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70)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70화(70/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70화
* * *
성이 불타올랐다.
하얗게 얼어붙은 성벽이 거대한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밤의 고요는 날 선 쇠붙이가 몸을 부딪치며 우는 소리에 깨져 버렸다.
뒤엉킨 이들 사이에 울리는 비명과 고함 소리가 별 무더기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이 세계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자력으로 벗어난 적 없던 고향이 눈앞에서 망가져 불타고 있었다.
록사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간만에 진정제와 진통제를 다량 복용한 탓인지 시야가 또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대로 예민해진 청각에 침입자들이 보내는 퇴각 신호가 잡혀 왔다.
어느덧 서서히 주위의 소란이 잦아들고 있었다.
살랑.
저택에서 날려 보냈던 나비들도 한 마리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환상을 이용해 사람들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무사히 수행해 낸 나비들이 록사나에게 애교를 피우듯이 날갯짓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그리체의 몰락이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몰살이 아니었다.
아그리체의 군대를 거의 해산시키고 사용인들을 별관에 대피하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오랜만에 힘을 과하게 사용한 몸에 무리가 갔는지 검은 피가 속에서 역류해 쏟아져 나왔다.
아까 처음 나비를 꺼냈을 때부터 이미 수차례 피를 토한 탓에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하지만 록사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눈앞의 광경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란트 아그리체는 죽었을까?
페델리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목적을 이룬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아그리체는 불타고 있었고, 아그리체의 사람들은 이제 갈 곳을 잃었다.
그럼 이제 끝인가?
정말 이제 다 끝난 건가?
록사나는 다시 피가 흐르는 입가를 닦아 내며 멈추었던 발길을 뗐다.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그 밑에 깔린 마른 풀들이 새까맣게 시들어 죽어 갔다.
약해진 몸은 이제 이 정도 힘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버텨 내지 못했다.
지금도 록사나의 몸에서 흘러 나온 강력한 독의 기운이 주위의 생명을 모조리 집어삼킬 것처럼 거칠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살육 나비를 꺼내지 못하게 된 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번 사람의 피 맛을 알게 된 살육 나비는 그녀가 조금만 경계를 늦추어도 제멋대로 날뛰어대기 일쑤였다.
작년에 데온과의 임무를 실패한 진짜 이유도 제어를 잃은 독나비가 일대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힘이니만큼 차라리 독나비를 이용해 란트 아그리체도 가축을 도륙하듯이 죽여 버렸다면 일이 간단했겠지만…….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의미 없는 한 자락의 고집이었다.
공식적으로 아그리체는 지금까지의 모든 악행을 인정하고 그 죄를 처벌받아 파멸했다.
페델리안은 거기에서 정의로운 심판자의 역할이었다.
“사나 누나……!”
멀리서부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사나는 무심코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제레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앞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환상이 사라진 직후 제레미는 곧바로 나비를 쫓아 록사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록사나의 나비 때문에 피해 규모에 비해 사상자의 수는 적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제레미는 록사나의 상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록사나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결코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레미가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것이 한두 해던가?
게다가 제레미는 언제나 록사나에 대한 일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록사나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제레미는 록사나를 보고 안심했다.
비록 옷에 피가 묻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었으니까.
“누나, 여기 있었구나. 혹시 다친 데는 없는 거지?”
그녀는 어딘가로 향하다가 제레미의 부름에 그를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혼자 여기서 뭐 해.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다음 순간 마주한 록사나의 얼굴을 보고 제레미는 불현듯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록사나는 평소와 같은 듯하지만 분명 다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불현듯 기이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어떤 불길한 예감과도 비슷했다.
“누나, 혼자 어디 가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때의 제레미는 그가 느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왜 날 그렇게 쳐다봐?”
그래서 그저 불안한 마음을 속으로만 끓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꼭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읊조린 순간, 뒷덜미를 타고 선득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록사나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제레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한 그 얼굴이 제레미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입으로 말한 것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누나…….”
제레미는 비로소 록사나가 아그리체를 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줄곧 원해 왔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도.
아니……. 그는 정말로 몰랐던가.
록사나의 곁에서 거의 10년의 세월을 함께했던 그가, 정말 그녀의 바람이 무엇인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가.
그저 제레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 같았다.
록사나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는 무조건 그녀의 뒤를 따를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록사나의 눈을 보는 순간 강제로 깨닫게 될 수밖에 없었다.
“누나…… 나도 버릴 거야?”
그녀에게는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불타오르는 아그리체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제레미는 비수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록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록사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시야에 담다가 이윽고 설핏 웃었다.
“그때 네 손을 잡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이용하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러기로 마음먹은 대로 끝까지 냉정히 굴었어야만 했다.
아무리 입으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다정한 손길로 온기를 나누어 주어도, 그것이 꾸며 낸 거짓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잊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러지 못했다.
“널 옆에 두는 게 아니었어.”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진실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순간이 거짓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 붙일 곳 하나 없는 이 황무지 같은 곳에도 아주 가끔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내려서, 방심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만 정을 줘 버렸다.
“제레미.”
그렇기 때문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난 아그리체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거야.”
차라리 지금 여기에서 헤어지는 것이 두 사람에게 더 나을 테니까.
“그러니 여기까지야.”
제레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동력을 잃은 것처럼 미동 없는 몸이 애달팠지만 다가갈 수도 달래 줄 수도 없었다.
“안녕.”
록사나는 어머니와 죽은 오빠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가족이라 여겼던 이를 등지고 돌아섰다.
제레미는 그런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누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걸음이 붙들릴 뻔했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이 더욱 꼿꼿이 발을 내디뎠다.
“누나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다는 걸 알아.”
이어지는 제레미의 목소리는 분명 그녀가 늘 들어 왔던 익숙한 것인데, 어쩐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내가…… 내가 아그리체를 누나가 웃을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만들면 다시 돌아올 거야?”
록사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아까보다 작아져 있는 제레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이 일렁이며 제레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록사나는 그녀의 가여운 동생을 향해 마지막으로 웃어 주었다. 그가 좋아했던 대로 따스하고 자애롭고, 또 다정하게.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뒤돌아섰다.
그 무엇도 약속할 수 없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파멸한 아그리체의 땅을 밟고, 아직도 뒤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이에게서 멀어졌다.
폐허가 된 땅에도 훗날이나마 다시 소생하는 것들이 있을까?
겨울이 깊었던 땅에도 다시 봄이 오는 것이 당연할진대, 이곳은 록사나에게 있어 따스한 봄철에도 마냥 차갑고 춥기만 하던 곳이라 그런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유롭고 가볍게.
고작해야 이곳에서 열아홉 해를 살았을 뿐인데, 그동안 너무 많은 것에 얽매여 있던 느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을 깊이 담그고 있던 늪에서 벗어나는 기분은 몹시도 기묘했다.
완전한 해방감도, 완전한 허탈함도 아닌 애매한 감정이 반쯤 녹은 눈처럼 가슴에 질척하게 남았다.
휘이이.
쏜살같이 달리는 하얀 바람에 시야가 흐려졌다.
거기에 떠밀리기도 한 것처럼 록사나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여기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없이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을 뒤이어 누군가 받아들었다.
록사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미처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완전히 점멸하기 전, 눈보라 속의 이정표처럼 반짝이는 선명한 황금빛을 언뜻 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