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13)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13화(113/207)
더군다나 라 벨리카의 탄신일은 그들이 따르는 성좌님께서 점지해 주신 길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저 모자란 놈에게 일을 맡기는 바람에, 여신의 가장 큰 성총을 받았다는 모르페우스 신관을 손에 넣지 못했다.
앞으로 시작될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그 육신이 제격이었거늘.
“거기, 너. 폐기된 놈을 대신해 곧 다음 성흔을 입을 자를 선출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후보자들을 준비시켜라.”
“알겠습니다!”
“난 그만 이카르테 님께 가겠다.”
다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명령한 노인이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도착한 곳에서 그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몸을 낮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카르테 님, 휴식을 취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지요?”
그러나 천장에서부터 늘어진 베일 밑으로 흘러나온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크르르, 짐승들의 낮은 울음소리와 작게 입질하는 소리가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노인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베일 너머에 있는 것들이 달빛에 비쳐 그림자처럼 검은 형체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뜻 봤을 때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별개의 생물체들이었다.
한 명의 어린 소년과 그에게 길들여진 마수들.
그들이 몸을 붙인 채 몰려 있어, 어둠 속에서 그렇게 기괴한 모양으로 보인 것이다.
소년이 달래듯이 ‘쉬잇, 괜찮아’ 하고 작게 속삭이며 그에게 달라붙은 짐승들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지?”
이내 어둠의 장막 너머에서 앳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실례합니다. 일전의 대업을 실패한 사도 한 명을 방금 폐기했습니다.”
“그래?”
“하여 조만간 새롭게 성흔을 내릴 인물을 선출하려고 합니다. 이카르테 님께서 그때 힘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알았어.”
이번에도 베일 안에 있는 소년은 노인이 뭐라고 하든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직 옆에 있는 마수들에게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카르테 님. 그럼 쉬십시오.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실패했대?”
베일 안에서 평소 같지 않은 질문이 흘러나온 건, 노인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쪽 무릎을 세웠을 때였다.
“그때 네가 엄청 자신만만하게 성공할 거라고 말했잖아.”
꼭 지나가다가 그냥 한번 내뱉어 본 말인 양 가벼운 어투였다.
실제로도 소년은 방금 꺼낸 말에 딱히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은 듯, 여전히 노인에게서 몸을 반쯤 돌린 채 옆으로 팔을 뻗어 상자를 끌어왔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내 앞에서도 몇 번이나 호언장담하지 않았어?”
잠시 후 소년이 거기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수들에게 나눠 줬다.
“나야 딱히 상관없지만, 그럼 폐기한 사도가 잘못한 게 아니라 네가 실수한 거 아닌가?”
마수들이 까드득, 까드득, 단단한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뒷머리가 곤두서며 오싹 소름이 돋았다.
“뭐, 그렇다고 널 폐기하겠다는 건 아니야.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친 것과 동시에,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에 베일이 흔들렸다.
소년의 입가에 그려진 가느다란 미소가 달빛에 희게 빛났다.
그의 옆에 몸을 낮추고 있는 마수들이 작은 짐승의 뼈를 오도독 씹으며 눈을 희번득 빛내는 모습도 시야에 같이 들어왔다.
노인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얼른 다시 몸을 낮추었다.
그의 입에서 변명하는 듯한 말이 다급히 흘러나왔다.
“그것이……. 미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변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금 폐기한 놈이 한 말에 의하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어린 황녀가 신성력을 발현했다고 하는데…….”
“황녀라고?”
처음으로 소년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떤 황녀?”
“3황녀라고 하더군요.”
“아, 그 마수 박제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황녀?”
“예에…….”
노인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가 소년에게 3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니, 다른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곧 소년의 목에서 흐음,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마수를 좋아하는데 신성력을 사용한다고? 무슨 조합이 그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아까 그놈이 폐기되기 전에 자기 살 구멍을 찾으려고 되는 대로 지껄인 듯하…….”
