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50)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50화 (특별외전)(250/253)
특별외전 1. 페델리안의 아이들
카시스는 눈앞에 있는 새끼 짐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크르릉!
지저분한 회색 털을 가진 작은 동물이 짐마차의 바퀴 앞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것은 카시스에게 이를 드러내며 제법 사납게 하악질했다.
“응? 못 보던 고양이인데, 저희가 경계에 다녀온 동안 도련님과 아가씨가 키우시기로 한 겁니까?”
“아니, 나도 오늘 처음 봤어.”
가까이에 있던 페델리안의 심복 중 하나가 카시스와 고양이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늘은 월초에 경계 순찰을 나갔던 리셸과 그의 심복들이 페델리안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성채가 시끌벅적했다.
이제 여덟 살인 카시스는 아직 어려 외곽 경비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에 남아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온 참이었다.
“이런, 그럼 어디로 들어온 거지? 성벽에 개구멍이라도 뚫려 있나?”
“뭘 그렇게 봐?”
“어? 고양이네.”
근처에 있던 심복들도 고양이를 발견하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자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가 위협을 담아 또 한 번 그르렁거렸다.
“저거 진흙이 아니라 피인가? 아무래도 다친 것 같은데?”
“어라. 털에 묻은 저 주황색 풀, 우리가 마지막에 지나온 고원에 있던 거랑 비슷해 보이지 않아?”
“아, 그럼 혹시 그때 쉬는 동안 우리 짐마차에 몰래 타고 들어온 거 아냐?”
옹기종기 모인 심복들이 고양이의 정체를 추측하며 떠들었다.
카시스는 그 소리를 듣다가 앞에 있는 고양이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카시스를 피해 옆으로 폴짝 몸을 날렸다.
“어이쿠.”
마침 그쪽에 있던 심복 중 하나가 얼른 고양이를 붙들었다.
“이 피 좀 봐. 고양이가 생각보다 크게 다친 모양인데, 제가 데려가서 의사에게 보이겠습니다.”
카시스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리셸을 힐끗 돌아보았다.
카시스와 함께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온 실비아가 조금 전부터 보이지 않더니, 어느새 아버지에게 매달려 장난을 치고 있었다.
리셸은 쟌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별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런 실비아를 안아 들었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고민했다.
그사이 평소 카시스와 잘 놀아 주곤 하던 심복 하나가 그를 훌쩍 들어 올렸다.
“으쌰. 어디 보자, 우리 도련님 못 본 새 진짜 많이 크셨네요.”
“고작 보름 만인데?”
“하하, 어린애들은 워낙 쑥쑥 크니까요.”
그러다 문득 그를 지탱하고 있는 심복의 팔에 난 상처 자국이 카시스의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손이 그 위를 덮자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앗,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심복이 곤혹스러운 듯이 카시스를 보았다. 그는 페델리안에게 유전되는 능력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정도는 의무반에 가서 보이면 되는데요.”
“내가 하는 게 쉽고 빠르잖아.”
“가주님도 이러면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지금까지도 몇 번 이런 일로 리셸에게 꾸지람 들은 적 있는 카시스가 입을 다물었다.
심복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 했지만 리셸과 쟌느가 실비아를 데리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저 카시스를 내려놓은 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주님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뿐입니다.”
“으응.”
“그리고 치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상냥하신 도련님.”
투박한 손길에 무질서하게 헤집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심복의 다정한 웃는 얼굴이 보였다.
카시스도 그를 따라 방긋 웃었다.
“카시스. 또 셀먼이 네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구나.”
“하하! 죄송합니다, 가주님.”
실비아를 안고 온 리셸이 자상하게 웃으며 다른 한쪽 팔로 카시스를 안아 들었다.
쟌느도 미소 띤 낯으로 새집처럼 변한 카시스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녀왔다.”
부자는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공기가 좀 쌀쌀하니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 어머니. 아까 짐마차를 타고 고양이가 따라온 것 같던데 저희가 키워도 돼요?”
“고양이!”
카시스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눈을 반짝였다.
“고양이? 지금은 안 보이는데?”
“좀 다쳐서 치료받으러 갔어요.”
