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to Protect the Female Lead’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95)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95화(95/25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95화
란트가 살아 있을 적에 이미 그동안의 비리와 범죄를 낱낱이 인정하는 직인을 찍어 다른 가문들에 공문서를 보내 놓은 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페델리안이 한 짓을 따지거나 이제껏 아그리체에서 해 왔던 일을 모르는 척 발뺌할 수도 없었다.
아마 그런 것은 제레미의 누이인 록사나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레미는 아그리체의 치부를 안고 가기로 했다.
제레미는 이번 위그드라실의 모임에 아득바득 참석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아그리체의 수장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쉬운 일은 절대 아니었고, 그 과정은 제레미의 입장에서는 꽤나 더럽고 추잡하기까지 했다.
‘개새끼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찍어 누르려 하는 꼴이란.’
그러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그리체의 종특이었다.
따라서 제레미도 원하는 바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속내를 숨기고 그들의 앞에서 기는 척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아마 한동안은 계속 이 굴욕을 참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리하여 록사나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할 만한 아그리체를 만들 수만 있다면.
“젠장, 눈에 뭐가 들어갔나.”
어쩐지 눈알이 따끔거리는 느낌이라 제레미는 손을 들어 벅벅 눈을 비볐다.
부스럭.
그때, 낙조가 떨어지는 지점에서 웬 소리가 들렸다.
그새 침묵에 익숙해진 탓인지 소음이 유독 크게 고막을 찔러 들었다.
혹시 또 그 괴상한 뚱보 새를 가진 여자 아니야?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제레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난번에도 제멋대로 아그리체 안에 들어와 텅 비어 있는 마물 사육장을 기웃거리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마수사인 듯했다.
발각되자마자 검은 새 형태를 한 마물을 타고 잽싸게 달아나는 통에 제레미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그 후에도 또 한 번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워낙 찰나의 일이라 그냥 착각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는데.
그게 아니라 중간에 동태를 살피러 온 거였나. 범인은 꼭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더니.
만약 지금도 그 여자가 또 겁 없이 침입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정말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제레미는 서슬 퍼렇게 안광을 빛내며 자리를 박찼다. 그러고 나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지난번에 보았던 여자가 아니었다.
“아, 뭐야. 마리아 아줌마였어?”
“어머나, 제레미구나.”
제레미는 마리아를 보고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그는 퍼뜩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꼴은 뭐야. 어디 가려고?”
마리아는 가벼운 짐을 챙겨 들고 두꺼운 외투를 걸쳐 입고 있었다.
물론 그 밑으로는 평소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데다 꼭 가벼운 산책을 나가는 것처럼 한 손에 양산을 들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지금 마리아가 어딘가 먼 길을 떠나려던 참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마리아가 여느 때처럼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시에라를 찾으러 가야지.”
그 말을 듣고 제레미는 표정을 썩혔다.
집념 한번 참…….
마리아는 아그리체의 마지막 날에 제레미가 일부러 피워 둔 수면 향을 맡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물론 그것은 혹여라도 마리아가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방비한 것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마리아는 한동안 발광을 해 댔다.
무엇보다 그녀는 록사나의 어머니인 시에라가 사라진 것에 야단법석을 떨었다.
남편인 란트가 죽고 아그리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다 데온까지 실종된 것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마리아가 시에라를 찾으며 어찌나 야차처럼 소란을 피워 대는지, 그 기세에 제레미조차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면 향을 피운 것이 자신이란 사실을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리아가 한 말을 듣고, 제레미는 그녀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이 사실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시에라 아줌마를 찾아서 뭐 할 건데?”
“당연한 걸 묻는구나.”
제레미의 물음에 마리아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변했다.
“옆에서 지켜 줘야지.”
그 얼굴이나 말투가 굉장히 천연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제레미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줌마는 데온의 생사는 안 궁금해? 일단은 아들이잖아.”
물론 제레미도 데온 따위를 걱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상식적으로 마리아의 관심사의 일 순위는 시에라가 아니라 아들인 데온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일단 말을 꺼내 보았다.
하긴, 아그리체의 사람들이 언제는 상식적이었느냐마는.
