 손은 정말 의수였다.
당시의 사건은 당연히 생각나지 않았고, 남의 입으로 설명을 들어 그때의 일을 상상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미 여러 번 의심했던 것처럼, 이것 역시 다른 사람들의 사견이 들어가 실제와는 약간 다른 형태로 내게 전달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저 손이 나 때문에 잘렸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한 듯했다.
한순간, 고요하던 마음속에 보글거리는 거품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스무 살의 시간을 살고 있던 나는 데온 아그리체를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지금 이 남자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증오와 미움뿐인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데온의 얼굴을 보니 사는 동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또 속이 끊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잔뜩 독이 오른 날 선 말들을 내뱉어 그를 흠집 내고 상처 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앞에 선 데온을 설핏 찡그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심기가 몹시 불편한데, 그걸 어디로 표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묘하게 답답한 기분이었다.
“데온 아그리체.”
괜히 애꿎은 의자의 팔걸이만 손톱 끝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다소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꿇어.”
그 순간 곧게 뻗은 데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처럼 온도 낮은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주시했다.
내가 아는 데온이라면 나를 비웃으며 정신이 이상해졌냐고 묻거나, 싸늘히 무시한 채 돌아서서 방을 나갈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눈앞에 우뚝 솟아 있던 몸이 내 말대로 순순히 낮추어졌다.
데온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데온이 나보다 낮은 곳에 꿇어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런 그를 한동안 미동 없이 주시했다.
“일어나.”
그러다 다시 명령하자 데온의 눈높이가 또 나보다 높아졌다.
“다시 꿇어.”
나를 향한 눈빛이 한결 차가워졌다.
몇 초간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데온이 묵직하게 닫혀 있던 입술을 벌렸다.
“새로운 놀이에 재미라도 들인 건가?”
하지만 그렇게 서늘히 뇌까리면서도 그는 한번 더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그제야 데온이 여기까지 온 목적을 이루도록 허락해 주었다.
“보고해.”
심연 같은 눈동자가 나를 그 안에 깊숙이 담아냈다.
데온 아그리체답다고 할 만했지만, 이렇게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느낌이 났다.
나한테 닿은 눈빛도 왠지 내 속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자세히, 아니면 요점만?”
낮게 읊조려진 음성이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손을 들어 턱을 괴며 데온을 싸늘하게 힐끗 쳐다봤다.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
짧은 침묵 끝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지.”
잇따라 백의 휘페리온에서 있었던 일의 골자가 데온에게서 정리되어 내 귀로 흘러들었다.
“네 말대로 휘페리온에서 직접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히아킨뿐이더군. 예상대로 첫 번째 거래는 성사됐으니, 관련 내용은 서면으로 정리한 걸 직접 확인해.”
데온은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보고를 이어 갔다.
“두 번째 거래는 불발. 그러나 지난번과 달리 태도가 확실하진 않았어. 오르카 휘페리온 쪽에서 한동안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걸 보면 네가 추측했듯이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덧붙여지는 데온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히아킨 휘페리온은 별다른 내색이 없었지만 판도라 휘페리온 쪽은 따로 교섭하기를 원하는 것 같더군. 사람을 보내 전달한 서찰에 너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 그러니 두 번째 거래는 당초의 예정대로 판도라 휘페리온과 진행하는 게 낫겠지.”
“받아 온 서찰은?”
“그것도 관련 내용을 정리한 문서와 함께 올리라고 밑에 말해 뒀으니 나중에 봐.”
한두 군데 추가적으로 알아봐야 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얼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휘페리온과의 첫 번째 거래는 마물 관련일 테고, 두 번째는 오르카 휘페리온이 독에 당해 가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 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레미에게 좀 더 물어봐야 할 듯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사안은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아니었고, 어차피 길어도 열흘 후에는 내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데온에게 굳이 상황을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보고 내용은 그게 다야?”
“더 듣고 싶은 게 있나?”
“끝났으면 그만 나가 봐.”
그런데 내 명령에도 데온은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나는 여전히 내 앞에 몸을 낮춘 채로 기민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데온을 쳐다보았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다른 지시 사항은 없는 건가?”
