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52)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52화(252/253)
특별외전 3. IF 데온 X 록사나
: 악역들의 배드 엔딩
란트 아그리체가 죽고 페델리안으로 떠났던 록사나가 돌아와 아그리체 저택을 봉쇄시킨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록사나는 결국 카시스 페델리안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나비가 만들어 낸 환영으로 사시사철 하얀 안개에 휩싸인 저택은 꼭 이야기 속 유령의 성, 혹은 마녀의 탑처럼 변해 방문자를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도 카시스 페델리안은 마음을 쉽게 꺾지 않았다.
그는 록사나의 굳은 결심을 안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아그리체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짙은 안개가 그를 가로막는 것을 보고서도 굴하지 않았다. 꼭 이렇게 기다리면 언젠가는 록사나가 반드시 그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이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개 속을 바라보는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카시스 페델리안의 모습은 늘 데온의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카시스 페델리안이 이번엔 제법 오래 버티고 있던데.”
늦은 밤,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데온이 침대에 누운 록사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미동없이 눈을 감고있는 록사나의 모습은 꼭 평온히 잠든 사람 같았다.
“그래서?”
하지만 데온의 말에 이어진건 침묵이 아니라 싸늘한 물음이었다.
“어쩌라고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테지.”
데온이 반쯤 열고 온 문에서 흘러든 미약한 바람이 벽에 걸린 촛대의 불을 깜빡이게 했다.
록사나의 독나비가 느리게 날갯짓하며 만든 그림자가 벽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계속 저대로 그냥 놔둘 생각인가?”
“고작 이딴 얘기를 하려고 이 시간에 날 찾아 왔어?”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 비틀린 웃음이 데온을 따갑게 찔렀다.
눈꺼풀 밑으로 드러난 록사나의 눈이 데온을 향했다. 그 안에도 차가운 조소가 어려 있었다.
“귀찮게 굴지 마, 데온 아그리체. 이런 식으로 안달 난 개새끼처럼 보채면서 찔러 보는 거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짜증만 나니까.”
데온은 몸을 돌려 그를 등져 눕는 록사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나가. 잘거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축객령이 떨어졌다.
무섭도록 적막해진 방 안에서 생동감을 입고 움직이는 건 오직 록사나의 독나비 뿐이었다.
겁없이 다가와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나비 한 마리를 데온의 손이 잡아 뜯듯이 붙잡아 으깼다.
“’고작 이딴 얘기’라고 할만큼 너한테 의미없는 일이 아닐 텐데.”
표정없는 얼굴로 읊조린 데온이 뒤돌아 방을 떠났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건 너겠지, 록사나 아그리체.”
문이 닫힌 후에야 록사나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
록사나는 아그리체 밖에 있는 독나비와 시각을 공유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연 안개가 낀 밤. 보름달이 뜬 날 이었음에도 바깥은 자욱한 안개 때문에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그 속에서 꼭 단단한 바위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한 곳을 바라본 채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록사나의 시야에 비쳤다.
단 한 순간도 그다운 빛을 잃은 적 없는 황금색 눈동자가 흰 안개 속 어딘가를 관통할 듯 명료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있던 광경을 눈에 담자 어쩔 수 없이 호흡이 조금 흐트러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남자의 은색 머리칼이 꼭 그녀의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록사나는 얼마간 독나비가 보여주는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데온은 어디있어?”
복도의 창가에 붙어 바깥의 분위기를 살피던 고용인이 뒤에서 들려온 록사나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제레미 도련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조심스러운 답변 뒤로 실소가 떨어졌다.
“다들 부지런히 헛짓들을 하는구나.”
록사나가 움직이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커졌다.
고용인은 무심코 눈길을 들어 제 앞으로 다가온 사람을 시야에 담았다.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냉소를 띤 붉은 눈으로 안개 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적적하면 북쪽 숲에나 보내 줘야지.”
록사나의 손짓을 따라 이제는 거의 검게 변한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갔다. 복도에 있던 다른 고용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제 보니, 록사나가 입은 옷에 붙은 장식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그녀의 독나비였다. 예전에는 록사나의 명령 없인 나타나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항상 그녀 곁에 맴돌고 있는 광경이 오싹함을 자아냈다.
