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84)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84화(84/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84화
* * *
밤에 접어든 시각, 록사나는 목욕을 마친 후 창가에 걸터앉았다.
열어 둔 창문 너머에서 밀려들어 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창문을 닫지 않았다.
페델리안의 주인과 안주인은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곳에 온 날 출타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록사나는 그게 정말인지, 아니면 그저 카시스가 둘러댄 말인지 조금 궁금했다.
만약 후자라면 혹시 페델리안에서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는 나름의 입장 표명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카시스나 실비아는 그 후로도 별말이 없었다.
또 록사나가 먼저 거기에 대한 말을 꺼낼 생각도 없어서 그 문제는 결국 흐지부지 넘어갔다.
물론 독나비를 본관에 날려 보낸다면 진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카시스는 록사나가 기본적으로 알아 둬야 할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만약 무언가를 더 물어본다면 카시스는 대답해 줄 것이다.
페델리안에 도착하기 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카시스는 록사나가 바라는 것 이상의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카시스는 그날처럼 록사나가 그에게 무언가를 먼저 물어보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록사나는 식사 시간에 카시스가 잠깐 주의를 돌린 사이 몰래 챙겨 둔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팔을 그었다.
투둑…….
깊이 베인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득달같이 달려온 독나비가 금세 달라붙어 피를 빨았다.
바닥에 떨어진 피도 나비들이 알뜰히 먹어 치워서 더러운 자국은 남지 않았다.
잠시 후 록사나는 입술을 벌려 한숨 섞인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보지 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문가에 서 있는 카시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카시스는 열린 문으로 스미는 복도의 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어둠에 먹혀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카시스는 맞은편 방에 있다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는 쓸데없는 데서 눈치가 빨랐다.
“어차피 내가 죽을 때까지는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데.”
카시스는 록사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조금 열어 둔 채로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제야 카시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록사나를 내려다보았다.
“팔 이리 내.”
카시스의 손이 상처 부근을 덮자마자 벌어진 살이 메워지고 피가 멈추었다.
주위에 남아 있던 독나비들도 하나둘씩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록사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편리하네. 말끔히 나은 김에 한 번 더 그어도 될까? 한동안 먹이를 충분히 주지 못해서 지금 한 번 더 먹여 두고 싶은데.”
그녀의 팔을 붙든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마주한 카시스의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록사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오늘은 그만할게.”
카시스는 록사나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치웠다. 거기에 묻은 피도 이미 독나비가 깔끔히 먹어 치운 상태였다.
록사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그런데 당신, 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해?”
테이블 위에 나이프를 내려놓던 카시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뒤돌아서자 록사나도 걸터앉아 있던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요한 달빛이 새어드는 창문을 등지고 사뿐히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밤의 장막을 가르는 새벽의 여신 같았다.
“날 보면…….”
카시스의 앞으로 다가온 록사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가는 얼굴선을 따라 금빛 실타래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잖아.”
뒤이어 고운 손이 카시스의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마차에서처럼 다른 목적을 가져 이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거 알아?”
잠깐 아래로 내리깔렸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정면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당신 심장 엄청 크게 뛰고 있어.”
목욕 후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록사나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져 나왔다.
시야에 드러난 여린 목을 한입 가득히 깨물면 단물이 배어 나올 것 같았다.
록사나는 지금 그를 유혹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카시스를 이해하지 못해 묻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에 비친 록사나의 모든 것이 지독히도 유혹적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카시스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내 속을 모조리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의 말을 듣고 록사나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 후 그녀가 반문했다.
“그럼 내 말이 틀리다고?”
“아니, 맞아.”
카시스는 뜻밖일 정도로 쉽게 수긍했다.
그의 손이 가슴 위에 얹어진 록사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날, 네가 아그리체를 나왔을 때…….”
카시스는 움켜쥔 손을 끌어다가 손가락 끝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손을 내민 사람이 내가 아니었어도 넌 상관없었겠지.”
카시스에게 닿은 록사나의 손이 움찔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시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네가 아니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허공에서 시선이 옭아매졌다.
록사나는 얕게 호흡하며 올곧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방 안을 휘감은 서늘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창문이 열려 있는 곳은 분명 그녀의 등 뒤인데, 어쩐지 카시스가 있는 곳에서부터 버거울 정도로 큰 무언가가 떠밀려 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카시스가 록사나를 보며 부스러지듯이 웃었다.
“그저 말해 두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그때까지도 입술에 대고 있던 그녀의 손을 아래로 내린 뒤 오늘 밤의 작별을 알리는 인사를 건넸다.
“밤에는 아직 공기가 차니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
그 후 피부 위로 잔잔히 스미던 온기가 멀어졌다.
록사나는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카시스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오르카와 판도라는 비교적 빨리 구금 상태에서 벗어났다.
휘페리온에서 그들의 만행을 알고 최대한 서둘러 답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워낙 기상천외한 일을 많이 저지르는 오르카이기에 대처가 빨랐던 것이기도 했다.
예상했듯이 휘페리온에서는 오르카가 저지른 일에 골머리를 앓는 눈치였다.
아그리체의 문제로 가뜩이나 상황이 복잡한데 철없는 후계자 놈이 분간 없이 속 편하게 이런 짓을 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가문의 수장들이 위그드라실에 모두 모여 이번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참이었다.
페델리안에서는 휘페리온의 연락을 받고 오르카와 판도라에 대한 경계를 일부 거두어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르카와는 전부터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었다.
또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상대 가문과 반목할 심산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일정한 예우를 지켜야 했다.
카시스는 별관 주위에 수하들을 배치해 경비를 서게 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일단은 휘페리온과의 관계를 생각해 그들을 구금 상태에서 해방했지만 아직 경계심을 허물어뜨린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르카이기에 혹여나 카시스가 없는 사이 록사나가 있는 별관을 들쑤시고 다닐 위험도 있었다.
“밖에 못 보던 사람들이 있네.”
록사나도 별관의 안팎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녀가 차를 마시며 흘린 소리에 실비아가 설명해 주었다.
“저택 내에 위험인물로 간주되는 손님이 와 있어서요. 그래서 혹여나 별관에 접근하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거예요.”
실비아는 평소와 달리 눈가를 작게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황당한 이유로 성문을 넘은 휘페리온의 불청객들이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만찬 시간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될 것 같은데.”
이제부터 휘페리온의 두 사람을 손님으로 대우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는 카시스도 자리를 비우겠구나.”
“오빠가 없어서 아쉬워요?”
록사나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실비아가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를 향해 어쩐지 묘하게 웃고 있는 실비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만찬이 길어질 것 같으면 오빠만이라도 빨리 보낼 수 있게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실비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만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록사나는 그냥 해명하지 않았다.
그보다 페델리안의 남매와 휘페리온의 손님들 간의 저녁 만찬이라.
오르카는 화합회 때 참석하지 않았으니 오늘 저녁 만찬이 오르카와 실비아의 공식적인 첫 만남인 셈이었다.
혹시 소설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오르카가 실비아를 좋아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소설에서 그렇듯 혹여 실비아에게 뒤틀린 집착을 보이게 되지는 않을지 조금 염려스러웠다.
“실비아.”
“저기.”
록사나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실비아도 동시에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운을 뗐다.
실비아가 멈칫한 사이 록사나가 먼저 양보했다.
“먼저 말해.”
그러자 실비아가 잠깐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이 평소와 사뭇 달라 록사나는 다소 의아해졌다.
마침내 실비아가 결심한 듯이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뒤 말했다.
“저, 머리카락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