“고양이 볼래!”
네 가족은 누가 봐도 화목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고즈넉한 바람이 그 뒤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
“⋯⋯.”
카시스는 며칠 뒤 연무장 앞의 덤불 사이에 반쯤 몸을 파묻은 채 자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첫날 이후 씻기고 치료시키긴 한 듯, 전보다 좀 하얘진 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꾸준히 관리받고 있다기에는 여전히 꼬질꼬질했다.
카시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치료시키려 데려간 고양이가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페델리안의 의원과 심복이 면목 없다는 듯 고해 왔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만날 것을 한껏 기대하고 있던 실비아는 크게 실망해 울먹이기까지 했다. 이후 그들은 고양이를 찾아내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움직임이 워낙 날쌔서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고양이가 주로 다니는 길에 먹이를 놓고 잠복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지금 심복들이 한창 함정을 설치 중인 곳과 카시스가 고양이를 발견한 곳은 정반대의 위치였다.
소리 죽인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앞으로 내디뎌졌다. 카시스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여 잠들어 있는 고양이에게 손을 뻗쳤다.
캬악!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는데, 예민한 고양이는 카시스의 손이 닿자마자 깨어나 버둥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자 작은 짐승이 발버둥치면서 있는 힘껏 카시스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얼마나 그 기세가 사나운지 손등의 살점까지 떨어져 나가 붉은 피가 울컥 흘러내릴 정도였다. 만만치 않은 통증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래도 새끼 짐승을 포획한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카시스도 고양이를 겁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상처가 여전히 중해 보여 한시라도 빨리 치료해야 할 것 같았다.
“쉬이. 괜찮아.”
지금 고양이와 카시스 둘 다 부상이 작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금방 낫게 할 수 있으니 카시스는 먼저 고양이부터 치료했다.
그의 손을 타고 흘러 나간 기운에 꼭 안정제 효과라도 있는 것 처럼 손 안의 버둥거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느라 상처가 벌어져 붕대 위를 흠뻑 적시고 있던 피도 멎었다.
카시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싶어 애쓰는 것을 느낀 것일까?
어느새 새끼 짐승은 카시스의 손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카시스는 얌전해진 고양이를 안고 자리를 벗어났다.
“고양이!”
혼자 놀고 있던 실비아가 그들을 보고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와! 오빠가 찾았어?”
그러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어? 그런데 고양이 아야해?”
“괜찮아. 지금은 고양이 안 아파.”
카시스의 손이 고양이의 몸에 감겨 있는 피투성이 붕대를 풀었다.
카시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의지에 따라 다친 동물과 사람 모두를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꼭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오빠가 고양이 안 아프게 해줬어?”
카시스의 앞에 쭈그려 앉은 실비아가 아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카시스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야.”
그러자 실비아도 그를 따라 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 쉿! 비밀이야.”
물론 제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숨긴다 한들, 아이들의 비밀쯤은 어른들의 눈에 훤히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바로 얼마 전에도 같은 일로 카시스를 혼낸 일이 있었고, 이와 관련해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키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 부부도 고민되는 바가 있었기에 일단 이번에는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에 못 이겨 한 번 모른 척해 주었다.
***
새끼 짐승은 카시스를 잘 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이 너무 불어나 뭔가 이상해 알아보았더니 그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백호였다. 처음에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주려 했지만 이미 사람 손을 타서 야생에 풀어놓을 수 없었다.
페델리안에 들어온 지 몇 달 만에 백호의 몸은 카시스만 해졌다. 그래도 두 아이는 겁내지 않고 동물과 잘 어울려 놀았다.
“너희들, 또 이렇게 다쳤잖니. 좀 더 조심해서 놀지 못하고.”
“괜찮아, 오빠가 호 해 주면 다 낫는데.”
어린아이가 놀다가 다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별생각 없이 해맑게 꺼낸 실비아의 말만큼은 좌시하기 어려웠다.