독나비의 통제가 전보다 느슨해졌음을 증명하는 일이었기에 저절로 두려움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데온과 제레미가 돌아오면 내일 하루는 내 방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전해.”
사람들의 공포를 알아챈 록사나가 복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옷자락이 소리없이 계단을 스쳤다. 꼭 유령처럼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뒷모습이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야,이 미친 새끼야! 그냥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니까 왜 꾸역꾸역 기어 나와서 성질을 긁어? 진짜 사람 성가시게 할래?”
안개 속에서 데온의 뒤를 쫓던 제레미가 결국 폭발해 소리쳤다. 아까부터 좋은 말로 데온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개 짖는 소리를 흘려듣듯이 제레미를 무시했다.
그래서 제레미도 더는 참지 않고 데온을 몸으로 막아 섰다.
“시발, 어쩐지 그동안 잘 참는다 했어. 너 지금 이러는 거 사나 누나도 알아? 일부러 방심하게 만든 뒤에 오늘처럼 뒤통수 칠 생각이었던 거지? 어?”
물론 몸으로 막아선다는 말은 데온의 양다리, 혹은 척추 뼈를 뭉개버릴 생각으로 그를 공격했다는 뜻이었다.
“사나 누나가 착해서 옆에 끼고 있어주니까 기어 오르기나하고! 그냥 뒈져!”
데온은 살기 띤 맹공격을 퍼붓는 제레미를 가차없이 후려쳐 막아 내며 저택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록사나 몰래 다른 꿍꿍이속을 감추고 있던건 너겠지, 제레미 아그리체.”
“뭐? 내가 뭘?!”
“지난 반 년간 틈날 때마다 페델리안 측과 비밀리에 접선하려 기를 쓰던 건 네 쪽 아니었나.”
정곡을 찔린 제레미가 눈에서 불꽃을 튀겼다.
“너랑 난 목적이 다르잖아! 넌 지금 그 새끼를 꼴리는대로 처바르려는 거고, 난 …….”
“배알도 없이 구걸하려던 거겠지.”
데온은 제레미의 목적까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냉담하게 말했다.
“페델리안 앞에서 꼬리 만 개처럼 납작 엎드려 아양이라도 떨 생각인가 본데,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록사나 앞에서도 당당히 말해 보지 그러나?”
“시발, 이새끼, 너도 다 알면서 그 말본새 진짜 …….”
제레미가 데온을 죽일 듯이 노려 봤지만 데온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인정 하지 못하고 이만 뿌득뿌득 갈았으나 사실 데온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제레미가 록사나 몰래 아그리체 밖에있는 카시스 페델리안과 만나려 애쓰던 것도 사실이었다. 카시스에게 록사나를 살릴 방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부터였다.
당연히 데온만큼이나 구역질 나는 카시스 페델리안을 록사나에게 붙여 놓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록사나의 생명력이 나날이 바스러져 가고 있다는 걸 아그리체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록사나를 위해 카시스 페델리안의 발이라도 핥을 작정으로 노력 중인 제레미의 갸륵한 마음을 이딴 식으로 폄하해 말하다니, 역시 데온 아그리체는 몹쓸 개새끼였다.
물론 록사나도 제레미가 카시스 페델리안과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 듯, 번번이 그의 걸음을 막았지만……
사아아!
바로 그때, 검은 기척이 제레미의 눈앞을 휙 가로질렀다. 동시에 안개 속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우, 이거 봐! 오늘도 너 때문에 망했잖아!”
제레미는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머리를 쥐어 뜯었다. 뿌연 안개 속에 나타난 앙상한 검은 나뭇가지가 같은 방향으로 꺾어져 손짓 하듯이 흔들렸다.
제레미가 제멋대로 카시스 페델리안을 만나려 할 때마다 록사나가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아마 이대로 북쪽 숲에 가서 마물들을 몇 마리 후드려 패다 보면 록사나가 저택까지 길을 열어 줄 터였다.
“미친다 ……. 아침 먹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으려나.”
제레미는 빠르게 포기하고 앞으로 이어진 외길을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데온은 검은 나뭇가지 사이를 노니는 나비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것이 록사나라도 되는 것처럼.
