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23)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23화(123/207)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면 황궁의라도 부르시죠.”
“아유,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이 고작 이런 일로 바쁘신 황궁의를 부르면 안 되지요.”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로잔티나의 명실상부한 다섯 번째 달이신데, 몸이 좋지 않을 때 황궁의를 부르는 게 어때서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자존감 낮고 비굴한 카루스의 태도에 유클레드가 마뜩잖게 미간을 좁혔다.
“거기, 지금 당장 황궁의를 불러오도록 해. 신성 의식을 앞두고 5부군님이 많이 긴장하신 듯하군.”
“예, 지금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유클레드가 직접 황궁의를 부르자 카루스는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다가, 곧 감동을 담은 촉촉한 눈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에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우리 유클레드가 카루스를 위해 이렇게 먼저 나서다니!
게다가 지금은 또 제르카인을 따로 보러 오기까지 했지!
어릴 때부터 유클레드 녀석을 데리고 카루스와 제르카인의 궁에 문지방이 닳도록 뻔질나게…… 까지는 아니고, 자주 들락거린 보람이 있었다.
“누나. 아델 누나.”
그렇게 카루스와 유클레드가 갸륵한 대화를 나누는 걸 들으며 뿌듯해하던 중에, 문득 아래에서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어린 소년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있을 신성 의식의 주인공답게 4황자 제르카인은 평소와 달리 화려하게 꾸민 차림새였다.
“제르, 넌 괜찮아? 곧 의식이 시작되는데 긴장 안 돼?”
그래, 나는 제르카인을 챙겨야지!
물론 신성 의식은 황족이라면 누구나 다 치르는 거고, 나도 정작 그날 긴장하지 않았지만…….
제르카인은 막내인 데다, 이번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키우다시피 해서 그런가?
제르카인에 관한 건 자잘한 부분에도 유독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나보다 큰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다가 이렇게 자그마한 아이 앞에 서게 되니, 저절로 누나 마음이 마구마구 샘솟는 것 같았다.
‘크흑, 이 넓은 황궁 안에 내 작은 키로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은 동생인 제르카인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으으응, 사실은 엄청 긴장돼요.”
내 물음에 이제 여덟 살 된 소년이 귀엽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르, 방금까지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니?”
“맞아, 너 조금 전까지 완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는데.”
카루스와 유클레드가 의아한 눈으로 그런 제르카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르카인이 한순간 멈칫하다가, 이내 꼭 핍박받는 가련한 사람처럼 고개를 조용히 떨구며 듣는 사람이 다 구슬퍼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 앞이라 그런 거예요. 게다가 아버지가 너무 긴장하셔서, 나까지 그러면 더 걱정할까 봐…….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요.”
뒤이어 제르카인의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다시 한번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면서 그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앳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사실은 많이 긴장되니까, 누나가 나 안아주면 안 돼요?”
아구, 그랬구나……! 이 귀여운 것!
먼저 말했다시피 나는 새끼 신수 같은 작고 귀여운 것에 환장했고, 제르카인은 어린아이답게 아주 사랑스럽고 깜찍했다.
“으아, 그래그래! 누나가 안아줄게!”
기꺼이 팔을 벌려 내 작은 품을 내어주자 제르카인이 수줍게 나한테 몸을 기댔다.
지난 5년 동안 4황자 제르카인은 무럭무럭 자랐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 기대만큼 순하고 착하게 커 줬다.
사실 더 어릴 때는 애가 나만 보면 바보같이 헤실거려서 혹시 이번에는 좀 어수룩한 성격으로 성장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랄수록 오히려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정으로 변해 갔다.
그 모습은 내 기억 속의 4황자 제르카인과 비슷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부터 마냥 경계심을 버리고 제르카인을 대했던 건 아니었다.
지난 빙의 1, 2회차 때의 제르카인은 순진한 척 내숭을 떨면서 나를 속이고 급기야 뒤통수까지 거하게 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3회차의 제르카인은 막 열매로 맺혀 태어난 순간부터 내가 업어 키운 아이였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으로 나를 ‘누나’라고 부르고, 요람 속에 겨우 누워만 있다가 어느새 걸음마를 떼 쑥쑥 자라는 모습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내 미운 남동생을 향한 경계심도 서서히 흐려졌다.
