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53화(253/253)
특별외전 4. IF 록사나 페델리안 x 카시스 아그리체
: 여주인공의 언니로 살아남는 방법
‘젠장, 망할 란트 아그리체!’
록사나는 지저분한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어 냈다. 몸을 비틀자 사지를 묶은 구속 구가 사슬에 끌려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그리체의 지하 감옥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밴 비릿한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에 속이 역해졌다.
하지만 진짜 역겨운 건 그녀를 이곳에 끌고 와 가둔 사람이었다.
흑의 아그리체 가문의 수장인 란트 아그리체.
그는 록사나가 빙의한 이 〈나락의 꽃>이란 피폐 소설에서 재활용도 하지 못할 쓰레기 악당이었다.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여주인공인 실비아의 언니를 납치해 죽여, 여주인공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몹쓸 개자식이었으니까.
그 망할 소설에서 실비아는 하나 뿐인 언니가 이미 납치당해 죽은 줄도 모르고 실종된 그녀를 찾겠다고 애쓰다가 미친 남주인공들과 만나 피폐한 납치 감금 로맨스를 찍었다.
‘내가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동생을 감히……’
소설 내용을 떠올리자 속에서 열이 치솟았다.
왜냐하면 소설의 여주인공인 실비아 페델리안은 바로 록사나의 하나뿐인 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록사나가 바로 소설 초반에 악역 가문인 아그리체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 그 여주인공 실비아의 언니였다.
록사나는 그런 사실을 란트 아그리체에게 납치당하면서 기억해 냈다.
아무래도 기습당했을 때 머리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 같은데…….
‘좀 더 일찍이면 좋았잖아.’
록사나도 페델리안의 후계자로 자라 무위가 약하지 않았지만 란트 아그리체의 수단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비열하고 더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만한 건, 아그리체에는 질 나쁜 쓰레기들이 많아 납치해 온 사람을 바로 죽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록사나는 란트 아그리체와 적대 관계에 있는 페델리안 사람이었으니, 최대한 오래 괴롭히다가 목숨을 빼앗을 게 분명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탈출할 기회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 어떻게든 살 방법을 강구해 봐야 했다.
그녀는 결코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어, 실비아의 인생을 진흙탕 속에 처박고 싶지 않았으니까.
끼이익.
그때, 멀리서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장난감 아직 안 깨어났어?”
“피떡이 돼서 왔는데 아무렴 벌써 눈을 말똥히 뜨고 있겠냐?”
잠시 후, 두 사람이 록사나가 있는 철창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앳된 느낌이 나는 소년과 소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록사나는 의식을 잃은 척하고 있어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설령 눈을 뜨고 있었다 한들,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재 그녀는 독인지 주술인지 모를 란트 아그리체의 수작에 당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제레미 오빠,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우리가 몰래 여기 들어온 거 아버지가 아시면……”
“병신. 쫄리면 넌 꺼지든가.”
“씨, 닥쳐! 누가 쫄린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록사나는 하마터면 흠칫 몸을 떨 뻔했다.
제레미?
훗날 여주인공인 실비아에게 반해 결국 아그리체를 파멸에 몰아넣는 데 일조하게 되는 악역 서브남 이름이잖아?
“와, 꼴 좀 봐라. 아버지 돈이라도 떼먹었나. 대체 어디 사는 누구길래 이렇게 곤죽을 만들어서 데려왔지?”
불쑥 다가온 손이 록사나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흐음, 그래도 역시 그동안 본 장난감들 중에 제일 봐 줄 만하게 생겼네.”
여기저기 뜯어보듯이 얼굴을 훑는 시선에 속이 불편해졌다. 꼭 물건을 감정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그러던 중, 제레미와 함께 지하 감옥에 내려온 소녀가 록사나와는 다른 의미로 기분이 나빠진 듯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혹시 오빠 혼자 독차지할 생각이면 꿈 깨. 이 장난감은 내가 먼저 찍어 놨다고!”
“하, 이게 진짜 뭘 잘못 처먹었나.”
그것이 거슬렸는지, 제레미가 음험한 기운을 흘리며 돌아섰다.
“야, 지금 샬럿 네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장난감 소유권을…… 으악, 시발!”
하지만 그는 샬럿을 향해 뒤돌자마자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만 펄쩍 뛰고 말았다.
