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0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06화(106/207)
“우어, 이게 뭐야!”
당연히 나도 질겁했다.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 경악할 수밖에.
기껏해야 콧물이나 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사람들 속에서 제르카인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양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얼굴을 피로 칠갑한 채 해맑게 웃고 있으니 그게 더 무서웠다.
당연히 서둘러 의원과 신관을 불렀다.
제르카인에게 검은 사기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어디 아픈 데도 없어 보였는데 갑자기 왜 피를 흘리는 거지?
“휴우, 다행히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잠시 후 도착해 제르카인을 살펴본 황궁의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카루스는 꼭 자신이 피를 쏟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된 얼굴로 황궁의에게 따져 물었다.
“멀쩡하던 아기가 갑자기 피를 철철 흘렸는데 이상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다시 진찰해 주십시오.”
오, 제법 박력이…….
역시 자식 일에는 사람이 달라지는 건가?
늘 호구 같던 사람이 웬일로 단호하네.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셔서 이미 세 번이나 진찰해 봤지 않습니까? 확실합니다.”
황궁의는 그런 카루스를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황족의 피가 지엄했기에, 그는 마지못한 듯이 한 번 더 제르카인의 상태를 살폈다.
“신의 정원에서 부족하던 성장을 요즘 급격히 이루려다 보니 육체에 무리가 가서 연약한 혈관이 터진 겁니다. 단기간에 이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럴 만하지요.”
다행히 제르카인은 코피가 터진 것뿐이라고 했다.
얼굴 전체가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서 큰일 난 줄 알았는데, 내 옷에 얼굴을 문질러서 그렇게 보인 것뿐인가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황궁의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한동안 몸을 정양할 어린아이용 약재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황궁의가 다녀간 후에는 신관 중 아이작이 와주었다.
그는 제르카인에게 신성력 치료를 해줬다.
“아기님이 참 순하고 예쁘십니다. 신성력을 처음 접하는 어린 아기님들은 놀라서 거부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데 아주 얌전하시고요. 꼭 신성력을 많이 경험해서 이미 익숙하신 것 같네요. 허허허.”
아이작 신관이 제르카인을 살피면서 하는 말을 듣고 뜨끔했다.
제르카인은 낯선 사람을 볼 때면 낯가림을 하는 듯이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하지만 아이작 신관은 예외였다.
아무래도 제르카인은 이미 내 신성력에 익숙해져서,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신관에게도 친숙함을 느낀 것 같았다.
제르카인은 아이작에게 신성력 치유를 받은 뒤 바로 잠들었다.
카루스는 제르카인에게 정신이 팔려 아이작 신관이 떠나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아이작 신관과 인사했다.
“신관님, 오늘 제르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3황녀님. 대신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귀족들이 하나둘씩 영지로 떠나기 시작한 것처럼, 아이작도 다른 신관들과 함께 오늘 저녁 대신전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나는 은근히 궁금했던 걸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작 신관님, 모르페우스 신관님도 다른 신관님들이랑 같이 가요?”
“아마…… 모르페우스 신관님은 황궁에 좀 더 남아 계실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족분들께 초청받아 한동안 더 머물며 데메테아 여신님의 성언을 전해주실 예정이라더군요.”
아이작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는 탄신연 첫날 사건 현장에 불려와, 그때의 일을 일부나마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실에서 말한 저 이유는 핑계일 뿐, 모르페우스가 여기에 남는 게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얼핏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럼 3황녀님. 늘 옥체 보전하시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신관님도 잘 가요!”
아무튼 그날 저녁, 모르페우스를 제외한 신관들은 황성을 떠났다.
그리고 내 일상에도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 * *
“뭐? 마가렛, 지금 뭐라고 했어?”
하지만 내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날 밤 마가렛에게 들은 소식에, 엎드려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가렛이 조금 전 나한테 한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해 들려주었다.
“2황자님이 휴가차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디오메네 가문에 머물다 오실 건가 봐요. 2황자님의 놀이 친구인 세디엄 셋째 영식도 같이 갔대요. 그래서 아예 귀족들이 황궁을 떠날 때 같이 나가셨다고 들었어요.”
루벨리오가 디오메네 가문에 갔다니, 내가 한발 늦었구나!
