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54)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54화(54/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54화
* * *
머저리 같은 인간.
록사나는 멀어지는 폰타인을 보며 싸늘하게 비소했다.
폰타인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쉬워서 시시할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꿈만 허황돼서는 란트 아그리체의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탐내기까지 하다니.
폰타인은 주제 파악을 못 해도 너무 못 했다.
‘너는 훌륭해.’
‘네가 데온보다 훨씬 뛰어나.’
‘그런 너를 몰라주는 아버지가 나쁜 거야.’
록사나가 옆에서 계속 이렇게 속살거리니 정말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 참, 꼴사나운 것도 정도껏 해야지.
물론 그녀가 폰타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에는 그런 멍청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정말이지 같잖기 짝이 없었다.
감히 제까짓 게 누구를 탐내고 있는지 알기는 한 걸까?
“누나, 저 새끼 눈깔 뽑아 버리면 안 돼?”
그때, 록사나의 뒤쪽에 있던 나무 중 하나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록사나와 같은 하얀색 털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는 올해 열여덟 살로 막 성인이 된 제레미였다.
어느새 소년에서 청년이 된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불만이 어려 있었다.
록사나와 동행한 제레미는 폰타인의 등장 후 그녀의 명령에 따라 잠시 기척을 죽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폰타인이 록사나를 더러운 눈으로 훑어보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나중에. 본인 인생이 바닥을 치는 순간 정도는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해 줘야지.”
록사나가 불쾌감을 표하는 제레미를 향해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자애로운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레미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쯧 혀를 찼다.
“저 병신은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 하네.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하나인지 둘인지도 파악 못 하는 비루한 몸뚱이로 어디서 잘난 척이야. 토 나오게.”
록사나도 제레미의 말에는 동감이었다.
그러다 문득 록사나의 시선이 아까 폰타인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그래……. 폰타인이 돌아왔다는 건 지금 저택에 데온도 와 있다는 의미구나.
록사나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아그리체의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자, 제레미.”
“응, 누나.”
* * *
저택으로 돌아온 록사나는 란트 아그리체의 부름을 받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제레미는 먼저 방으로 돌려보냈다.
지금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지만, 제레미와는 한때 서먹해졌을 때가 있었다.
3년 전에 아그리체에서 있었던 카시스의 탈출 미수 사건과 관련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 록사나는 처벌의 방에서 나온 제레미에게 다시 다정하고 상냥한 누나로 돌아갔다.
제레미 역시 다른 아그리체의 사람들처럼 장난감에 질린 록사나가 카시스를 독나비의 먹이로 주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제레미도 한결 더 살가운 태도로 록사나를 대했다.
제레미와 전에 없던 거리감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 제레미는 열다섯 살의 마지막 월례 평가를 남겨 두고 있었다.
록사나는 하루 전날 그를 찾아가 ‘이번 월례 평가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망설이지 말고 반드시 시험관이 명령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제레미는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 록사나에게 의아함을 표했지만 결국 알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다음 날 해 질 무렵, 제레미는 몹시도 희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마치 도망치듯이 시험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알려 주기 위해 뒤따라 나온 시험관을 벌게진 눈으로 쏘아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피 묻은 칼을 그에게 던져 공격했다.
그 후 제레미는 다시 처벌의 방에 갇혔다.
일주일 후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전처럼 록사나에게 엉겨 붙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록사나를 볼 때마다 흠칫해서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록사나를 향한 눈동자가 어찌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지, 제레미의 심적 동요가 그녀에게까지 전해져 올 정도였다.
록사나는 제레미가 그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폐기 처분 소식이 없는 것은 제레미가 무사히 시험을 치러 냈다는 의미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내가 누나를 죽였는데, 그래도 내가 누나 옆에 있어도 괜찮다는 거야?”
제레미의 방황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를 찾아갔을 때, 제레미는 자신을 붙든 록사나의 앞에서 죄지은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저렇게 횡설수설했다.
“제레미, 내 착한 동생. 네게 그러라고 시킨 건 나잖아.”
록사나는 그런 제레미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넌 그저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준 것뿐이야. 그리고 어차피 그건 환영이었어. 넌 날 죽인 게 아니야. 자, 봐. 난 이렇게 멀쩡히 네 앞에 살아 있잖아.”
