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64)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64화(64/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64화
* * *
록사나의 시선은 줄곧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 해가 완전히 저문 하늘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대대로 아그리체의 수장들이 사용해 온 집무실이었다. 이곳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란트의 소유였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집무실에는 란트가 간간이 피우곤 하던 각성제의 매캐한 향이 배어 있었다.
록사나는 손을 움직여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붉은 술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란트의 집무실에서 그가 사용하던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기분은 퍽 각별했다.
록사나는 느긋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금 막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향해 말했다.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하지만 데온은 언제나처럼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록사나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걸음을 옮겨 오히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뭐…….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록사나도 애초에 데온이 다시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의자에 더 깊숙이 등을 기대며 데온의 접근을 허용했다.
“한 잔 줄까?”
기분이 좋다는 말은 사실인지, 록사나는 드물게도 데온에게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데온은 서늘히 거절했다.
“필요 없어.”
“그래? 아쉽네. 이런 기회는 오늘뿐일 텐데.”
데온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 안은 창밖에서 새어드는 엷은 빛을 제외하고는 어둑했다. 하지만 데온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록사나도 데온의 눈길이 박힌 곳이 어디인지를 눈치챘다.
“알아보는구나.”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록사나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아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위에 걸치고 있는 겉옷은 어디로 보나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카시스가 준 거야.”
록사나가 드레스 위로 입고 있는 것은 남성용 외투에 품이 상당히 컸다.
옷깃을 좀 더 제대로 여미자 여린 몸이 거기에 반쯤 파묻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음에 들어서 입고 있었지.”
로사나는 그 상태로 데온을 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나빠?”
데온은 대답 없이 그녀에게 냉랭한 눈길을 보냈다.
위그드라실을 떠나기 전에 만났던 카시스 페델리안.
지금 록사나와 데온이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였다.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아직도 조금 신기하단 말이지. 이제는 거의 날 볼 때마다 화를 내는 것 같은데.”
록사나는 나른한 어조로 속삭이며 다시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데온은 그런 그녀를 여전히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러다 곧 데온이 느리게 입술을 벌렸다.
“아실을 죽인 걸 후회하지 않아.”
우뚝.
막 술잔에 닿은 손길이 멈추어졌다.
록사나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취를 감춘 것은 미소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난 망설임 없이 그놈을 또 죽일 거야.”
실낱같은 희미한 감정마저 모조리 증발된 그녀의 얼굴에는 버석거리는 건조함만이 남았다.
“다만 이번에는 네가 보는 앞에서 직접 그놈의 목을 치겠지.”
한없이 차분하고 단조로운 음성이 적막한 집무실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넌 고작 환영 따위를 보고도 그 정도로 동요했으니까.”
“…….”
“그럼 만약 진짜 아실이 죽는 모습을 네 눈으로 보게 되면 어떨까?”
어둠에 묻혀 나지막하게 읊조려지는 데온의 음성은 한편으로는 혼잣말처럼도 들렸다.
“난 그게 늘 궁금했어.”
록사나는 뜨거운 분노도, 날카로운 증오도 어리지 않은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집무실 안의 공기는 냉랭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에 비할 바 없이 차디찼을 두 사람의 얼굴에 오늘은 북풍보다 싸늘한 한기가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 손으로 이미 아실을 죽여 버린 것에 아쉬운 마음마저 들더군.”
데온은 록사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지. 그놈은 이미 죽어 버렸으니. 그래서 그 다음으로 나는 네 어머니를 네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싶어졌지.”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이런 소리를 꺼낸 것도 아니었다.
“너도 그걸 알기에 네 어머니를 보호하는 역할을 내 어머니에게 맡긴 거겠지.”
록사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찌 보면 이 아그리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날, 넌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고 했지.”
두 사람의 기억이 3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지금 매여 있는 이 늪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그 날로.
“하지만 우스운 일이야. 나조차 모르는 걸 네가 알고 있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누가 알았을까. 그들의 미래에 오늘이 있을 것이라고.
록사나조차 그 당시에는 이런 순간을 상상하고 있지 않았다.
란트 아그리체를 몰아내고 그의 집무실에서 데온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오리라고는.
아마도 그것은 데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득 바깥에서 어수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만약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록사나를 찾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제레미가 그녀가 미리 당부한 일들을 잘 이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록사나는 느리게 시선을 내리 깔았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조금 닮은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기다란 속눈썹이 창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불빛에 작게 반 짝였다.
록사나의 눈은 유리잔 안에 고인 붉은 액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이 시궁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악해 온 이유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어.”
이상한 밤이었다.
아니, 어쩌면 특별한 밤, 혹은 특이한 밤이라 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분명 오늘은 그녀가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하루라 할 만했고, 이제 막 시작된 이 밤은 그 어느 때보다 긴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었다.
“사실 그렇잖아. 단지 난 아실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밤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록사나와 데온도 서로에게 겨누고 있던 날카로운 가시를 꺾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최후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아.”
조금 전 데온이 그랬던 것처럼 록사나의 목소리도 어떤 의미로는 혼잣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에는 화자와 청자가 뒤바뀌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아마도 난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이런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차분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록사나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고요한 빛을 띤 데온의 눈동자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알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데온이 대답했다.
록사나의 얼굴에 어스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사실 난 이런 순간이 되어서도 아직까지 헷갈리는데.”
바깥이 아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동할 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걸 주면.”
한결 짙어진 어둠 속에서 데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나한테 내가 바라는 걸 줄 수 있는 건가.”
록사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온은 마주한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처음에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먼저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록사나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둠에 먹힌 밤.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았다.
살랑.
어느덧 다가온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덩그러니 놓인 술잔 주위를 배회했다.
“시간이 되었구나.”
짧은 축하연은 끝났다.
록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데온이 빠져나갔던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다시 문이 닫힌 뒤, 차게 식은 방 안에 진득한 암흑이 깔렸다.
어느새 창밖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