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8)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28화(28/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28화
이것 참, 나날이 헛소리가 느는 것 같은데.
록사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할 뻔했다.
참으로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란트는 진담인 것 같았다.
기분이 절로 불쾌해졌으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란트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껏 그녀가 잘해 오고 있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어릴 때에는 눈에 띄는 구석 하나 없이 유약하기만 하더니.”
란트는 그 시절의 록사나를 떠올린 듯이 쯧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아를이었던가. 써먹을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죽은 네 오빠.”
역시 시에라를 닮아 외모 하나 만큼은 쓸 만한 아들이었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못 하겠다’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던 죽은 아들을 떠올리자 그때의 짜증이 다시금 샘솟는 것 같았다.
“유약하기로는 그놈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분명 아를이 너한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게 분명해.”
“폐기 처분 당해 죽은 제 오빠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를이 아니라 아실이에요.”
그때,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란트는 술잔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물론 이미 불명예스럽게 죽은 사람이니 아버지께서 따로 기억하실 필요는 없는 이름이지요. 어머니와 저도 늘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록사나는 아까와 같은 얼굴로 얕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아실이 죽은 후에 제가 내놓을 만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건 맞지만, 그저 시기가 공교롭게 맞아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란트는 지금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차갑게 식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실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니, 그가 살아 있든 죽었든 그것과 상관없이 현재의 제가 서 있는 곳은 어차피 이 자리였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록사나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모습이 오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그리체의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자세였다.
“전 자랑스러운 아그리체이자, 존경하는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많이 닮은 딸이니까요.”
란트는 록사나의 말에 동의하며 만족스럽게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록사나가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 * *
“그만 나가 봐도 좋아, 에밀리.”
“예, 아가씨.”
방으로 돌아온 록사나는 여느 때처럼 에밀리가 들고 온 오늘치의 독을 섭취한 뒤 그녀를 내보냈다.
어쩐지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침대에 누워 곧바로 잠들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하루는 이대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팔랑.
허공에 나타난 나비 두 마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록사나에게 날아왔다. 전에 서쪽 경계에 보냈던 나비들이었다.
“왔구나.”
앞으로 손을 내밀자 그들은 록사나의 손가락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래, 뭘 발견했니?”
나비 한 마리가 자신이 서쪽 경계에서 보았던 광경을 록사나에게 공유해 주었다.
고요한 검은 숲.
붉은 삭월.
잠에서 깨어난 까마귀들의 울음소리.
풀잎을 흠뻑 적신 핏물.
도륙 난 시체.
그 사이에 홀로 우뚝 선 검은 머리의 남자.
“……!”
덜컹.
어느새 록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손가락 위에 앉아 있던 나비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때문에 나비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하지만 록사나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이 선명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도륙 난 시체들 사이에 사신처럼 서 있던 남자는 분명 록사나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란트 아그리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자 월례 평가 때마다 부동의 1위로 대만찬에 빠짐없이 참석해 온 괴물 같은 남자.
데온 아그리체.
그가 돌아왔다.
5. 길들여진 자는 누구인가
아침부터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데온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줄곧 그랬지만 오늘 아침은 특히 더했다.
나비가 서쪽 경계에서 그를 보았던 날과 내가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까지는 시간 차가 있었으니 아마도 오늘 중이나 내일쯤 아그리체에서 데온을 볼 수 있게 될 터였다.
나비가 공유해 주었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리자 절로 입 안에 욕이 고였다.
데온의 앞에 죽어 있던 이들은 카시스를 찾으러 온 페델리안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렸다.
젠장. 이런 식으로 한발 늦고 말다니. 설마 란트가 데온에게 시켰다는 일이 경계의 청소였나?
하지만 그 면적 넓은 경계 중에 하필이면 서쪽에서 데온과 마주칠 줄이야.
재수가 없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뭐지? 할 말이 있으면 해.”
내 심란한 마음이 겉으로도 드러나 보였는지, 카시스가 여느 때처럼 서늘한 듯 담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는 오늘따라 목줄이 불편한 듯 목덜미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의연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카시스…….”
하지만 첫마디를 내뱉자마자 그냥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직은 그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페델리안에서 카시스를 찾는 일을 이대로 포기할 리는 없었으니, 앞으로 경계 부근의 정찰을 강화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듯했다.
“빨리 나아.”
그래서 그저 그렇게 말하고 말자, 카시스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이상한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 * *
투둑. 투두둑…….
부화실에 있는 독나비 알에게 피를 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더니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빗줄기가 가늘어 이대로 맞고 가도 될 것 같았다.
옆에 에밀리라도 있었다면 비를 막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앞장섰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아그리체의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서 혼자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방문 밖으로 나설 때마다 하녀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마리아 같은 경우가 오히려 특이한 것이었다.
비에 젖어 든 초목에서는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나는 그 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 맞아. 지금은 카시스의 방으로 갈 시간이 아닌데.
지난번 제레미의 말을 들은 이후, 부화실에 다녀오는 시간을 바꾼 참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던 탓인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카시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비를 맞아서 머리와 옷도 젖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꼴로 카시스를 찾아가려고 하다니. 그냥 다시 방으로 가야겠다.
내가 이렇게 정신을 다른 곳에 빼 두고 있었던 이유는 명백히 데온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저조해졌다.
저벅.
그때, 불현듯 등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위치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눈치채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내 허용 범위 안에 들어온 뒤였다.
조금 전 밖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흐린 풀 냄새가 일순간 코끝을 스쳤다.
다음 순간, 온통 흑백 일색인 남자가 물에 번진 듯이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뚝. 뚝.
그와 내 몸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물이 얼룩처럼 바닥에 점점이 고였다.
어느새 다가와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남자는 얼어붙은 호수에 홀로 우뚝 솟은 고목 같았다.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감했다. 나를 둘러싼 배경이 어느 덧 서리 낀 겨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소년에서 탈피해 완전한 청년이 된 남자가 여느 때와 같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시린 얼굴이 새까만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유독 희게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농도가 아까보다 확연히 짙어진 것을 느끼며 입술을 벌렸다.
“데온.”
그 순간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에 기묘한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날 뻔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앞으로 뻗어진 데온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피부 위로 차가운 체온이 번지는 느낌이 선득해 나는 움찔 눈매를 떨었다.
꼭 뱀이 내 팔을 기어 올라와 똬리를 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데온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여기.”
이어서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낮은 음성이 지나가듯 귓가를 스쳤다.
“왜 다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