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1)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1화(11/207)
쿤차는 히세리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위세 높은 디오메네 가문 출신인 탓인지 콧대가 높았다.
반면 카루스는 로잔티나를 받치고 있는 열 개의 기둥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한 오클란테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카루스의 입지는 썩 좋지 못했다.
오죽하면 궁인들에게도 곧잘 무시당하며 동네북처럼 잘 치이고 다닐 정도였다.
소설에서 병약 미소년 남동생이었던 4황자 놈이 우중충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온기를 준 여주인공의 껌딱지가 된 데에는 이런 환경적 영향도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악역에게 훌렁 넘어가 세뇌당해 꼭두각시가 된 것도 다 저런 환경에서 자라 약해진 멘탈 때문일 터였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일은 꼭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일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다고 착각하면 안 되네.”
“그러믄요! 어찌 제가 감히 쿤차 님을 두고 그런 주제 모를 착각을……!”
카루스는 역시 호구였다.
그는 쿤차의 말에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지 촉촉한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굽신거렸다.
“흥, 알아들었으면 먼저 가보게. 난 잠시 후에 나갈 테니.”
쿤차가 준 것을 소중히 품에 안은 카루스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난 묘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뭐야, 쿤차……. 알고 보니 겉바속촉이었나?’
두꺼운 천으로 꽁꽁 감싸져 있어 지금 쿤차가 카루스에게 준 게 뭔지는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거기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럼 진짜 쿤차가 카루스를 나름대로 챙겨준 게 맞다는 건데. 기껏 좋은 일 해놓고 말본새가 왜 저런지 몰라.’
나는 카루스를 따라가는 대신 족제비들에게 속닥거렸다.
“피오, 넌 카루스 따라가 봐. 키노는 마가렛이 이쪽으로 못 오게 막고.”
그들은 갑작스러운 심부름에 당황스러운 듯 저들끼리 몇 번 끼끼거리다가, 그래도 내 말을 따라 잽싸게 움직였다.
나는 쿤차를 다시 관찰했다.
역시나 카루스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쿤차가 인상을 쓰며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으, 왠지 이상하군. 조금 전부터 갑자기 몸이 왜 이렇게…….”
나는 덤불에 숨어 쯧, 작게 혀를 찼다.
조금 전, 뭔지 모를 물건을 주고받으며 손을 접촉했을 때, 카루스한테 옅게 배어 있던 사기가 쿤차에게로 옮겨 갔다.
그 후부터 쿤차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카루스가 뭘 알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쿤차도 참 쿤차스럽네.’
원래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작 이 정도 사기에 저 정도로 영향을 받을 리 없건만.
쿤차의 몸은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만 가성비가 좋은지, 미약한 사기를 심장이 빠르게 흡수했다.
‘아들이랑 똑같이 약골이라니까. 생긴 것도 부자가 똑같이 비실비실해서는.’
그런데 비틀거리던 쿤차가 덤불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응? 그런데 이게 뭐지? 왜 이런 곳에 마석이…….”
앗!
내가 찾으러 온 검은 마석이었다.
“이런 검은 마석은 처음 보는데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눈이 풀린 쿤차가 검은 돌조각에 홀린 듯이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도 소설에서 허브 화원에 버려져 있던 검은 마석을 줍게 되는 건 3부군 쿤차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석을 손에 넣게 되는 거였다니.
그나저나, 지금 저기에 손대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텐데?
‘에잉, 안 되겠네. 그러기 전에 내가 살짝 어루만져 줘야지.’
아직 성력 각성 전이긴 하지만 어제 카루스한테도 효과가 있었던 걸 보면, 쿤차한테도 통하겠지?
나는 벌떡 일어나 쿤차에게 와다다 달려갔다.
그는 이미 검은 마석에 홀려 다른 사람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덤불 사이로 손을 뻗는 쿤차를 냅다 들이받았다.
“얍!”
퍽!
“어억!”
내구성 없는 종이꽃처럼 팔랑거리며 옆으로 쓰러진 쿤차가 나한테 깔려 바들거렸다.
그래도 검은 마석에 손대자마자 바로 접촉을 끊어내서 그런지, 쿤차가 정신만은 금방 돌아온 듯이 소리쳤다.
“웨, 웬 놈이냐!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런 습격을……. 억!”
찰싹찰싹!
내 단풍잎 같은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쿤차는 원래도 체력이 똥인데 지금은 사기까지 흡수한 상태라 미역 줄기처럼 바닥에 늘어져 나를 떼어내지 못했다.
내 손바닥이 쿤차에게 한 번 닿을 때마다 안개처럼 뭉친 검은 사기가 흩어졌다.
‘헉, 그런데 손맛이…… 왜 이렇게 좋지?’
쿤차를 한 대씩 때릴 때마다 찰진 소리가 울리면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뱃속을 휩쓸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쿤차를 볼 때마다 손이 근지러웠던 적이 많았지!’
