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92)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92화(92/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92화
카시스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는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의도했던 대로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흠, 크흠.”
굳은 채로 카시스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판도라가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듯이 헛기침을 했다.
“당신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 페델리안에 머물고 있었다는 손님이군요.”
그녀는 나를 알은척하며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나도 이제야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 지난번에 회랑 앞에서 만났었죠.”
내 미소를 본 판도라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아무래도 휘페리온의 사촌 남매는 내 미모에 유독 취약한 체질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학습 능력이란 게 있는지 판도라는 지난번에 비해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난 판도라 휘페리온이에요. 당신 이름은?”
“록사나예요.”
성은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판도라는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 혼자 머릿속으로 내 정체를 열심히 추리하고 있는 것이 나한테까지 느껴졌다.
무언가 짐작하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단계인 듯했다.
카시스의 시선도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내 언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 분은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리본을 돌려받고 싶은데.”
판도라가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판도라보다 옆에 있던 카시스에게서 먼저 반응이 이끌어졌다.
“리본이라고?”
“응, 그때 실비아가 머리에 묶어 줬던 거 말이야. 테라스에 나가 있다가 바람에 날아갔거든.”
“그럼 실비아에게 바로 돌려주게 하면 되겠군.”
아까부터 판도라는 카시스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시시각각 표정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록사나 양, 괜찮으면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않겠어요?”
나를 향한 판도라의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검은 독이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이상한 사람이네. 왜 날 저런 눈으로 보지?
마치 이제 막 내용물을 입에 밀어 넣기 직전이던 때에 남한테 밥그릇을 가로채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카시스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만찬장에서 카시스를 훔쳐보는 판도라에게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3년 전 아그리체에서 맨 처음 카시스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카시스에 대한 소유권은 나한테 있다고.
그리고 그와 나 사이의 연결은 우리가 떨어져 있던 동안에도 결코 끊어진 적이 없다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친분도 다질 겸 오붓하게 담소라도 나누고 싶네요.”
“단둘이 말인가요?”
“네.”
판도라는 퍽 친근한 태도로 내게 청했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도전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요, 그럼.”
그러자 나를 주시하던 카시스가 설핏 눈매를 찌푸렸다.
“나도 동행하지.”
“아니야, 당신은 바쁘잖아.”
하지만 나는 평소보다 단호한 태도로 그를 뿌리쳤다.
카시스의 눈이 일순간 가늘게 좁혀졌지만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 후 나는 판도라를 향해 나긋이 눈웃음 지었다.
“가요, 휘페리온 양.”
* * *
록사나는 ‘정말 사람이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였다.
분명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뼈와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을 텐데, 도무지 다른 인간들과 동일 선상에서 그녀를 두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그야말로 눈이 개안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이렇게 새순이 돋아난 정원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봄의 향기를 형상화하면 이런 생물체가 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내리쪼이는 햇빛마저 신성한 후광처럼 느껴졌다.
‘아니, 연적의 미모에 이렇게 감탄해서 어쩌자는 거야.’
판도라는 멍하니 록사나를 지켜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후 스스로의 뺨을 마구 후려치고 싶어졌다.
회랑에서 처음 봤을 때에도 판도라는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록사나와 카시스의 앞에서 한심하게 마물이니, 세이렌이니, 님프니 하는 소리를 지껄였던 것을 상기하면 지금도 절로 수치심에 몸서리치게 되었다.
아, 그러게 괜히 오르카 따위의 말을 들어서는.
얼마 전 만찬장에서 사라진 후 페델리안의 수하들에게 붙잡혀 온 오르카는 어째서인지 넋이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꼭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별관에서 마물 같은 여자를 봤다느니, 사람이 아니라 영물 같았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그래서 판도라도 록사나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와 비슷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고 만 것이었다.
그래, 절대로 오르카 따위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좀 전에 카시스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나요?”
아, 제길. 목소리까지 환상적이야.
이슬이 풀잎 위를 구르는 소리가 이러할까.
“압류 당했던 마물을 돌려받아서 감사를 표하고 있었어요.”
“아, 페델리안의 성문을 넘는 데 이용했다는 그 마물 말이군요.”
어떻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조물주가 록사나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느라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는 패배감마저 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완전히 규격 외라서 아예 비교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 말이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카시스와 록사나가 정답게 눈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을 떠올리면 또 속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판도라가 록사나에게 물었다.
“청의 귀공자님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요?”
“햇수로 치면 3년이 되었네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기에는 카시스 페델리안이 매우 탐이 났다.
오르카를 만나기 전에 튜로베가 들려준 바에 의하면 분명 청의 귀공자가 데려갔다는 여자의 정체는 아그리체일 텐데.
그런데 어떻게 페델리안인 카시스와 아그리체 소속인 록사나가 이런 긴밀한 관계가 된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할지, 록사나는 그녀가 한 대만 쳐도 픽 쓰러질 것처럼 몹시도 가냘프고 여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꼭 누군가 조금만 괴롭혀도 당장에 눈물 바람을 하며 시름시름 앓을 것 같았다.
판도라조차 그런 장면을 생각하자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보호 본능이 자극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난번에도 청의 귀공자가 그녀를 유리 인형처럼 조심히 안고 걸어갔던 기억이 났다.
오늘도 그의 걱정을 받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했었고…….
“당신이 너무 늦게까지 안 재워 줘서 그렇잖아.”
그 순간 또 아까 들었던 그들의 대화가 떠올라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워졌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록사나 아그리체는 보이는 그대로 상당히 연약한 여자인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겁을 주면 알아서 물러나지 않을까?
물론 카시스는 록사나를 꽤 깊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차피 남녀 간의 애정이란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럼 청의 귀공자님과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3년 전부터인가요?”
판도라가 또다시 던진 물음에 록사나의 시선이 움직여졌다.
그 후 그녀가 사르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에 판도라는 마음을 굳혔다.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시스는 내 것이었죠.”
판도라가 걸음을 멈추자 록사나도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록사나 양. 당신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난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요.”
어머, 나도 그런데.
록사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겉으로는 무구한 눈빛으로 판도라를 응시했다.
“그래서 내가 점 찍은 남자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당신이 거슬려요.”
그것 역시, 록사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 앞에서 사라져 줘야겠어요.”
판도라는 그녀의 마물을 불러 들였다.
오늘 돌려받은 보석 팔찌에서 짤랑, 유리가 부딪치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울렸다.
휘오오.
눈앞에 작은 바람이 일고 그 직후 거대한 검은 형체가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한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모습을 한 마물 듀렉투스가 록사나를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것처럼 위협적으로 입을 벌렸다.
크오오!
록사나는 판도라의 예상대로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판도라의 마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판도라의 귓가를 간질인 음성은 공포에 질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유감스러워라.”
자그마하게 읊조린 속삭임 끝에 록사나가 야트막한 숨결을 내뱉었다.
그것은 어딘가 한숨과 닮아 있었지만 그 직후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것은 꿀을 녹여 바른 것 같은 미소였다.
“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취미는 없어서.”
뜻밖에도 록사나는 정말 심히 안타깝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도 전에 눈앞의 미소가 짙어졌다.
화아악!
다음 순간 시야를 뒤덮은 붉은 잔상 속에 록사나의 모습이 파묻혔다.
“그럼 맛있게 먹을게요.”
섬뜩한 느낌을 풍기는 달콤한 속삭임이 귓가에 질척하게 달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