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1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19화(119/207)
아니, 진짜로 태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저 하늘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서 태양을 가렸을 뿐이었다.
거대한 생물체가 날개를 펄럭이며 라벤더꽃이 흐드러진 정원에 가까이 다가왔다.
큰 몸체가 해를 가리며 날아들어서, 밑에서 올려다보자 하늘 전체가 흰 깃털에 완전히 뒤덮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으악!”
“가, 갑자기 뭐야?”
테이블보가 뒤집힐 것처럼 거칠게 휘날리고, 사방에 피어난 꽃이 마구 흔들리며 향기를 피워냈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소년들이 놀라고 당황해 혼비백산했다.
그런 와중에, 히아킨은 혼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을 가린 것은 새하얀 신수였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사슴뿔이 달린 백호와 비슷했는데, 커다란 날개는 어떤 새보다도 커다랗고 위용이 넘쳤다.
하지만 히아킨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위에 타고 있는 작은 소녀였다.
꽃잎이 섞인 바람 사이로 나부끼는 투명한 은빛 머리칼이 꼭 천사가 흩뿌린 별 가루처럼 반짝거리며 빛났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꿀처럼 달콤하고 찬란한 황금색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커다란 신수를 타고 나타난 소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어렸지만, 그들을 내려다보는 눈빛만큼은 누구보다도 오연했다.
소녀의 손길을 받은 신수가 서서히 날갯짓을 멈추었다.
마침내 잦아든 돌풍 속에서, 여전히 신수 위에 올라탄 어린 소녀가 소년들을 깔아보며 귀엽고 앳된 목소리로 오만하게 말했다.
“야, 내 구역에서 쓸데없이 몰려다니지 마.”
달콤한 설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예쁜 외모와는 상반되는 야멸찬 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소년 모두 명성이 자자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누구에게도 이런 박정한 말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 중 누구도 소녀에게 감히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
“3, 3황녀님…….”
정원에 난입한 자의 정체를 깨달은 누군가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아스포델이 타고 온 신수가 푸르릉, 하고 굵은 콧김을 내뿜자 화들짝 놀라 다시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로잔티나의 별께 인사드립니다!”
루벨리오의 뒤에 있던 수행인들이 3황녀 아스포델을 향해 서둘러 인사했다.
“아스포델! 또 너야?!”
헬리만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평소에 아스포델을 따라 그를 괴롭히던 포악하고 성가신 족제비들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헬리만 오빠, 내가 우리 궁 근처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지?”
다행히 아스포델은 족제비들을 달고 오지 않은 듯이, 혼자 신수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집채만 한 신수 위에서 굴러떨어질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그 동작은 망설임 없이 신속했고 몸놀림 또한 가뿐했다.
신수 위에서 내려와 잔디를 밟고 선 소녀는 더욱 작고 귀여워 보였다.
옆에 있는 꽃 덤불보다 키가 더 작아 더없이 앙증맞아 보였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헬리만은 좀 더 용감하게 소리쳤다.
“황궁 정원이 다 네 거야?! 그리고 여긴 원래 내가 자주 다니던 정원이야!”
“내가 알 바야? 거슬리는 걸 거슬린다고 말했을 뿐인데. 우연히 지나갈 때마다 자꾸 내 눈에 띄는 게 잘못이지?”
하지만 아스포델은 손위 오라버니에 대한 공경심은 쥐뿔도 없는 듯이 건방지게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게다가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죄다 무슨, 도토리 키 재기 하는 것도 아니고.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애들끼리 뭔 비교들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소녀의 맑은 눈이 테이블 앞에 있는 소년들에게 향했다.
아스포델의 하얀 얼굴은 해사하고 천진했으나, 그 안에는 묘한 경시와 한심함이 섞인 듯했다.
조금 전까지 히아킨 란타나를 조롱하던 소년들은 혹시 3황녀 아스포델이 자신들의 만행을 목격했나 싶어서 괜히 찔끔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눈부신 광채가 깃든 아스포델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런 소년들을 스쳐 지나가, 헬리만의 옆에 선 루벨리오에게 향했다.
“그런데 오늘은 루벨리오 오빠도 여기에 같이 있었네?”
신의 은총을 의미하는 두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스포델의 시선을 받은 루벨리오가 눈매를 움칫 떨었다.
“뭐야, 그 눈빛은? 나도 그냥 지나가던 길이거든? 너처럼!”
그는 어린 여동생의 시선에 한순간 동요한 걸 감추듯이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외쳤다.