곧 두 사람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휘이이-
흰 안개를 뚫고 불어온 바람이 뺨을 할퀴며 지나갔다.
오랫동안 뿌리 내리고 있던 나무처럼 흔들림없이 곧게 서 있던 카시스가 눈빛을 변화시킨 건 바로 그때였다. 주변에 자욱하게 내려 앉은 안개 속에서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것을 알아차린 이시도르가 카시스에게 물었다.
카시스는 이지러지는 풍경 위로 하늘거리는 검은 나비를 망막에 새길 듯이 담아 냈다.
아무래도 카시스의 심장을 가진 여인은 오늘도 그에게 곁을 허락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늘은 일단 물러난다.”
하루 하루 목이 말라 미칠 지경이었지만 카시스는 인내했다. 모순적이지만, 차라리 록사나가 보여주는 환영이 아직 이토록 견고한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지도 몰랐다. 짙은 안개 속에서 그리운 이의 자취를 찾는 눈길에는 타오르는 듯한 선명한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단 한 번.
앞으로 언제든 단 한 번이라도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면 카시스는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을 터였다.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록사나를 붙잡고 죽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테니.
설령 그녀가 거부한다해도, 그 어떤 원망을 받는다 해도 이제는 상관 없었다.
카시스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달빛 아래에서 돌아 섰다. 몸을 감싸는 공기가 여전히 찼다. 간절히 기다리던 새벽을 맞이하려면 이 어두운 밤을 조금 더 견뎌 내야 할 듯 했다.
***
“뭐 이렇게 말 안 듣는 개새끼가 다 있담.”
책상 위에 걸터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보던 록사나가 빈 술잔을 내려 놓으며 나른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앞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말라는 소리 못 들었어?”
란트가 사용하던 집무실 안의 공기는 각성제의 향과 술 냄새가 뒤섞여 탁했다. 록사나는 살아 생전 란트의 존재를 끔찍하게 여겼지만, 그가 죽은 후 이런 식으로 란트의 흔적이 밴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데온은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온 역시 이곳에 들어와 있을 때면 정말 란트가 죽어 없어져,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 상태로 있었던 거지?”
데온은 록사나에게 답하지 않고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집무실 안에는 각성제와 술 냄새만 퍼져있는 게 아니었다. 비 내리는 날의 습기 찬 공기에 섞인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글쎄, 원래 이 술병에 술이 반쯤 차 있었던가? ”
록사나가 눈짓한 술병에는 이제 내용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데온은 붉게 젖은 록사나의 팔을 내려다 봤다. 검게 변한 독나비들은 전보다 식성이 까다로워져, 독성이 짙은 마물의 살과 주인인 록사나의 피만 먹이로 삼았다. 하얀 팔에 가느다랗게 흐르는 붉은 선혈과 거기에 달라 붙은 검은 나비들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기괴한 느낌을 풍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던 데온이 손을 움직였다. 검은 나비들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무참하게 짓뭉개졌다. 꼭 작은 심장이 맥박치듯이 손 안에서 퍼덕이는 느낌이 거슬려 데온은 주먹에 더 힘을 주었다.
“오늘 따라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네. 그런다고 얘네가 죽을 것 같나.”
록사나가 그런 그를 비웃었다. 데온도 무의미한 짓임을 알고 있었던 듯, 곧 손에서 힘을 풀었 다.
이어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칼을 들어 자신의 팔을 그었다. 데온의 피 안에도 내성화 된 독이 흐르고 있어서인지, 독나비들은 기꺼워하며 그에게 달라 붙어 피를 빨았다.
“그래도 내가 죽으면 손톱 부스러기 하나 쯤은 너 한테 남겨줄까 했는데.”
록사나는 스스로 먹이를 자처하는 데온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술 끝을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움직였다.
“요즘 보니 역시 그건 어려울 것 같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데온이 알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독나비의 숙주가 된 주인들이 어떤 끝을 맞이하는지, 이제 데온도 알고 있었다. 록사나가 제 입으로 직접, 빌어먹을 정도로 친절하게 알려주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됐다 싶어. 내가 죽은 뒤에 네가 내 시체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잖아.”
록사나는 그녀의 죽음 마저도 데온을 조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쉽게 사용했다.
