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69)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69화(69/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69화
* * *
영겁, 혹은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더 흘렀다.
“결국은 골육상잔이라니 아그리체다운 말로로군.”
찰박.
카시스는 붉은 융단처럼 깔린 피 웅덩이를 밟아 목적했던 이의 앞에 섰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때였다.
카시스가 원하는 이는 기대했던 대로 아직 숨이 붙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3년 만이던가.”
나지막한 음성이 적막한 공간에 울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벽에 기대 있던 란트 아그리체가 카시스를 보고 잘게 눈매를 떨었다.
“네놈이, 쿨럭……. 어떻게 여기에…….”
입을 열자마자 배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란트를 내려다보는 카시스의 얼굴은 그저 한없이 시리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네 눈앞에 나타났는지, 그게 가장 궁금한가?”
란트의 시선이 카시스의 발치에 새로운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날카로운 검으로 떨어졌다.
끝이 아래로 향한 칼날에서 질척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기에 몇 명의 생명이 스러져 갔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란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섬뜩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너…… 역시 진짜로군. 가짜 따위가 아니야. 그럼 설마 록사나, 그년이…….”
그렇다면 카시스는 3년 전 아그리체에서 죽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록사나가 또 그를 속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록사나가 술수를 부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이미 상황은 아그리체를 뒤덮은 화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은 뒤였다.
“란트 아그리체.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줄곧 너를 지켜봐 왔다.”
스산한 음성이 란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동안 너는 네 앞에 있던 무수히 많은 기회를 내버렸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페델리안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심판자의 눈으로 란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했다.
“만약 지난 시간 동안 네게서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나 또한 망설였을지도 모르지.”
란트는 조용히 기회를 살폈다.
감히 그의 뒤를 친 것으로도 모자라서 숨통마저 끊어 놓으려 찾아온 데온을 상대하느라 기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지만 아직은 움직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시에라 그년이 말만 잘 들었어도 진작 여길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결국은 그를 혼자 적의 아가리 속에 밀어 넣고 떠나다니,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페델리안의 놈에게 맥없이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의 본성이 악함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갖지 않을 수 있으니.”
카시스가 더 가까이 접근한 순간, 란트는 섬광처럼 몸을 움직여 부러진 칼날을 그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챙!
하지만 카시스는 란트의 최후의 발악마저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란트는 손이 베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깨진 장식품의 유리 조각들을 한 움큼 쥐어 집어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카시스는 팔을 들어 망토로 유리 조각들을 전부 쳐 낸 뒤 뒤돌아선 란트의 다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아악!”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란트의 버둥거림에도 바닥에까지 박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란트 아그리체. 내가 이제부터 네게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하지 않나?”
카시스는 다리를 들어 아직도 그의 앞에서 달아나려 애쓰는 자의 몸을 짓눌렀다.
“사는 동안 네가 죄의식 한 번 느끼지 않고 저질러 온 숱한 악행들을 보니, 너를 한 번만 죽이는 것은 너무 관대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란트는 이런 상황에서도 살기 어린 눈으로 카시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카시스를 향해 퉤 침을 뱉으며 충혈된 눈을 번뜩였다.
“크윽…… 빌어먹을 새끼. 더러운 페델리안의 손에 죽을 바에는 차라리 자결을 하고 말겠다.”
그 말이 란트의 유언이었다.
그는 정말 제 손으로 가슴에 난 상처를 찢어 벌려 자결했다.
하지만 잠시 후, 어찌 된 영문인지 란트는 다시 눈을 떠 카시스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냉랭한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란트는 털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고개를 내려 보니 심장 부근의 상처가 다시 아물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 전에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후벼 팠던 감촉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다.
카시스는 란트의 피로 젖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냉소했다.
“자긍심 때문에 자결을 선택했을 리는 없고. 그만큼 두려웠나 보지?”
란트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절대로 그를 온전히 죽일 리가 없었다.
란트도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여 보았기에 카시스 페델리안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가 살아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깨끗이 자결하는 것이 더 이상의 굴욕과 고통을 피하는 방법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란트 아그리체. 나는 너를 몇 번이고 살릴 수 있다.”
잇따른 카시스의 말은 차마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하고 공포스러웠다.
“그 말은 곧, 앞으로 너를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란트의 인생에 그동안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지독한 말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란트는 새벽빛처럼 더없이 고결하고 정순해 보이는 청년의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사는 동안 언제나 포식자이고 사냥꾼이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전 처음으로 궁지에 몰린 쥐가 된 것만 같았다.
카시스가 그런 란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란트 아그리체의 뒤를 쫓아 이곳으로 향했을 때부터, 또 3년 전 미처 풀지 못한 은원을 남기고 이곳을 등져 떠났을 때부터.
화륵.
어디에선가 새어 들어온 바람에 벽에 일렬로 늘어선 촛대의 불길이 일제히 흔들렸다.
“란트 아그리체.”
검은 그림자에 반쯤 집어삼켜진 카시스는 지옥에서 올라온 사자 같았다. 앞으로 카시스가 할 일도 그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네 목숨을 받아 가겠다.”
비명을 삼킨 숨이 카시스의 손 아래에서 부스러졌다.
* * *
“퇴각한다.”
“알겠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카시스는 그의 뒤를 따라온 이시도르에게 명령했다.
목적을 이룬 아그리체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지금 막 빠져나온 건물은 불에 타고 있었고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잠시 후 카시스의 시야에 붉은 나비가 들어왔다.
카시스는 하늘로 흩어지는 붉은 점을 바라보다가 그 뒤를 쫓아 발길을 돌렸다.
“이시도르. 먼저 가라.”
“예? 잠깐…….”
이시도르가 드물게도 카시스의 말꼬리를 잡았으나 그는 이미 저만큼 멀어진 뒤였다.
카시스의 시선은 여전히 붉은 나비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