사실은 이런 식으로 힘을 실어 때려주는 게 더 효과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생들에서 쿤차와 루벨리오 부자가 쌍으로 얄밉게 굴면서 사사건건 나한테 시비를 걸던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양손에 감정이 담겼다.
하지만 난 그럴 만했다!
그동안 진짜 진짜 오래 참았단 말이다!
생각해 봐라.
햇살 여주 흉내를 내던 1회차 때 이렇게 쿤차를 때려봤겠나, 아니면 신뢰와 믿음의 황녀님으로 살던 2회차 때 이렇게 쿤차를 때려봤겠나?
‘헉!’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고 너무 무아지경으로 쿤차를 다지고 있었다.
‘아, 안 돼. 왠지 이 이상 하면 나도 모르게 머리채 풀게 될 것 같아!’
“이, 이런 건방진! 거기 누구 없느냐!”
그런데 내가 주춤한 새 쿤차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폐하께 말씀드려 엄벌에 처하게 할 것이, 흐어억……!”
이대로는 안 되겠구먼.
미안하지만 아저씨가 고자질하는 것보다 내 주먹이 더 빠르답니다.
난 쿤차의 사기를 골고루 털어주던 손을 야무지게 말아쥐고 그의 심장이 있는 등 부근을 짓눌렀다.
그 순간, 쿤차가 기절했다.
‘핫, 해치웠나?’
“으으…….”
하지만 역시 이런 섣부른 대사는 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쿤차가 바르작거리며 신음했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깜짝 놀라서 내 조막만 한 손으로 쿤차의 입을 한 번 더 찰싹 때려줬다.
그때에서야 쿤차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휴, 이번엔 진짜 끝났군.”
하여간에 난 너무 착해서 탈이다.
과거에 아들이랑 같이 몇 번이나 내 발목을 잡아 귀찮게 했던 사람을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다니.
게다가 어차피 이런 고사리손에 맞아봤자 간지럽지도 않을 것 아냐?
“우리 황녀님, 어디 숨으셨을까~? 이 덤불 뒤에 숨으셨을까~?”
앗, 마가렛이다.
난 얼른 쿤차의 등에서 내려와 덤불에 떨어진 마석을 주웠다.
“마가렛!”
그런 뒤 마가렛에게 달려갔다.
“어머, 황녀님? 왜 숨어 있지 않으시고…….”
키노가 마가렛에게 안겨 캬악캬악 울고 있었다.
나름대로 애썼던 것 같기는 하나, 결국 마가렛을 막아내는 미션에 실패해 억울한 듯한 모습이었다.
짜식, 그래도 용썼구나.
어쨌든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마가렛이 와도 상관없었다.
“저기, 쿤차 아부지가 쓰러져 있어!”
“헉, 네?!”
얼른 달려간 내 수행인들이 쿤차를 화원 밖으로 옮겼다.
서둘러 의원도 불러왔다.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일단 쿤차는 탈진한 것 말고는 멀쩡한 상태 같다고 했다.
당연하지, 누가 정화했는데.
“쿤차 님이 왜 수행인도 없이 혼자 화원에 쓰러져 계셨을까요? 하긴, 원래도 연약하신 분이니 또 빈혈이라도 도지신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게.”
“그래도 황녀님 덕분에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마가렛과 나는 쿤차를 궁에 옮겨 주고, 의원이 정밀 검사를 할 동안 자리를 비켰다.
원래도 몸이 허약해 주기적으로 의원을 불렀던 쿤차인지라, 다들 크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도 그에게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을 알아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번엔 검은 마석도 안 주웠으니까.’
원래 소설과 내 지난 1회차 빙의 때 쿤차는 검은 마석을 몸에 오래 지니고 있던 여파로 크게 쇠약해졌었다.
지금 시점에서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라 벨리카 황제의 탄신일까지 검은 마석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얼추 반 년은 넘게 사기에 노출되어 있던 셈이다.
작중의 소모성 악역이었던 쿤차는 그때 많은 사람이 모인 공식 석상에서 마석에 조종당해 다른 황족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
다행히 쿤차의 저질적인 신체 능력 탓에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지만, 결국 그는 몸을 회복하지 못해 겸사겸사 대신전에 거의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부친의 일로 황궁에서의 입지가 불안해진 2황자 루벨리오가 더 큰 독기를 품고 부스러기 악녀(?)에서 중간 보스급 악역으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 <황녀 아스포델>의 초반 전개였다.
‘쯧. 저놈의 악당 새싹 부자,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걸 알까 몰라.’
한 마리의 해파리처럼 하찮게 팔랑거리던 아까의 쿤차를 떠올리자 저절로 혀를 차게 되었다.
“황녀님, 그럼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갈까요?”
마가렛의 물음에 난 잠깐 고민했다.
일단 검은 마석은 수거했고, 카루스를 확인하는 일이 남았긴 한데…….
휘우오오오!
하지만 난 고민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강한 바람과 빛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어멋, 폐하와 록샨 님의 신수네요!”
마가렛의 말처럼, 황성의 결계 안으로 막 들어선 푸른 신수와 흰 신수가 눈에 띄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