“혹시라도 기대하고 있었으면 안됐네, 데온 아그리체.”
아름다운 얼굴에 그려진 초승달 같은 미소가 데온을 베고 지나갔다.
늘 강박적으로 자신을 꾸미던 모습을 버리고, 장식없는 긴 머리카락을 하얀 옷 위로 늘어뜨린 채 책상 위에 걸터 앉은 록사나는 꼭 세상의 풍파를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누구라도 섣불리 손을 대면 그 길로 몸을 칭칭 동여매 지옥까지 끌고 들어갈 것 같은 섬뜩한 느낌도 공존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으로 록사나를 응시하던 데온이 충동 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피 묻은 두 손이 맞닿은 데 이어, 한기 어린 손가락들이 질척하게 얽혔다.
그 순간 록사나가 움찔했으나 데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붙잡은 손을 끌어 당겨 거기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혀가 붉게 젖은 손가락을 핥는 느낌에 온몸의 솜털이 바싹 일어났다.
“……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싸늘한 시선이 데온의 얼굴에 꽂혔다.
“네 마음대로 나한테 손을 대도 좋다고 허락한 기억 따위 없는데.”
”어차피 말 안 듣는 개새끼인데 뭘 기대해?”
록사나가 팔을 뒤로 뺄 듯이 움직였으나 데온은 손아귀의 힘을 더 강하게했다. 여전히 록사나의 손에 반쯤 파 묻힌 입술에 음영 어린 미소가 걸렸다.
“개새끼가 개새끼답게 굴어 주겠다는데.”
손가락이 더 깊이 파고 들어 뼈 마디를 조였다.
“그게 이상한 일인가?”
젖은 숨결이 살갗을 지분거리며 올라가 혈관 깊숙이까지 뜨거운 열기를 퍼트렸다. 피에 젖은 입술이 한결 붉게 물들어 흰 손목에까지 낙인을 새길 듯이 눌러 찍혔다. 꼭 뱀이 똬리를 틀고 팔을 기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데온은 그렇게 보란 듯이 록사나의 손과 팔을 핥다가 하얀 살갗에 이를 세웠다. 록사나의 눈썹이 경련했다. 날카로운 감각이 투박하게 살을 파고 들었다. 꼭 눈앞의 먹잇감을 전부 씹어 삼켜 버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사정을 두지 않고 짓씹는 움직임에 통증이 일었다.
“당장 이거 놔.”
데온의 돌발적인 행동이 록사나에게도 뜻밖이긴 했는지, 그녀의 입술에서 분노보다 짜증을 담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데온에게 붙잡힌 팔을 떨어 뜨리려 몸을 틀다가, 록사나의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기가 막히게도 데온은 그런 록사나를 오히려 책상 위로 처박듯이 밀쳤다.
쿵, 소리와 함께 그녀의 등이 딱딱한 책상에 아프게 짓눌렸다.
엉킨 팔을 타고 흐른 붉은 피가 책상과 바닥, 그리고 두 사람의 옷을 더럽혔다. 붉은 선혈은 이미 한데 뒤섞여, 서로를 적시고 있는 것이 누구에게서 나온 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데온은 록사나를 옥죈 손을 끝끝내 놓지 않았다.
“진짜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
날아 오른 검은 나비들이 천장과 벽, 그리고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에 일그러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데온 아그리체. 네 입으로 말해 봐.”
데온은 기생충 같은 저 벌레들을 모조리 터트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아직도 아그리체의 성문 밖에서 끈질기게 제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카시스 페델리안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드디어 돌아 버린거야? 응?”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서 어디 더 해 볼테면 해 보란 듯이 묘하게 조소 띤 눈으로 데온을 응시하고있는 여자도 차라리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록사나는 정말 데온의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이골이 난 여자였다.
록사나의 말대로, 데온은 그녀를 살아서도 가질 수 없었고, 죽어서도 가질 수 없었다. 제 손으로 카시스 페델리안을 버리고 그를 선택한 주제에, 끝까지 그에게 마음 한 귀퉁이 내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언젠가 한번은 속이 뒤틀려 그런 얘기를 록사나가 듣는 앞에서 꺼내 비아냥거렸다.
“버려? 내가 카시스를? 당신 정말 멍청하구나.”