제르카인은 예전처럼 말수가 적고 얌전한 아이로 자랐지만, 나한테만큼은 거리낌 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제르카인의 성장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걸 다 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정말 순진하고 착한 아이로 키워냈다고 믿었다.
“헉! 제르, 이 아빠가 걱정할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고?”
카루스가 감동 어린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린 아들을 보며 울먹였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그 정도로 아빠를 신경 써주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제르……!”
“카루스 아버지. 원래 부모는 자식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라고 했어. 제르는 어리지만 이렇게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은걸! 절대 평범한 어린애가 아니라니까.”
나는 팔불출 부모처럼 제르카인의 특출함을 자랑했다.
엣헴, 물론 나는 초보 아버지인 카루스와 달리 빙의 3회차의 짬밥이 있어서 내가 키운 남동생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만 말이지!
“정말 3황녀님 말씀이 맞아요! 마냥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우리 제르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아빠 걱정까지 해주게 된 건지……. 어흑, 우리 제르가 벌써 다 자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요. 이런 싱숭생숭함이 바로 부모의 마음인 거겠지요?”
카루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런데 옆에서 말문이 막힌 얼굴로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던 유클레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허. 아스포델, 방금 네가 한 말은 전부터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한데.”
방금 한 말? 뭘 말하는 거지?
“뭐, 제르가 아직 어린데도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다는 말? 나도 그렇다고?”
“아니……. 부모는 자식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물론 네가 부모는 아니지만.”
“뭔 소리야?”
“무슨 뜻이냐면, 네가 제르카인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게 객관성이 너무 떨어지는……. 하, 아니야, 됐다. 내가 열 살짜리 여동생하고 여덟 살짜리 남동생을 데리고 무슨 말을 하겠어. 네가 행복하면 됐지, 응, 그래.”
이 녀석, 들을수록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아델 누나, 유클레드 형님의 말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이해를 잘 못 하겠어요.”
“에구, 유클레드 오빠는 가끔 쓸데없이 말을 어렵게 할 때가 있다니까.”
나는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제르카인을 부둥부둥하면서 유클레드를 향해 혀를 찼다.
유클레드는 왠지 애잔하면서도 답답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게 영 거슬렸지만, 내 품을 더 파고드는 제르카인을 달래 주느라 바빠서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4황자님. 곧 신성 의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정된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제르, 신성 의식은 별것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맞아, 말만 거창하지 사실 대단할 것도 없어.”
제르카인은 그제야 간신히 나한테서 떨어졌다.
궁인들이 다가와 살짝 구겨진 그의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서둘러 다시 정리해 주었다.
나와 유클레드의 말에 제르카인이 입술을 귀엽게 오므리며 말했다.
“나도 아델 누나랑 똑같은 눈 갖고 싶어요.”
신의 축복을 받은 증명인 황금색 눈을 말하는 건가? 원래대로라면 그건 불가능할 텐데…….
뭐, 하지만 2황자 루벨리오 녀석도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 회차 때는 신의 축복을 받아 황금색 눈을 가지게 되었으니, 제르카인도 혹시 모를 일이긴 했다.
신의 축복이라고 하니, 문득 5년 전에 한 번 만났던 데메테아 여신이 떠올랐다.
내가 가진 해파리 성물에 잠깐 들어와서 기껏 의미심장한 얘기를 해 놓고, 그 후로 한 번도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똥을 싸다가 만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얘기인데, 자고로 사람을 가장 짜증 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 참! 제르한테 줄 게 있었는데.”
그러다가 불현듯 아까 신수 서식지에서 구해 온 클로비스 꽃이 생각나서 품을 뒤적였다.
“자, 행운을 주는 꽃이야.”
“클로비스 꽃이잖아? 황궁 안에 피는 데가 있었어?”
유클레드의 의아한 물음에, 몰래 황궁 밖에 나갔던 사람으로서 괜히 뜨끔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