왠지 이 자리에 있는 머저리들과 동급으로 묶인 듯해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루벨리오의 새침한 목소리가 괜히 변명하는 것처럼 들렸고, 아스포델은 거기에 관심이 별로 없는 듯이 바로 눈길을 돌려서 그를 더욱 부들거리게 만들었다.
“응? 그보다 이건 또 뭐야? 헬리만 오빠, 요즘 식단 조절 중 아니었어?”
지저분한 테이블을 발견한 아스포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시아 언니가 이번 달부터 집중적인 관리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헬리만은 정곡을 찔려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3황자 헬리만이 이렇게 홀쭉해진 이유는 2황녀 알렉시아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날이 비대해지는 동생을 더 두고 보지 못하고,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먹고 뒹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헬리만은 지난 반년 동안 알렉시아에게 끌려 나가 같이 억지로 운동을 하고, 원치 않는 식단 조절까지 강요당해야만 했다.
당연히 헬리만의 입장에서는 아주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나인 알렉시아를 이길 수 없었기에, 결국은 머리를 굴려 얼마 전부터 놀이 친구를 이용해 몰래 간식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장면을 아스포델에게 딱 들켜 버린 것이다.
아스포델은 비뚜름하게 미소 지은 채 테이블 위에 널린 간식들을 훑어봤다.
“참나, 누가 뚱보 아니랄까 봐 설탕이랑 크림 비중이 정상 수치를 넘지 않은 건 아예 손대지도 않았네. 그러니까 헬리만 오빠가 만년 뚱보인 거야.”
헬리만이 발끈하기도 전에 아스포델의 시선은 다른 소년들에게 옮겨졌다.
아스포델의 가차 없는 입담을 아는 소년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어깨를 굳혔다.
역시나 다음 순간, 아스포델은 무언가에 깜짝 놀란 듯이 앙증맞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너희들 완전 헬리만 오빠까지 합해서 네 쌍둥이 같잖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점점 헬리만 오빠를 닮아가지?”
쿵! 쾅! 콰쾅!
그 순간, 히아킨을 제외한 나머지 소년들의 머리에 큰 돌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강타했다.
‘3황자님과 닮았다고?!’
두 눈을 부릅뜬 세 명의 소년이 동그란 얼굴을 헬리만 쪽으로 돌렸다.
몸을 곧추세운 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이는 모습이, 과연 아스포델의 말처럼 포동포동한 미어캣들 같았다.
“아휴, 답 나온다, 답 나와. 만날 때마다 이런 거나 같이 먹으니까 그렇게 동글동글해지지. 에잉, 예전에는 멀쩡하던 애들인데 지금은 인물을 다 버려놨네. 쯧쯧.”
아스포델은 몰인정한 팩트 폭격으로 순식간에 세 명의 소년을 충격의 도가니 속에 밀어 넣고는, 안타깝다는 듯이 재차 혀를 찼다.
그런 뒤 소녀는 호기심을 품은 동그란 눈을 테이블 위에 가장 말끔한 모습으로 놓인 접시로 옮겼다.
“그런데 이건 누가 가져온 거야? 여기 있는 것 중에 제일 먹을 만해 보이는데.”
자그마한 손이 히아킨이 가져온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아, 그건…….”
히아킨은 깜짝 놀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가져온 거야?”
“네, 네. 그렇긴 한데…….”
아스포델은 히아킨이 다른 말을 더하기도 전에 손에 든 걸 겁 없이 냠 하고 크게 깨물었다.
히아킨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까 다른 소년들이 말했듯이 온갖 진수성찬만 맛보았을 황족들의 입에는 맞지 않을 것 같은데?
게다가 3황자도 대놓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 같은 핏줄인 3황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보였고 공통점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 듯했다.
아, 하지만 3황자와 3황녀, 둘 다 3이란 숫자를 같이 사용하는 공통점이 있긴 하구나.
왠지 불길한데…….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속으로 뭔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만큼 히아킨은 정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3황녀 아스포델은 말랑해 보이는 볼을 움직이며 입을 몇 번 우물거리다 말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다.
히아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황녀는 성격이 별로 안 좋다고 들었는데, 혹시 성질을 부리면서 먹던 샌드위치를 내던지는 건 아니겠지?
“오, 오오오. 뭐야, 이거?”
하지만 놀랍게도 아스포델의 입에서 나온 건 감탄이었다.
“엄청 맛있잖아? 몇 년 동안 먹어 본 샌드위치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빈말이 아닌 듯이, 진짜로 손에 든 샌드위치 하나를 순식간에 전부 다 먹어 치웠다.
히아킨은 멍해졌고, 다른 소년들도 그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 입을 벌렸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