“뭐야! 너, 너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
샬럿도 제레미를 따라 고개를 돌린 뒤 기겁했다.
“카, 카시스 오빠!”
불빛이 거의 닿지 않아 어두운 문가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록사나도 새로 나타난 사람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참이라 조금 놀랐다.
“왜 그렇게 당황하지?”
검은 머리칼에 황금색 눈을 가진 소년이 팔짱을 끼고 철창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제레미와 샬럿을 관조하듯이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이 지하 감옥에 둘이 쥐새끼처럼 숨어든 게 비밀이라도 됐나?”
란트에게 처음 붙잡혀 왔을 때 언뜻 목소리를 들었던 앞의 두 사람과 달리 록사나에게 낯선 음성이었다. 그런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 고요한 목소리가 록사나의 귀에 기이할 정도로 또렷이 박혔다.
“난 또 지하에 있어야 할 문지기가 피투성이가 돼서 위층까지 기어 올라와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기에, 너희가 같이 장난감 구경할 다른 사람을 초대하려고 보낸 줄 알았는데.”
이어진 그의 말에는 약간의 조소가 담겨 있었다.
“문지기 입막음 하나 제대로 못 할 거면 이런 간 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제레미는 지하 감옥에 들어오기 전 무력으로 제압한 문지기가 새털같이 가벼운 입을 겁 없이 털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욕설을 씹어 뱉었다.
“시발 어쩐지 평소에 장난감 같은 데 관심 한 톨 없던 놈이 웬일로 여기까지 행차했나 했더니만.”
“다 오빠 때문이야! 그러게 내가 그냥 관두자고 했잖아!”
“넌 닥쳐!”
제레미와 샬럿이 험악하게 입씨름하기 시작했다. 록사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상황을 살폈다.
샬럿이란 소녀가 입에 담은 호칭으로 봐서는, 저 카시스라는 소년도 란트 아그리체의 자식인 듯한데…….
소설에서 본 기억이 없는 이름인 걸 보면, 별로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었던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아까 그가 등장한 시점부터 제레미와 샬럿에게서 풍겨 나오기 시작한 긴장감 어린 공기가 지금도 아주 따갑게 피부를 찌르고 있었 다.
“야, 그래서 아버지한테 고자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당장이라도 도화선에 불이 붙을 듯한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귀찮게 내가 왜.”
그러나 카시스는 오히려 권태롭기까지 한 태도로 제레미의 의혹을 일축해 버렸다.
“어떤 머저리들이 일을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확인하러 왔을 뿐이야.”
제레미가 발끈했으나 이어진 그의 말이 제레미의 행동보다 빨랐다.
“그보다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괜찮겠나? 그 문지기, 위에 그대로 두고 왔는데.”
“뭐?!”
“지금쯤 복도에 쓰러져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발견하진 않았나 모르겠군.”
“시발! 그런 건 빨리 말해!”
제레미와 샬럿이 그 소리를 듣고 황급히 철창 밖으로 뛰쳐나갔다.
부상을 입은 문지기를 다른 사람이 발견해, 이 일이 란트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제대로 입막음을 할 요량인 듯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카시스를 지하 감옥에 그냥 두고 갔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확실히 일 처리가 치밀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게 단순해 보였다. 적어도 제레미 아그리체에게는 록사나가 파고들어 이용할 틈이 있을 것 같았다.
록사나는 조금 전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아직 감옥에 남아 있는 정체 모를 소년이 자리를 비키기를 기다렸다.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동안은 록사나가 있는 지하 감옥의 출입이 엄금된 듯했으니 조금이나마 몸을 회복시킬 시간이 있을 터였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잠시 동안 록사나를 쳐다보는 듯하던 소년이 마침내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록사나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후 낯선 손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하지만 카시스는 제레미처럼 우악스럽게 록사나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리는 대신, 머리카락을 조용히 걷어내 그녀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페델리안은 다 미련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답답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일렁이는 불빛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느닷없이 남의 가문을 욕하는 소리에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이어진 말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그래도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 있었군.”
록사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의식이 멀쩡히 돌아온 것을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간파 당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 제레미 아그리체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의 허리춤에서 희미하게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던 작은 칼을 몰래 빼내 소매 속에 감춘 걸 들켰다는 것도.
“그럼 조만간 또 보지. 록사나 페델리안.”
하지만 그는 록사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지하 감옥을 떠났다.