혹시 지난 회차들과 비슷하게 일이 진행된다면, 루벨리오는 디오메네 가문에서 돌아올 때 이미 독에 반쯤 절어 상한 시금치처럼 변해 있을 게 분명했다.
원래 카루스의 형 바론이 루벨리오의 독살을 처음 시도했던 건, 탄신연 이후 루벨리오가 제 부친의 가문인 디오메네에 방문했을 때부터였다.
바론에게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없었지만 한 가지 재주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바로 약점을 잡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를 매수하는 일이다.
소설 <황녀 아스포델>과 나의 1회차 빙의 때 루벨리오는 부친인 쿤차가 황족 시해 미수죄로 대신전에 유폐당하자 크게 상심해 황궁을 떠나 디오메네 가문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된다.
내 2회차 빙의 때도 무슨 이유에서든 탄신연 이후 루벨리오가 디오메네 가문에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루벨리오가 황궁을 떠났을 때, 바론은 디오메네 가문의 하인을 꼬드겨 루벨리오에게 차근차근 독을 먹이기 시작했다.
사실 바론이 기대한 건 루벨리오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그를 해치우는 것이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계획은 반쯤 실패했다.
루벨리오는 몸이 더 비실비실해진 채로 살아서 황궁에 돌아오고, 바론은 다시 황궁의 궁인을 매수해 이번에는 더 강한 독으로 루벨리오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루벨리오 녀석에게 한동안 먹고 마시는 걸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해 주려 했는데!’
지난번에 루벨리오 녀석이 내가 황궁의 침입자 때문에 다칠 뻔한 일로 은근히 나한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마음이 좀 누그러져서 루벨리오를 좀 더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왠지 이번에는 녀석도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벨리오가 너무 빠르게 디오메네 가문에 가버렸다.
‘짜식, 지난번에 보니까 바론 눈에 독기가 어렸던데 또 독 먹고 비실거리면서 돌아오게 생겼네.’
나한테 말도 없이 황궁을 떠나다니, 이 괘씸한 녀석.
물론 루벨리오가 내 허락을 받고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선심 써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아쉬운 마음에 투덜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치 못했던 일은 루벨리오의 일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 * *
“아, 아스포델. 어디 가? 이제 궁 밖으로 막 나와도 돼?”
“어엉, 가까운 데는……. 그런데 방금 뭐야?”
다음 날 우리 궁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유클레드와 마주쳤다.
멀리서 봤을 때 유클레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그는 함께 있던 상대와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왠지 가로수 밑으로 멀어지는 뒤통수가 익숙했다.
“아, 바스티온 첫째 영식. 너도 알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저 군청빛 머리칼이나 동그랗고 예쁜 뒤통수가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왜 유클레드랑 레예스가 같이 있었지?
“바스티온 영식, 아직 집에 안 갔어? 다른 가문들은 전부 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레예스는 한동안 바스티온 영지로 안 돌아가고 제도에 머물기도 했어.”
유클레드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냐, 이 녀석이 이렇게 친근하게 레예스라고 이름을 부르다니.
게다가 바스티온 영지로 안 돌아가고 제도에 있는 저택에 머문다고?
“왜? 무슨 일 있대?”
내가 궁금해서 묻자 유클레드가 짐짓 젠체하듯이 에헴, 하고 소리를 냈다.
이후 그가 자랑하듯이 꺼낸 말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바스티온 영식 말이야. 이제부터 내 친구 삼기로 했어.”
“뭐엇?!”
“이번에 탄신연 때 같이 얘기해 보니 나랑 말도 잘 통하고 여러 가지로 잘 맞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내 놀이 상대로 궁에 들어올 거야.”
유클레드의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와, 와아.
레예스 수완 보소.
이렇게 단기간에 유클레드의 놀이 친구 자리를 꿰차다니?
황족의 놀이 친구 자리는 경쟁률이 굉장히 빡세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피를 나눈 친족들 위주로 정해지는 추세였고 말이다.
“참, 알고 보니까 우리 예전에 한 번 만난 적도 있더라? 지난번에 말이야, 내가 족제비들한테 공격받는 황궁 손님을 구해준 적 있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그게 바로 레예스였던 거 있지?”
그게 이제 생각났냐?
아무튼 유클레드는 진짜 레예스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이렇게 되면 레예스는 앞으로 아무 문제 없이 황궁에 정당하게 드나들 수 있게 된다.
즉, 나와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