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57)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57화(57/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57화
* * *
화합회의 이틀째.
내 하루는 어제와 비슷했다. 하지만 아그리체에서도 워낙 혼자 있는 게 일상이다 보니, 이렇게 방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별로 심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은 낮에 잠깐 테라스에 나와 바람을 쐬며 다과 시간을 가졌다.
겨울이기는 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던 아그리체에 비하면 이곳은 거의 초봄처럼 따뜻했다.
“저, 아가씨. 오늘도 방에만 계실 건가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애가 달은 분들이 많아요.”
그러던 중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용인 중 하나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말에 다른 사용인들도 하나 둘씩 내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내가 테라스에 나와 있는 동안 방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느긋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글쎄,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작년에도 밖에 나가 있어 봤자 아무도 나한테 다가오지 않던걸.”
“그건…….”
내 말에 사용인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내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 미모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물쭈물거리는 사용인들을 뒤로한 채로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헉!”
그러다 불현듯 밑에서 사람들이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쩍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내가 나와 있는 테라스 밑을 막 지나가는 중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걸음을 멈춘 채 나를 올려다보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 아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려다보니 그 속에는 적의 가스토르 가문의 류자크도 있었다.
작년보다 조금 짧아진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서 잘게 흩날렸다. 눈꼬리가 약간 사납게 올라간 눈동자는 탐스럽게 익은 포도색이었다.
오늘 아침에 막 위그드라실에 도착했다고 하더니, 지금은 오찬을 마치고 다시 옆 건물로 이동하고 있던 중인 듯했다.
류자크는 이번에도 나를 보고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 참, 내가 자기한테 뭘 했다고 저런담. 까탈스러운 남자 주인공 같으니라고.
“뭐야, 넌 뭔데 그렇게 우리 누나를 야려보고 있어?”
바로 그때 제레미가 등장했다.
어제부터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것 같더니, 이제야 겨우 시비를 걸 자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나를 노려보던 류자크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내렸다.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그러는 넌 뭐지?”
서늘한 시선이 제레미에게 날아가 박혔다.
“너도 아그리체 소속이냐? 말본새가 상당히 건방지군.”
아닌 게 아니라, 제레미는 정말 대놓고 싸움을 걸고 있었다.
물론 남자 주인공 중에 하나인 류자크가 이런 노골적인 도발에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흥. 내 말본새 가지고 지랄하기 전에 네 눈깔 단속이나 잘 하든가.”
“애송이, 그 혀를 도려내야 입을 닥칠 테냐?”
……아닌가? 설마 지금 싸우려는 건가? 왠지 그런 분위기인데.
“제레미. 그만하고 이리로 올라와.”
나는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제레미를 단속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입을 열자 밑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 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레미와 류자크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다행히 제레미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찬 뒤 곧장 발길을 돌렸다. 류자크는 그런 제레미를 황당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동생이 저를 아끼는 마음에 실례를 저질렀네요.”
내 말에 류자크의 찌푸려진 눈이 잠깐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곧 그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내게 말했다.
“저런 손 많이 가는 애송이가 동생이라니 피곤하시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섞는 것은 처음인데 의외로 정중한 어투였다.
“먼저 저에게 무례를 저지른 이들에게만 사나워질 뿐, 원래는 귀여운 아이랍니다.”
물론 이어진 내 말에 다시금 마주한 얼굴이 구겨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를 보자마자 대뜸 먼저 인상을 찌푸렸던 게 무례라는 사실은 인정하는지, 류자크는 내 말에 무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뜻밖에도 그는 내 지적에 약간의 난색을 표했다.
나는 그런 류자크를 보며 설핏 웃었다.
내 미소를 본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실례하겠어요. 결속과 화합을 위한 자리이니만큼 남은 기간 동안 뜻깊은 시간 보내시기를.”
위그드라실에서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을 남기자 류자크는 또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돌아서는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날 저녁 만찬 전에, 황의 베르티움의 수장과 청의 페델리안에서 온 사람들이 성에 도착했다.
노엘 베르티움은 인사도 없이 곧바로 방에 틀어박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페델리안에서는 수장인 리셸과 올해로 성인이 된 그의 딸 실비아가 함께 참석했다.
이로써 백의 마수사인 오르카를 제외한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었다.