돌아온 것은 어느 때보다 짙은 비웃음이었다.
“내가 버린 건 카시스 페델리안이 아니라 나지. 그리고 데온 아그리체, 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그 순간 데온은 차가운 얼음으로 빚은 칼날로 심장을 뭉텅 도려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록사나는 거기서 입을 닫았지만,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카시스 페델리안 만큼은 이런 구정물 속에 발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데온이나 그녀 자신 같은 더러운 오물이 묻는 꼴을 그냥 두고 볼 것 같냐고.
한평생 탐욕스럽게 살아 왔던 록사나가 카시스 페델리안을 위해서는 제 마음조차 밟아 누를 수 있다고,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데온도 록사나가 카시스 페델리안에게 품은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페델리안에서 무엇을 보고 느껴 다시 이 아그리체로 돌아 왔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록사나는 이곳에서 그녀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가, 아그리체와 함께 흔적없이 매몰될 생각이었다.
“이상하네 ……. 물어 뜯긴 건 난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지?”
문득 록사나가 데온의 얼굴에서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에 희미한 이채를 띠었다.
“데온.”
데온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이 천천히 뻗어져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당신 설마 지금 나 때문에 아프니?”
잔인할 정도로 다정하게 속삭여진 음성에 머리 끝까지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짐짓 달래듯이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과 달리 데온을 보는 눈에는 차가운 웃음이 번져 있었다.
“너, 어젯밤에 카시스를 죽일 마음으로 밖에 나갔던 게 아니지?”
꼭 데온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록사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따로 필요 없었다. 눈을 마주한 순간, 록사나는 데온조차 정확히 모르는 그의 속마음을 너무도 쉽게 알아 차릴 터였으니까.
“제레미나 당신이나,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짓들을 하려고 하는지 …….”
붉은 입술에 느릿하게 떠오른 미소가 데온의 심장을 들쑤셨다.
“특히 데온. 넌 그럴 자격 없잖아.”
“ …….”
“내가 더 살고 싶지 않다는데, 네가 무슨 권리로 그걸 막아?”
록사나의 손에서 옮겨 묻은 피가 데온의 뺨에 붉은 흔적을 그렸다.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해. 그게 누구라도 방해할 수 없어.”
록사나는 언제나처럼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데온을 보며 그렇게 선언했다.
조금의 여지조차 없이 확고하게, 그녀 자신의 끝을.
데온에게 허락된 역할은 그저 무대 밑의 관중처럼 아무것도 간섭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록사나를 가만히 지켜 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록사나가 그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차라리 널 내 손으로 죽이고 싶어.”
“죽여 볼래, 그럼? ”
데온이 할 수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 록사나는 오히려 그를 부추겼다.
살기를 담은 데온의 손이 움직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목을 분지르고 싶은 충동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번에도 손아귀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데온, 그거 알아?”
그런 데온을 보던 록사나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람은 죽으면 환생이란 걸 해.”
그러니 그녀 역시 죽으면 이 세상 어딘가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꼭 구원, 혹은 저주처럼 데온을 옮아 맸다. 그는 록사나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어깨를 얕게 떨며 웃었다.
이처럼 끝까지 잔인한 희망 고문이 또 있을까?
결국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데온의 눈앞에서 사라질 거면서, 록사나는 죽어서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했다.
“찾아 낼거야.”
그러나 몇 번이나 심장이 찢겨 너덜거려도 데온은 록사나의 발뒤꿈치에 이어진 그림자라도 쫓을 수밖에 없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다시 널 찾 아낼거야.”
만약 록사나가 원하는 것이, 죽은 그녀의 흔적을 혼자 쫓고 또 쫓다가 데온이 미쳐 버리는 것이라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하여 영혼에 각인할 듯이 맹세하자 비로소 록사나가 그를 향해 만족스럽게 웃었다. 언젠가 그가 꿈속에서 본 적이 있던 것처럼, 별빛과 꽃잎이 수명을 다해 반짝이며 터져 나가 듯 더없이 아름답고 허망하게.
데온은 그 미소를 록사나의 유언처럼 가슴에 새겼다.
그것만이 데온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록사나의 흔적이었기에, 심장에 번지는 아릿한 통증 마저도 한없이 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