록사나가 뒤늦게 눈을 떴으나 역시 뿌연 시야에 비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제레미 아그리체는 얼마 후 록사나를 또 찾아왔다.
“뭐야, 오늘은 깨어 있네? 하긴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당연한가.”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성격 까칠해 보이는 얼굴이 딱 소설에 묘사된 제레미 아그리체였다. 물론 지금 시점은 아직 원작이 시작되기 전인 만큼 나이가 어려 상상한 것보다 앳된 외모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얼굴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붉은 상처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야, 너 페델리안이라며? 존나 어이없네.”
제레미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록사나를 보다가, 감옥 안쪽으로 들어와 묶여 있는 그녀의 사슬을 풀었다.
“날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지?”
“얌전히 따라 나와. 시발, 나도 별로 내키는 건 아닌데 이건 아버지도 허락한 일이라 별수 없어.”
보아하니 제레미는 지난번에 록사나가 그에게서 칼을 훔친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록사나는 제레미를 방심시키기 위해 감옥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일부러 기력이 쇠한 척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자 제레미가 그녀를 돌아보며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장난감 관리가 뭐 이따위야? 내가 나 올 때까지 내 거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 경고 했는데.”
말투는 거칠었지만 사슬을 끄는 손길은 어느새 한결 느슨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누구더러 ‘내 거’라고?
“야, 너 나 없는 동안 간수한테 맞았어? 어떤 새끼가 때렸어? 대머리야, 매부리코야? 내가 나중에 처발라 줄 테니까 쫄지 말고 말해.”
제레미가 한 마디씩 말을 이을 수록 록사나의 기분은 점점 묘해졌다.
“아씨, 아버지는 왜 하필 오늘……. 이걸 지금 내 방으로 빼돌릴 수도 없고.”
탐욕과 짜증, 그리고 미약한 불안감이 뒤섞인 눈이 록사나를 연신 힐끗댔다.
“너 지금 밖으로 나가면 까불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해. 다른 놈들 흥미 끌지 말고 최대한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있으란 말이야.”
제레미는 록사나를 밖으로 데려가는 것이 몹시 싫은 듯 최대한 느리게 걸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협박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너도 네가 페델리안이란 거 알고 눈깔 돈 다른 새끼들보다는 내 손에 들어오는 게 훨씬 나을걸? 시발, 난 그래도 약에 절이거나 장기 수집하는 취미라도 없지.”
그래 봤자 자기도 썩어 빠진 아그리체인 주제에 그는 다른 형제들의 더러운 취향을 깔보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 록사나에게 이 얘기를 하러 일부러 직접 지하 감옥에 내려온 것 같았다.
제레미의 얼굴을 차가운 눈으로 살피듯이 보던 록사나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아그리체에서 꼭 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면 네가 제일 나을 것 같네.”
순간 록사나의 시선에 닿은 제레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닥쳐, 네가 뭘 안다고 건방지게 지껄여?”
일부러 록사나를 겁주듯이 살벌하게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날카로움을 잃은 뒤였다.
“뭐, 내가 아그리체에서 제일 나은 건 확실하지만.”
혹시 실비아에게 반할 운명이라 그런가.
제레미는 생각 이상으로 록사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장난감’ 으로서였지만, 록사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어쩌면 록사나의 얼굴도 실비아와 닮았으니, 나름대로 제레미의 취향에 부합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해놓고 록사나는 속이 좀 메스꺼워져서 한순간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나락의 꽃〉에서 본 제레미 아그리체는 심각한 애정 결핍이었다. 그러니 잘만 하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데 그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지하 감옥에서 장난감을 만들어 오나 했네.”
“닥쳐, 병신들아.”
잠시 후 록사나와 제레미가 도착한 곳은 미로처럼 보이는 야외 공간이었다.
“이거야? 아버지가 페델리안에서 데려온 게.”
그곳에는 제레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누군가가 대뜸 록사나에게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던졌다. 록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피해 냈다.
“호오, 가지고 노는 재미가 좀 있겠는데?”
“뒤질래? 어디다 대고 쓰레기를 던져?”
“왜 이래, 내가 너한테 던졌어?”
으르렁거리는 제레미와 함께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니 그들은 모두 아그리체의 자녀들인 듯했다.
“진짜 예쁘게 생긴 장난감이네. 이렇게 희귀한 건 또 처음 봐.”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갈색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녀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록사나를 관찰했다.