“일단 지금은 없으니까 그만 나가.”
한순간 데온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데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제레미 아그리체는 어디에 있지?”
문이 닫히기 전, 데온이 밖에 있는 에밀리에게 서늘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약간 짜증스럽게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눈치들이 빠르지?
아아, 됐어. 어차피 길어 봤자 열흘짜리 증상인데.
게다가 현재의 상황을 보니 지금까지 내 상태를 눈치챈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뢰해도 좋을 만한 내 사람들이라 크게 문제가 생길 요소는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해 놓고, 다음 순간 멈칫했다.
‘내 사람들…….’
무의식중에 떠올린 말이 낯설어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어두운 창밖을 보았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시간이 비었다.
수장인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부 제레미가 도맡겠다고 했고, 어른이 된 지금은 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몇 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으니 좀 더 불안하고 두려워야 정상일 텐데……. 기묘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아, 그런데 오르카를 그렇게 만든 게 독이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카시스 페델리안은 어떻게 나하고 키스를 하고도 그렇게 멀쩡한 걸까?
독나비를 각인시키기로 결정해 몸에 독을 퍼붓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그리체에서 받는 내 교육 내용도 좀 변했다.
란트 아그리체는 처음에 내가 성공률이 3할밖에 안 되는 독나비 각인을 위해 독의 섭취를 대폭 늘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나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 했는지를 떠올려 보면, 내 몸이 독에 절여지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독나비 부화에 실패하면 그때부터 다시 독 섭취를 멈추겠다고, 그렇게 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독 기운도 옅어져 다시 내 몸이 원래 상태로 돌아올 거라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란트가 그 말을 정말 믿고 독나비 사육을 허락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독에 잠식된 내 몸은 또 그 나름대로 다른 쓸모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한 번도 남한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란트의 명으로 따로 받는 개별 교육 내용은 대개 구역질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입맞춤을 비롯해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내가 진심으로 달게 느낄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달랐어.’
나는 창밖을 보던 눈을 감았다.
낮에 보았던 카시스 페델리안의 웃음 번진 얼굴과 만찬 시간 전에 목격한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번갈아 눈앞에 어른거렸다.
왠지 마음 한구석을 손톱으로 사각사각 긁어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지 않은 초조함과 두근거림이 뒤엉켜 지면을 딛고 있는 발을 움찔거리게 했다.
하여 결국 그날 밤, 나는 카시스 페델리안을 찾아갔다.
* * *
그의 방은 동관 건물 안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페델리안의 다른 사람들이 쓰는 방과 층수도 다르고 거리도 꽤 멀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카시스 페델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그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록사나?”
카시스 페델리안은 설마 내가 이렇게 금방 그를 찾아올 줄 몰랐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종이와 페이퍼 나이프에 찢긴 봉투 등을 보았을 때, 이 사람도 아그리체까지 와서 그냥 쉬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카시스 페델리안, 아까 나랑 했던 거 다시 해.”
나는 위에 걸치고 온 망토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걸어가 그런 그를 다시 자리에 눌러 앉혔다.
“만찬 전에 밖에서 했던 이상한 짓 말고.”
혹시 카시스 페델리안이 착각할까 봐 확실히 의사를 전달했다.
“그건 절대 하지 마. 아직 당신을 믿어서 여기 온 건 아니니까. 대신에…….”
그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이고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나랑 다시 한번 키스해.”
그 순간, 나를 비추고 있던 남자의 눈동자에 강렬한 감정의 파도가 범람했다.
침묵한 채 얼마간 내게 곧은 시선을 보내던 카시스 페델리안이 잠시 후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좋아. 얼마든지.”
가라앉은 탁한 음성이 고막을 긁었다. 그 안에 은은하게 번져 있는 열기가 손에 잡힐 듯해 입 안이 말랐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카시스 페델리안을 두 눈에 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목 안쪽에서 극심한 갈증이 났다.
“움직이지 마.”
나는 그에게 말한 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이 카시스 페델리안의 너른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내쉰 숨결이 지척에서 섞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내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