“그 아이가 어디 쉽게 죽을 애니?”
역시 마리아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데온은 자기 죽을 자리 정도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아이잖니. 하지만 시에라는 아니니까.”
이건 제레미로서도 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마리아는 아그리체에서 사는 동안 시에라의 파수꾼 노릇을 자처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나.
제레미는 마리아를 묘한 감흥이 서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아그리체 사람들의 집착은 알아줘야 했다.
“마음대로 하셔. 대신 밖에 나가는 순간부터 아줌마는 아그리체가 아니니까 쓸데없는 일에 이름 팔고 다니는 일은 없도록 해.”
제레미가 다소 정나미 없게 말했다.
기껏 새 시작을 하려는 아그리체에 똥물이 튀면 곤란했다.
“걱정 마렴. 그런 건 나도 필요 없단다.”
마리아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다 그녀가 제레미를 보며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어릴 때는 정말 예뻤는데. 아그리체 애들은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귀엽지 않아진다니까. 특히 남자애들은 겉도 속도 시꺼메져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시에라와 사나가 보고 싶구나.”
마리아는 아련한 눈빛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별안간 다시 제레미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연락하렴. 네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귀여워해 줄 테니까.”
“아, 지랄 말고 갈 거면 빨리 가!”
제레미는 버럭 소리 지르며 마리아를 쫓듯이 내보내 버렸다.
그래도 마리아는 웃는 낯으로 제레미를 등지고 아그리체를 떠났다.
긴 인사도 여운도 없이 그저 담백하고 깔끔하게.
그들에게 퍽 잘 어울리는 작별이었다.
* * *
건조하고 서늘한 사막의 모래 속에 깊이 파묻힌 것 같았다.
그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무저갱으로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방이 어둡고 고요했다.
어쩌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새까만 심해인지도 몰랐다.
소음 하나 없는 완전한 침묵의 세계.
그것은 어떤 의미로 안식과도 닮아 있었다.
놀랍게도 티끌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무의 공간이 더없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분명 낯설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영혼을 의탁하고 있는 이 공간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꿈틀거리며 몸을 뒤틀던 무형의 세계가 어떻게든 그를 뱉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곧 허공이 일그러지며 가느다란 균열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삭!
마침내 사금파리처럼 조각조각 깨진 공간이 그를 밖으로 토해 냈다.
“…….”
데온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뿌연 시야에 제대로 상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 침상인 것 같았다.
온몸이 뻐근했고, 목에서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이것은 아버지 란트에게서 입은 상처였다.
데온은 그 상태로 소리 없이 기민하게 귀를 기울여 주위를 살폈다.
희미하게 소음이 떠밀려 오는 정도를 보니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좁은 방인 것 같았다.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은 최소 셋.
바깥에서 이야기 중인 두 사람과 지금 데온이 있는 방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
지금 이 방에서 데온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작게 움직이면서 내는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작은 숨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다 문득 훅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덜컹!
깜짝 놀란 듯이 무언가를 떨어뜨린 데 이어 의자가 바닥을 끄는 것 같은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저, 정신이 드셨…….”
여인의 당혹감 어린 마음이 떨리는 음성에 실려 파문처럼 전해져 왔다.
데온은 어느덧 초점이 잡힌 눈으로 여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지금 막 의식을 되찾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또렷했다.
예기마저 품은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방 안을 훑고 지나갔다.
바닥에는 조금 전 여인이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틀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기분 탓인지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녀는 잠깐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급히 문가로 나갔다.
“잠시만요.”
여인은 데온에게 기다릴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데온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철컹.
그러나 그는 뜻한 대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팔을 움직이자마자 거친 쇳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데온의 서늘한 눈이 그의 양손을 속박하고 있는 구속구에 꽂혀 들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발목에도 똑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문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데온은 여전히 침상에 누운 상태로 싸늘하게 문가를 응시했다.
마침내 조금 전 밖으로 나갔던 여인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뒤이어 방으로 들어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데온은 저도 모르게 눈매를 움찔 떨고 말았다.
“깨어나셨군요.”
침착한 여인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그녀는 바로 록사나의 권속인 에밀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