노인은 조금 전에 처리한 회색 머리 남자에게서 들은 말을 무심코 부정하다 말고 말을 멈추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임무에 실패한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눈앞에 있는 소년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지 않던가?
하마터면 바보 같은 짓을 할 뻔했다는 걸 깨달은 노인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 그래도 설마 죽기 직전까지 거짓을 고했을 리는 없겠지요! 몸은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멀쩡한 두 눈만큼은 매우 진실해 보였습니다. 갑자기 대비하기 어려운, 큰일이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러자 베일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베일 밑으로 마수들을 쓰다듬는 손이 보이지 않았다면 혹시 소년이 이대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 정적이었다.
“궁금하네.”
그러다 잠시 후,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짙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바람에 물결치는 베일을 타고 흘러와 달빛 사이를 유영했다.
“그 황녀, 한번 직접 보고 싶어.”
노인은 그저 그가 모시는 주인의 앞에서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것은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인 열세 번째 신과 그 유일한 후손인 소년의 뜻대로 흘러가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Chapter 26
자각몽-현실 속의 꿈, 꿈속의 현실
깊은 밤, 나는 이상한 꿈속에서 눈을 떴다.
-안녕, 아스포델.
주변을 훑어보자마자 이게 현실이 아니란 걸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보니, 아무래도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각몽인 것 같았다.
내 앞에는 웬 하얀 덩어리처럼 보이는 게 서 있었다.
대충 사람 모양을 한 것 같기는 한데…….
하얀 빛 덩어리가 뭉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 같은 게 뭉쳐서 기묘한 광택을 내며 흐물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참으로 이상한 형상이었다.
그 괴이쩍음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도 인사했다.
‘안녕.’
그러자 앞에서 엷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하얀 덩어리가 나한테 다시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네. 이제는 그게 진짜 네 이름 같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한 섬찟함을 느끼며 반문하자, 은은한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원래 이름은 아스포델이 아니라 ■■■이잖아.
‘어떻게 네가 그 이름을 알아? 너 누구야?’
-좋았어? 그동안 그 모습으로 살면서 온갖 걸 다 누리고 사는 기분이 어땠어?
등줄기에 점점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우두커니 선 채 하얀 덩어리가 덧붙이는 말들을 귀에 담았다.
-네 다정한 아버지, 멋진 어머니, 좋은 오빠와 언니들, 그리고 귀여운 동생. 가족뿐만이 아니라 네가 그 이름으로 사는 동안 만난 모든 사람, 네가 가진 모든 물건, 전부 다 원래는 주인이 따로 있잖아. 하지만 너는 이미 그것들을 진짜 네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나는…….’
-사실은 아닌 척해도, 이미 네 것처럼 사랑하고 있지? 그래서 그걸 허무하게 이 세상과 함께 부서지게 놔두지 않으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입이 풀로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앞에서 하얀 팔이 내게로 뻗어졌다.
기묘한 감촉을 가진 물질이 얼굴을 쓰다듬듯이 어루만지는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곧 내가 찾아갈 거야. 원래 내가 가졌어야 할 내 것들을 돌려받으러.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도대체 누구야?’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어?
하얀 덩어리가 물결쳤다.
그것은 곧 앞에 있는 사람을 비춰내는 수면처럼, ‘나’로 변했다.
늘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이 나를 향해 생긋 미소 짓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 * *
“아 씨, 개꿈…….”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지 잠을 설친 것처럼 몸이 찌뿌둥했다.
“황녀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때 마가렛이 나를 깨우러 방에 들어왔다.
“앗, 벌써 일어나 계셨네요?”
“으응, 눈이 일찍 떠졌어.”
“요즘은 우리 황녀님이 무슨 일이든 혼자 척척 잘하셔서 이 마가렛이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었으면 이제 뭐든 혼자 할 때도 됐지.
그렇게 서운함과 대견함이 뒤섞인 마가렛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아침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내 나이도 10살.
그리고 오늘은 내가 업어 키운 남동생 제르카인의 신성 의식이 있는 날이었다.
왠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유독 밝고 선명했다.
1부 <마침>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