실비아는 또래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성격이 활달했다. 하지만 실비아가 가끔 무모함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행동을 하는 건 사실 카시스의 영향이 컸다. 어디를 어떻게 다쳐도 카시스의 손길 한 번이면 금방 나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아이는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건 카시스도 마찬가지라, 두 아이는 꽤 자주 어른들의 심장을 철렁 떨어지게 만들곤 했다. 게다가 아무리 타일러도 페델리안의 이념에 반하게 자꾸만 몰래 힘을 사용하는 건 그 자체로 문제였다.
페델리안에서는 혹시라도 어린 아이가 힘을 맹신한 나머지 살아 있는 인간과 동물을 언제든 고칠 수 있는 인형이나 물건처럼 여기는 일이 생길까 우려해 예전부터 각별히 주의해 교육시켜 왔다. 그런 만큼 카시스가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리셸과 쟌느는 그 점을 늘 염려 했다.
“걱정이에요. 당신을 닮아서 그런지 은근히 고집이 있어서, 몇 번이나 타이르고 혼을 내 봐도 오래가지 않으니.”
“좀 더 지켜봅시다. 아직은 어려서 정도를 모를 뿐, 차차 나아 질 테니.”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점점 성장해 갔다.
***
“오빠, 빨리 와!”
“실비아, 너무 멀리 가진 마.”
어느 맑고 화창한 오후, 카시스와 실비아는 백호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앞서 뛰어 가던 실비아가 넘어졌다. 카시스 는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히잉⋯⋯. 아파.”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도 벗겨진 실비아가 울먹이면서 카시스를 돌아보았다. 긁혀서 피가 나는 상처가 정말 꽤 아파 보여서 카시스는 실비아를 안아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씻고 의무반으로 가면 괜찮⋯⋯.”
“왜? 오빠가 지금 바로 고쳐 주면 되잖아.”
리셸과 쟌느는 카시스가 평소에 페델리안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카시스도 그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로 아롱거리는 두 눈이 의문을 품은 채 카시스를 향하자 그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카시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눈물에 약했다.
그래서 누군가 부상이라도 입어 눈에 눈물방울을 달고 있는 걸 보면 어서 그것을 그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물론 다친 사람이나 동물을 치료해 준 뒤 고맙다는 인사를 듣거나 호의적인 눈빛을 받으면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하지만 카시스로 하여금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꼭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결국, 오늘도 카시스는 실비아의 울먹임에 져 리셸과 쟌느 몰래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 실비아는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이 헤헤 웃으면서 또 카시스를 뒤에 두고 잔디밭을 달려갔다.
카시스는 실비아와 놀아 주다가 먼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백호의 털을 살폈다. 조금 전부터 백호가 그에게 이상하게 치대며 끙끙거렸기 때문이다.
“아, 여기 가시가 박혀 있었구나. 자, 이제 괜찮지?”
카시스는 백호에게 박힌 가시를 뽑아 주고 털을 쓰다듬었다. 카시스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백호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작게 그르릉거렸다. 카시스도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뒤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 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카시스의 뒷덜미를 스쳤다.
“실비아?”
그는 고개를 돌려 여동생을 불렀다.
조금 전 실비아가 뛰어간 곳에서 소리가 들린게 분명한데, 기이할 정도로 주변이 조용했다.
결국,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비아를 찾아갔다.
잠시 후 그가 발견한 것은 정원 한구석에 쓰러져 있는 여동생이었다.
“실비아⋯⋯!”
풀밭 위에 점점 넓게 퍼져 나가는 피 웅덩이를 보자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렸다. 실비아는 정원에 있는 동상 위로 기어 올라가 놀다가 추락해 그 앞에 있는 석판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실비아, 괜찮아? 정신 차려, 실비아⋯⋯!”
카시스가 아연실색해 달려가자 실비아가 신음했다. 이 정도로 크게 다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은 여동생인 실비아였고⋯⋯.
카시스도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때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행동은 당장 달려가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시스는 곧 애써 마음 을 추스르고 벌벌 떨리는 손을 실비아에게 가져다 댔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고칠 수 있어.
그러나 카시스가 가진 힘에 비해 실비아의 증상이 위중했던 탓일까?
그의 손에서 흘러나간 기운은 지금까지처럼 실비아를 낫게 하지 못했다.