“하지만…….”
“제레미, 네가 해내지 못했다면 죽는 건 너였을 거야. 만약 그랬다면 난 무척 슬펐겠지. 그러니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을 필요 없어. 난 진심으로 네가 잘했다고 생각하니까.”
록사나도 이미 같은 일을 겪어 봤기 때문에 제레미가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그 후 제레미는 록사나에게 다시금 벽을 허물었다. 어쩐지 이전보다 그녀에게 좀 더 마음을 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록사나 아가씨.”
그러던 중, 란트 아그리체의 집무실로 향하던 록사나의 발길을 누군가 붙잡았다.
뒤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에라의 하녀인 베스였다.
“마님께서 록사나 아가씨와의 만남을 청하십니다. 오늘 중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상당히 조심스러운 요청이었다.
이제 시에라와 록사나는 미리 시간을 정해야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록사나는 번번이 거절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시에라와 록사나가 가장 최근에 얼굴을 보았던 것도 벌써 4개월 전이었다.
“오늘따라 나를 찾는 사람이 많구나.”
하지만 록사나는 그 공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는 지금 마리아 님과 함께 계시지 않니?”
“예, 지금은 혼자 계십니다.”
“그래, 이를 어쩐다. 나는 지금 아버지께 가 봐야 하는데.”
“그럼 그 이후에라도…….”
베스는 시름에 젖어 있던 시에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러다 혹여나 록사나가 경을 치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그래도 시에라를 생각하면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록사나는 그런 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불렀다.
“에밀리.”
“네, 아가씨.”
“마리아 님께 가서 혹시 지금 어머니께 방문해 주실 수 없는지 여쭈어보렴.”
그 말에 베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시에라를 만나지 않겠다는 에두른 거절이었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록사나는 마리아를 다시 시에라에게 붙여 놓으려 하고 있었다. 시에라가 그녀를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알면서도.
“오늘은 간만에 티 파티가 열린다고 했던가? 그래, 어머니께서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지. 그래서 혼자 따분하신 모양이구나.”
“아가씨, 그런 게 아니라 마님께서는 록사나 아가씨를…….”
“에밀리. 마리아 님이라면 어머니의 방문 요청을 거절하지 않겠지만 혹시 티 파티 때문에 망설이거든, 지금 저택에 데온이 돌아왔다는 소식도 전하도록 해.”
그러자 무어라 항변하려던 베스의 입이 다물렸다.
록사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랐다. 베스는 이제야 록사나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했다.
“베스. 난 너 같은 아이를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무엇이 주인을 위하는 길인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렴.”
명령을 받은 에밀리가 먼저 자리를 떠난 뒤 록사나는 베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일로 나를 계속 귀찮게 한다면, 어머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네게 물을 거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서늘한 음성에 베스는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록사나 아가씨.”
록사나는 그런 베스를 뒤로한 채로 멈추었던 발길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가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도록 해. 그게 네 역할이잖니.”
베스는 록사나의 명령을 따라 조용히 뒤돌아섰다.
다행히 이번 하녀는 말귀를 꽤 잘 알아들었다. 한동안 눈여겨보다가 반년 전 어머니인 시에라의 옆에 직접 붙여 두었던 보람이 있었다.
록사나가 원하는 것은 진심으로 시에라를 위하면서 그녀의 안위를 위해 눈치껏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에라는 아그리체의 안주인답지 않게 여전히 상냥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저택 내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사용인들이 많았다. 베스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베스는 예전에 마리아의 하녀로 있다가 티 파티 날 다기를 깨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에라의 간청으로 구사일생한 뒤, 베스는 시에라를 은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라면 록사나의 기대대로 시에라를 잘 보살필 것이다. 록사나가 마리아를 굳이 시에라의 옆에 붙여 놓으려 하는 이유도 깨달은 것 같았으니까.
똑똑.
마침내 란트 아그리체의 집무실에 다다라 록사나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여전히 지긋지긋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록사나는 유순하게 웃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마치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을 물어뜯을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날카로운 독니가 그녀의 안에서 소리 없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