“하지만 질 게 뻔한 싸움은 할 필요 없지. 난 빠질게.”
그러나 그녀는 웃는 얼굴로 물러나 관망하듯이 팔짱을 끼고 섰다.
“또 빠질 놈 있으면 지금 빠져.”
제레미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눈치를 보다가 그나마 나이가 어려 보이는 서너 명의 소년 소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 이후 게임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아그리체의 남매들.
우승 상품은 페델리안에서 온 진귀한 장난감이었다.
‘미친놈들. 누가 란트 아그리체와 한 핏줄 아니랄까 봐.’
록사나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 쉬며 욕설을 씹어 삼켰다.
“저쪽이야!”
“뭐 저렇게 발이 빨라? 페델리안에서 줄행랑치는 것만 가르쳤나?”
그들이 록사나를 처넣은 곳은 온갖 함정으로 넘쳐나는 미로였다.
아그리체의 남매들은 록사나를 사냥터 안의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이 풀어놓고 누가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해 목표 지점까지 데려가는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록사나는 상황을 가늠했다.
현재 그녀의 수중에는 제레미에게서 훔친 단도가 하나 있었고, 그것으로 미리 건드려 둔 구속구 중 두 개는 파손되어 겉보기에만 멀쩡한 상태였다.
“찾았다, 이 쥐새끼 같은…… 컥!”
지금 그 숨겨 둔 무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록사나를 발견했다.
록사나는 민첩하게 움직여 사슬이 연결된 팔로 눈앞에 나타난 사람의 목을 졸랐다.
몇 번 몸싸움이 오고 간 끝에 록사나에게 깔린 사람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소란을 듣고 다른 사람이 더 몰려오기 전에 록사나는 기절한 사람의 몸을 뒤졌다.
ᅳ키에에!
“윽!”
하지만 재수 없게도 록사나가 쓸 만한 걸 찾아내기 전에 옆쪽에서 튀어나온 검은 형체가 그녀를 덮쳤다.
철컹!
더 재수 없는 일은, 다급히 마물의 공격을 막아 내는 동안 아직 파손시키지 못한 구속구가 발동되었다는 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팔다리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다행히 독침은 피했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옆구리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꿀렁 피가 새어 나왔다.
“뭐야, 여기 있었어?”
제레미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안 보여서 존나 찾았잖아!”
록사나와 대치하고 있던 마물을 그가 일시적으로 치워 낸 덕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장난감이다! 내가 찾았다!”
그때 어부지리를 노린 소년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와 록사나의 팔을 낚아챘다.
“시발, 까불지 마!”
그 꼴을 본 제레미가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달려와 소년의 머리채를 통째로 뽑을 듯 거칠게 붙잡아 내던졌다. 제레미와 이름 모를 소년, 그리고 마물이 뒤엉켜 내는 시끄러운 소음이 미로 속에 울렸다.
록사나는 그 틈에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벌어진 상처가 쑤셔와 저절로 입 안에 욕이 고였다. 원래도 란트에게 납치당할 때의 일로 몸이 성치 않았는데 오늘 일로 부상이 더 심해진 듯했다. 그나마 시력이 거의 돌아온 게 다행이었지만, 옷자락을 들쳐 상처를 보니 생각보다 출혈이 심했다.
하지만 또 그녀를 쫓아오는 발 소리가 들려 지혈할 틈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오늘 당장 탈출을 노리는 건 요행일 듯한데…….
어쩌면 제레미의 말처럼 적당히 기회를 봐서 그에게 붙잡히는 게 가장 나을 수도 있었다. 상황을 봤을 때 역시 아그리체 남매들은 록사나를 충분히 가지고 놀기 전까지는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 제레미는 그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것이 록사나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피잉!
그 순간, 풀숲에 숨겨져 있던 함정의 장치가 록사나의 발에 걸렸다.
무언가가 발동되는 소리와 함께 발밑이 훅 꺼졌다. 그 밑에는 새까만 독충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곧바로 붙잡을 것을 찾아 팔을 뻗긴 했지만 흙더미만 손끝에 긁혔을 뿐이었다.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옥죈 건 바로 그때였다.
이어서 순식간에 몸이 위쪽으로 끌어 올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록사나는 이미 누군가에게 포획당해 있었다.
