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08)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08화(108/207)
“켁.”
하지만 곧 나는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디오메네 가문에서 돌아온 뒤 며칠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루벨리오를 본 직후에 한 생각이었다.
“오늘 여유 시간이 되는 인원은 이게 다인가?”
탄신연도 끝나 오랜만에 황족들 간에 다과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늘 자리는 쿤차가 마련했다.
아들인 루벨리오가 황궁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이런 모임을 준비한 듯했다.
“다들 뭐가 그렇게 바빠서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낼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구먼. 우리 루벨이 황궁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기쁜 날이기도 한데 이것 참 서운하게.”
그러나 막상 참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부군 중에서는 쿤차를 제외하고 아직 그의 초대를 거절할 짬이 안 되는 5부군 카루스만 초대에 응했다.
오늘은 우리 아버지도 신수 둥지 쪽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
아이 중에서는 루벨리오와 가장 친한 3황자 헬리만과 내가 가는 곳이면 대부분 빠지지 않는 1황자 유클레드만 참석했다.
그러니 쿤차의 처음 계획과 달리 참으로 조촐해진 다과회라 할 수 있었다.
“저, 저도 아까 다른 부군님들과 우연히 마주쳐서 잠깐 인사만 나누었는데, 정말 바빠 보이시더라고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많이 아쉬우실 거예요. 그래도 저는 한가한 편이니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뭐……. 자네는 좀 바빠도 되는데 말일세.”
카루스의 말에 쿤차가 떨떠름한 눈길을 보냈다.
쿤차는 그냥 예의상 카루스를 초대했을 뿐인데, 다른 부군들도 없는 자리에 그가 눈치 없이 와서 기분이 언짢은 듯했다.
“아니에요, 쿤차 님! 제가 다른 부군님들처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쿤차 님이 불러주셨으니 꼭 와 봐야지요.”
하지만 카루스는 쿤차의 속마음도 모르고 해맑게 말했다.
“마침 저희 형님이 오셔서 제르도 잠깐 맡기고 와서 괜찮아요.”
‘어이구, 결국 그대로 진행되는구나.’
카루스의 말을 듣고 인상을 썼다.
원래 오늘 다과 모임은 바론이 루벨리오에게 막타로 독을 먹이려 시도하는 날이기도 했다.
‘루벨리오에게 독을 먹이는 날 굳이 성공하는지 확인하려고 황궁에 들어오다니, 역시 멍청해.’
[우와. 저 딸기 머리 녀석, 오늘 되게 시꺼먼데?] [그러게. 진짜 아스포델 말대로 이따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내 무릎 위를 한쪽씩 차지하고 앉은 족제비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포델, 얼굴이 왜 그래? 혹시 더워? 마석 기능을 좀 더 강화해 볼까?”
옆에 있던 유클레드가 내 떫은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니, 여기서 마석 기능을 더 강화하면 완전 드라이아이스잖아.
유클레드의 말대로 지금 테이블 주변에는 냉각 효과가 있는 마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여름이지만 시원하게 다과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3황녀님, 더우신가요? 1황자님 말씀대로 마석을 더 강화할까요?”
유클레드의 목소리가 꽤 커서 카루스도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뭘 그러나? 원래 아이는 땀도 좀 흘리면서 자라야 하는 법일세.”
하지만 카루스와 나를 거의 동급으로 못마땅해하는 쿤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루벨리오의 얼굴을 확인한 쿤차가 보인 반응은 내 기분을 더 썩어들어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니, 루벨리오!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냐? 혹시 너도 더웠던 게야?”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아버지.”
“괜찮긴! 우리 귀한 아들이 이렇게 시든 파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여봐라! 당장 마석의 온도를 더 낮춰라!”
쿤차는 대번에 궁인을 시켜 마석의 냉기가 더 강하게 나오도록 조정했다.
나는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다가 옆에 있던 유클레드에게 말했다.
“오빠, 방금 쿤차 아부지가 어린애는 땀을 흘리고 자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랬지. 루벨리오의 땀은 제외인 모양이네.”
“되게 치사하다, 그치?”
“그러게. 2부군님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치사하시네.”
유클레드와 내가 들으란 듯이 속닥거리자 쿤차가 움찔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그가 헛기침하며 변명했다.
“크흠, 방금 아스포델도 덥다고 한 게 생각나서 겸사겸사 온도를 조절한 거란다. 혹시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려무나.”
하지만 유클레드와 나는 이미 차게 식은 눈으로 쿤차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강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마석의 옆에서도 루벨리오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루벨, 너 진짜 오늘 어디 아파?”
“그냥 속이 좀 별로라서 그래.”
3황자 헬리만도 벌써 테이블 위의 과자를 집어 먹으며 루벨리오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루벨리오는 애써 괜찮은 척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까부터 그의 얼굴은 허옇게 떠 있었다.
쿤차는 그냥 더위를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회차 때는 디오메네에 더 오래 있어서 그런가? 상태가 지난 회차들에서보다 안 좋아 보이네.’
곧 다과회가 시작되고 참석자들 앞에 찻잔이 놓였다.