실비아가 이번 모임에 참석한다는 소식은 나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참이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드디어 여자 주인공의 등장인가.
나는 란트와 함께 페델리안의 수장인 리셸을 보러 갔다.
막 1층에 도착했을 때, 반대쪽 계단으로 사라져 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잔상처럼 시야에 남은 긴 머리카락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것과 닮은 은색이었다.
“왔군, 리셸 페델리안.”
귀에 울리는 란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내렸다.
란트의 인사는 인사가 아니라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작년에도 그는 리셸에게 먼저 다가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란트 아그리체.”
견고하고 묵직한 바위 같은 느낌을 풍기는 중년 남자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지 그의 얼굴은 카시스 페델리안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카시스가 얇은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느낌이라면, 리셸 쪽은 좀 더 굵은 붓으로 대범하게 그려진 느낌이었다.
카시스와는 색이 다른 싸늘히 식은 벽안이 가장 먼저 란트 아그리체에게 닿았다.
“청의 수장님을 뵙습니다.”
그 후 리셸의 눈길은 인사하는 나를 짧게 스친 후 다시 란트에게 못 박혔다.
실비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역시 조금 전에 계단 위로 사라진 사람은 그녀가 맞는 모양이었다.
리셸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차디찬 눈빛을 한 채 란트를 응시했다.
리셸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걸음한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느끼고 멈칫했다.
개중에는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란트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입매를 비틀며 먼저 리셸에게 이죽거렸다.
“여전히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낯짝이군그래.”
“각겨 주고 싶은 낯짝으로 친다면 자네만 하겠나. 거울을 보라고 말해 주고 싶군.”
의외인 건, 리셸도 서늘한 목소리로 란트를 마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란트가 불이라면 리셸은 물, 란트가 끓어오르는 용암이라면 리셸은 차갑게 얼어붙은 심해에 가까웠다.
리셸의 말에 얼굴을 구겼던 란트가 다시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자네 딸도 함께 왔다지? 그동안 그렇게 페델리안 안에서만 싸고돌더니 어쩐 일로 이번에는 밖으로 데리고 나왔나?”
정말 취향 나쁘네.
란트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는 카시스의 일 이후로 딸인 실비아를 페델리안 안에서 각별히 보호 중인 리셸을 조롱하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는 리셸 페델리안에게 카시스의 안부를 묻는 졸렬한 짓거리를 했었다.
아마 화합회만이 아니라 수장들끼리 따로 만나는 자리에서도 늘 이런 식으로 카시스의 이야기를 꺼내 리셸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란트는 카시스를 납치해 왔던 장본인인 데다, 또 카시스가 내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셸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악취미라고 할 만했다.
물론 란트의 생각과 달리 카시스는 멀쩡히 살아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리셸의 분노가 수그러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란트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었고, 리셸은 앞으로 한평생 그것을 잊지 못할 테니까.
나는 피부가 아리도록 날카롭게 얼어붙은 공기를 느끼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청의 귀공자께서는 올해도 함께 오지 않으셨네요.”
생긋 웃으며 건넨 말에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느낌의 벽안이 내게 미끄러졌다. 동시에 옆에 있던 란트에게서 저열한 희열이 전해져 왔다.
“……다른 공무로 바빠 늦을 것 같다는군.”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던 리셸이 마침내 짧은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그에 란트가 큭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작년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자네 아들의 잘난 얼굴을 본 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났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공무이기에 몇 년씩이나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는지 궁금한데.”
하지만 리셸은 란트의 비아냥에 반응을 보이는 대신 그저 나를 미동 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리셸을 올려다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래요. 늦으시는 것뿐이라니, 그럼 남은 기간 동안 기대를 품고 기다려야겠군요.”
“그래, 나도 기대하지. 이번 화합회 때는 꼭 자네의 귀한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란트가 비릿하게 웃으며 내 말에 동조했다.
그와 나는 리셸 페델리안을 뒤로한 채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병신 새끼. 죽어서 살점 하나 안 남은 놈을 무슨 수로 데려오겠다고 아직도 저리 같잖은 허세를 부리는지.”
“그래도 애쓰는 모습이 재미있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조금 전의 일을 다시금 되새기는지, 돌연 란트가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나도 그런 란트의 옆에서 덩달아 즐거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