눈앞에 무성한 나뭇잎이 잔상을 남기며 휙휙 지나갔다.
록사나를 안은 채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와 가지를 딛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제레미가 아니었다.
일단 맞닿은 몸으로 느껴지는 체격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이제 열다섯 살에 아직 몸이 덜 여물어 호리호리한 체형인 제레미였다면 이렇게 록사나를 한 손으로 가뿐히 안고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나무 위에서 묘기 하듯이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록사나는 위기감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숨겨 놨던 제레미의 칼을 꺼내 들었다. 잘 갈린 날붙이가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사람을 겨누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대로 급소를 찌를지 말지 순간적으로 갈등하던 록사나의 귓가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꽂혔다.
“죽지 않고 살아서 페델리안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분명 지하 감옥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록사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빛 한 점 들지 않을 것처럼 티 없이 검은 머리칼.
그리고 나뭇잎이 만든 짙은 그림자 밑에서도 선명히 반짝이는 황금색 눈.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수려한 얼굴이 두 눈에 새겨질 듯이 또렷이 박혔다.
아주 잠깐이지만 시선이 마주 쳤다.
칼을 든 록사나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마침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는지, 카시스가 밑으로 뛰어내렸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듯이 떠들었다.
카시스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규칙대로 오늘 상품으로 걸린 장난감은 내가 갖도록 하지. 불만 있는 사람 있나?”
제레미도 바로 록사나의 뒤를 쫓아온 듯, 금방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록사나와 함께 있는 카시스를 보고 광분했다.
“너 이 새끼, 아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왜 또 끼어들어서 지랄이야? 네가 언제부터 이런 데 관심이 있었다고!”
지하 감옥에 이어 지금 여기서도 그에게 방해받아 잔뜩 독이 오른 기색이었다. 그러나 카시스는 제레미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으면서도,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살쾡이를 본 듯이 그저 감흥 없이 반응할 뿐 이었다.
“처벌의 방에 그만큼이나 들어 갔다 왔으면 이제 슬슬 짖어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제레미 아그리체.”
“뭐야?!”
“애초에 이런 같잖은 내기를 제멋대로 먼저 시작한 것도 너희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마음에 드는 걸 갖겠다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건지 모르겠군.”
주변은 어느새 바늘 굴러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그 속에서 제레미가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여전히 감정의 고저 없이 이어지는 카시스의 고요한 목소리만이 선명히 울렸다.
“설마 그 정도까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건 아닐 텐데.”
문득 록사나는 기이한 점을 발견했다.
다른 아그리체처럼 난폭하거나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카시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인정 못 해! 넌 처음부터 참가한 것도 아니었잖아!”
어지간히 분한 듯 씨근덕거리던 제레미가 눈에 살기를 가득 머금고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
다른 이복 남매들이 숨을 헉 들이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들이 단숨에 제레미에게 날아갔다.
사실 카시스는 지금 란트의 명을 받아 저택을 떠나 있는 데온과 함께 아그리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요주의 인물에 속했다.
그는 월례 평가 때마다 1, 2 위를 두고 데온과 엎치락뒤치락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그만큼 그는 란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란트의 자식들 중 가장 출중한 저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상성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을 마주할 때면 곧잘 살벌하게 맞붙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아그리체는 초토화되기 일쑤였다.
그나마 란트와 교육관들의 제재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마저도 없이 두 사람이 앞뒤 안 보고 제대로 붙었다면 누구 하나 죽기 전까지는 절대 싸움이 끝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모두 데온과 카시스라면 학을 떼는 분위기였다.
특히 제레미는 ‘평소에는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눈 돌아가면 제일 미친놈 되는 게 바로 그 새끼’라느니, ‘데온 새끼랑 아주 처돈 게 똑같다’느니 하며 카시스라면 질색했다.
그런데 그 카시스가 페델리안에서 온 장난감에 관심이 있는 게 명백해 보였으니…….
‘좆됐다.’
‘시발, 카시스가 눈독 들이고 있는 장난감인 줄 알았으면 오늘 안 끼는 건데!’
록사나를 건 게임에 응했던 아그리체 남매들 모두가 후회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뭘 잘못 먹었는지 제레미는 록사나에게 눈이 멀어 기어이 선을 넘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그래, 차라리 쟤한테 직접 고르게 해! 그럼 나도 인정할 테니까!”