그런데 내 시중을 드는 궁인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불안하게 나와 족제비들을 힐끔거리는 눈빛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아, 맞다. 요즘 외출을 거의 안 해서 몰랐는데 밖에 나랑 족제비에 대한 묘한 소문이 돌고 있댔지.’
뭐, 내가 마수를 좋아하고 사나운 족제비들을 키운다는 소문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거기에 우리 족제비들이 사실 정체를 숨긴 마수라는 소문까지 더해졌다고 했다.
‘메리엘이구먼. 고 입 가벼운 계집애.’
게다가 내가 신의 축복을 받은 데다, 라 벨리카 황제에게 혼자 마수 박제품 선물까지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요즘 건방져져서 제멋대로에 오만하게 군다는 소문까지 은근히 퍼져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분명 메리엘이 원흉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런 소문들에 귀도 가렵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저 비슷한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른 의미로 저 소문에 관심이 가는 편이었다.
‘이번 회차 컨셉으로 나름 괜찮은데……?’
1회차는 순진하고 해맑은 햇살 황녀님 흉내를 내다가 나랑 어울리지 않아서 실패했다.
2회차 때는 신뢰와 믿음의 황녀님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을 살았지만, 또 그렇게 하라고 하면 답답해서 못 해 먹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괜찮잖아? 제멋대로 사는 망나니 황녀님.’
마침 내가 이 혼종 같은 피폐 육아물 소설에 빙의하기 전에 이 바닥에서 새롭게 유행 몰이를 하던 것도 망나니 소리를 듣는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 회차에서는 머리채를 풀고, 한번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영악하게 생각해 보자.
이미 이전 생들에서 직접 경험해 본 적도 있지 않던가?
아홉 개를 잘하다가 하나를 못하면 다들 너한테 실망했다느니, 역시 이게 너의 본모습이었다느니 하면서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마저 부정하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고로 원래 아홉 개를 못 하다가 하나를 잘하면, 모두 그것을 칭찬해 주게 마련이었다.
‘사실 이미 이번 회차에서는 처음부터 남들한테 잘 보이길 포기하고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해 오긴 했지.’
그러니 이왕 소문이 요상하게 난 김에 그냥 어려서부터 노선을 그쪽으로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3회차가 시작된 초반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난 달라질 거라고!
이 망할 피폐 육아물 세상에서 강하고 냉정한 한 마리의 암사자 같은 황녀가 될 거라고 말이다.
[아스포델! 저기야, 저기 2황자 찻잔에 독!] [우와, 저 새까만 것 좀 봐. 저거 한 모금이면 완전 골로 가겠는데?]혼자 진지하게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며 생각 중일 때, 족제비들이 소리쳤다.
나도 루벨리오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우, 진짜 시꺼머네. 오늘 저거까지 먹으면 진짜 위험하겠는데?’
“루벨리오, 오늘따라 기운이 없는 것 같구나. 동방에서 들여온 새로운 간식이 많이 있는데 맛보지 않고.”
“아……. 체했는지 속이 좀 좋지 않아서요.”
“저런, 그럼 차라도 마셔 보렴. 북방의 약차라 속이 한결 진정될 거란다.”
쿤차와 루벨리오의 저 대화도 나한테는 익숙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도 그렇겠지.
역시 루벨리오가 마지못해 눈앞의 찻잔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에서 넘실거리고 있던 독의 사기가 한 차례 흔들렸다.
평소에 날 볼 때마다 밥맛없이 굴던 녀석이라 그냥 모른 척해도 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착했다.
‘아휴. 루벨리오가 죽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또 제르카인을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바론이 대역죄를 짓게 둘 수도 없으니. 피오! 키노! 출동!’
하얗고 까만 엉덩이를 손으로 툭 치자, 내게 미리 지령을 받은 족제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으앗, 이게 뭐야!”
피오가 테이블 위에서 우당탕 한껏 요란을 떨었다.
루벨리오의 찻잔도 키노의 하얀 솜방망이 손에 맞아 날아갔다.
“이, 이! 망할 쥐새끼들이! 뭐 하는 거야! 당장 저것들을 잡아!”
전부터 내 사역마들을 못마땅해하던 쿤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나설 때로군.
좋아, 눈 딱 감고 저지르는 거다!
‘신님, 정의로운 망나니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나는 여신님께 경건히 기도한 뒤 숨을 흡 들이마셨다.
“우리 애기들 괴롭히지 마아아아아아아!”
우렁차게 소리친 뒤 무릎 위로 늘어져 있던 레이스 천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겼다.
테이블 위의 찻잔과 케이크들이 하늘을 날았다.
사람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도 연어 떼처럼 허공을 헤엄쳤다.
와장창!
쨍그랑!
평화로웠던 정원에서의 티타임은 단숨에 파국을 맞이했다.
“아, 아스포델! 이게 무슨 짓이냐!”
“화, 황녀님!”
소설에 빙의해 황녀로서의 3회차 인생을 맞이한 지 반년이 지난 한여름의 어느 날.
그렇게 나는 내 이번 인생의 방향을 확정 지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