“우욱, 커억⋯⋯!”
오히려 갑자기 실비아는 구멍마다 피를 쏟으며 경련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일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번 고통스럽게 들썩이던 실비아의 몸이 잠시 후 무서울 정도로 잠잠해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더 이상 실비아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도대체 지금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단 한 가지만큼은 명백했다. 카시스가 그의 여동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아⋯⋯아아⋯⋯.”
덜컥 숨이 막혔다.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이 밀려와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크릉⋯⋯
그때 새하얀 무언가가 카시스의 몸을 툭 건드렸다. 아까부터 그를 따라와 옆에 있던 백호였다. 실비아가 만든 피 웅덩이에 젖은 백호의 몸도 붉게 물들어 얼룩덜룩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 리셸에게 지나가듯이 들었던 이야기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페델리안의 힘으로 단순 치유뿐 아니라, 다른 생물체에게서 생명력을 꺼내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는⋯⋯.
물론 그 뒤에는 인간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니 결코 그런 금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엄한 당부가 뒤따랐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경계심 없이 자신을 보는 눈을 마주하며 카시스는 처음으로 생명의 경중을 제 손으로 저울질했다.
떨리는 손이 백호의 머리에 닿았다. 카시스는 지금보다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백호를 진심으로 친구처럼 좋아하고 아꼈지만, 동생인 실비아보다 소중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카시스는 다른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실비아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뒤이어 백호의 처절한 비명이 귓바퀴를 찔렸다. 손안의 생명체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카시스? 왜 거기서 그렇게⋯⋯.”
만약 그때 쟌느가 오지 않았다면, 카시스는 분명 방금 전에 한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게 분명했다.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러 왔던 쟌느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실비아와 백호, 그리고 그 둘에게 손을 대고 있는 카시스였다.
“실비아!”
쟌느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이 바닥에 무참히 떨어졌다. 그녀는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딸에게 달려갔다.
“어, 어머니.”
그때 쟌느의 눈에는 울고 있는 카시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실비아가 숨을 쉬지 않았다.
자식의 손가락 거스러미 하나조차 마음 쓰이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한데 이렇게 참혹한 몰골이 되어 죽어 있는 딸을 보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그녀를 짓이기는 듯했다.
“죽으면 안 돼, 눈을 떠, 제발⋯⋯ 실비아!”
쟌느의 비명이 아프게 귀를 찔렀다. 이윽고 쏟아지는 그녀의 울음 섞인 질책과 원망의 말이 카시스를 망연히 스쳐 지나갔다.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느냐.”
리셸은 결국 카시스의 힘을 묶어 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네 힘은 재앙과도 같다.”
어렸던 그날, 카시스는 생애 처음으로 지독한 절망과 후회를 배웠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지금 같은 일에 네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끔찍한 사건이었기에 그날의 기억은 카시스에게서 봉인되었다.
“지금부터 네게 금제를 걸겠다.”
그래서 그는 다만 리셸에 의해 성인이 될 때까지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이미 그때의 쓰디쓴 좌절이 뼈아프게 새겨져 있었다.
제 손으로 실비아의 마지막 숨을 앗아 갔던 날, 카시스는 처음으로 리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러니 앞으로 평생 이것을 기쁘게 사용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너, 이름이 뭐야. ”
“록사나. ”
그의 남은 인생 전부를 기꺼이 바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해, 그때부터 카시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남은 시간을 나한테 줘. ”
“어차피 앞으로의 목적지가 어디라도 상관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네가 죽을 때까지. ”
오랜 날들이 흘러 마침내 그들의 시간이 완전히 맞닿았을 때, 카시스는 그의 인생이 타인에게 귀속되기를 처음으로 열망했다.
만약 한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면, 그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의 남겨진 모든 장들에는 반드시 그녀의 이름이 같이 새겨지기를.
물론 훗날 그런 간절한 바람을 남몰래 가슴에 품을 날이 오리란 사실을 이때의 어린 카시스 페델리안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그러니 결국 이것은 그가 아직은 불완전했던 시절의 이야기.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 아래에서 한 소년이 마침내 그의 소녀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그런 어느 작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