록사나는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얼굴을 찡그렸다.
“야, 너 저 새끼랑 같이 있고 싶어? 어디 네 입으로 말해 봐.”
‘이게 무슨 개막장 같은 상황이야……’
누가 들어도 멍청한 소리였으나, 제레미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정말 묘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까 지하 감옥을 빠져나올 때 록사나가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듯, 눈빛으로 그녀를 재촉하기까지 했다.
사실 제레미의 말처럼, 이 중에서는 그나마 그를 상대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몰랐다. 일단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 제레미의 성격이 어떤지, 또 약점이 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반면 카시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정보는 없었으니 확실히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하지만…….
“거봐! 대답을 못 하잖아. 재는 너 따위보다 날 더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
록사나가 침묵을 지키자 제레미는 기세등등해졌다. 그녀의 침묵이 그를 선택한다는 의미는 아닌데, 아무래도 뭘 단단히 착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순간, 제레미를 보고 있던 카시스의 입술이 기울어졌다. 소리 없이 걸린 나른한 미소는 수려한 얼굴에 짜 맞춘 듯이 몹시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섬뜩함을 느꼈다.
바로 다음 순간, 카시스가 몸을 움직였다. 여전히 한 팔로는 록사나를 안은 채였다.
갑자기 몸이 흔들려서 록사나는 엉겁결에 맞닿은 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다 뒤쪽에서 들리는 파열음에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록사나의 두 눈은 카시스의 등 뒤에 고정돼 있어 지금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시야에 비친 사람들의 경악 어린 표정과 뒤쪽에서 연이어 울리는 거친 소음으로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크윽, 개새끼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발 밑에서 제레미의 신음이 들렸다.
“꼭 한 번씩 이렇게 귀찮게 군단 말이지.”
퍼억!
그러나 곧 그마저도 잠잠해졌다.
“근성 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겁 없이 설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 귀엽게 봐줄 텐데.”
지루함을 담은 목소리로 평가하듯이 읊조린 카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또 불만 있는 게 누구라고 했더라.”
천천히 주위를 훑는 시선에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모두가 얼 어붙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레미의 꼴을 보고도 감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기대하고 있다면 안됐지만 나한테는 내 걸 나눠 먹는 취미 따위 없어서.”
속으로나마 군침을 흘리고 있을지 모를 이복 남매들에게 일말의 기회조차 없음을 무참히 통보한 카시스가 록사나를 안고 돌아섰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 장난감은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
그날로 록사나는 카시스 아그리체 소유의 장난감이 되었다.
카시스는 록사나를 어떤 빈 방에 데려다 놓고 의원까지 불러 그녀를 치료시켜 주었다.
록사나는 이 상황이 못내 혼란스러웠다. 카시스란 이름은 분명 록사나가 본 책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이 존재감은 도대체 뭐지?’
의원이 떠난 뒤, 록사나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관찰하듯이 보고 있는 카시스에게 불쑥 물었다.
“당신, 아까 했던 말 무슨 의미야?”
미로 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
“죽지 않고 살아서 페델리안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
꼭 록사나의 탈출을 가정하고 있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그리체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페델리안이라면 더욱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날 도와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카시스는 맥이 풀릴 정도로 쉽게 록사나의 의문에 긍정했다.
당연히 록사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눈이 마주한 남자의 속을 파헤치듯이 응시했다.
“어째서?”
“마침 따분하던 참이니까.”
정말 그 말처럼 나른하게 턱을 괴고 앉아 록사나를 보던 카시스가 입술 끝에 묘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왠지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금방 마음을 열 정도로 록사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록사나에게 호의적인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일도 란트 아그리체에게 발설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오늘도 그녀에게 보인 태도를 생각하면…….
카시스를 예리하게 주시하던 록사나의 굳게 닫힌 입이 마침내 다시 열렸다.
“나한테 허튼짓하면 죽일거야.”
현 상황에 완전히 수긍한 건 아니나 적어도 유보는 하기로 결정한 듯, 일종의 경고와 다짐을 담은 조용한 음성이 흔들림 없이 방을 가로질렀다.
카시스는 그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실낱같은 아주 작은 미소였지만 오늘 본 것 중 가장 진실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렇게 적지에서의 기이한 공생 관계가 시작되었다.
소설에서 단 한 순간도 함께 엮인 적 없는 두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가 지금 막 첫 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별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