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2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26화(126/207)
어머니에게 안긴 제르카인도 어리벙벙한 얼굴로 얼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남매 중에 그녀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그나마 빙의 3회차의 경력이 있는 나 정도만 겉으로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직 라 벨리카 황제만이 냉엄함과 나른함을 뒤섞은 의연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오늘 치러질 신성 의식의 주인공을 전당의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유유히 상석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되었으니 심연의 거울과 길잡이 꽃을 준비하라.”
사람들은 그 말이 들리고 나서야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들은 궁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제르카인이 궁인의 손에 들린 보관함에서 그의 길잡이용 꽃을 집어 들었다.
라 벨리카 황제에게 안겼을 때 제르카인의 얼떨떨한 표정은 제 나이처럼 어려 보였는데, 지금의 그는 또 평소의 애어른 같은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꽃가지를 들고 선 어린 소년은 조금은 유약하게도 보이는 단정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눈은 큰일을 앞두고 허둥대거나 겁먹은 기색 없이 그저 물이 고인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요한 수묵화 같은 아이라서 그런지, 손에 들고 있는 화려한 붉은 꽃송이와 대비된 소년의 모습이 묘하게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럼 4황자의 신성 의식을 시작하겠다.”
마침내 제르카인이 백색 심연으로 통하는 거울 앞에 섰다.
“데메테아의 광영이 네게 함께하길 기원하마.”
나도 들었었던 상투적인 인사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이후, 어린 소년의 몸이 앞으로 향했다.
“제르…….”
카루스가 어느새 꺼내 든 손수건을 입에 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아들을 응시했다.
나도 카루스와 마찬가지로 감회가 남달랐다.
제르카인은 기특하게도 한 번도 주춤거리지 않고, 용감하게 곧장 거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 그는 카루스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짧게 시선을 마주한 동안 어린 제르카인과 함께 보낸 지금까지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크흡!”
“흡…….”
카루스와 내가 거의 동시에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찡한 코끝을 움켜잡았다.
“3황녀님,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네요. 제르가 벌써 신성 의식을 치르다니.”
“정말, 카루스 아버지. 기저귀나 차고 있던 까꿍이가 어느새 저렇게 컸는지, 세월이란 게 참…….”
이제까지 제르카인을 함께 키워온 육아 동지로서, 카루스와 나는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통하는 게 많았다.
그런 카루스와 나 사이에 샌드위치 속 햄처럼 낀 아버지의 얼굴이 굉장히 오묘해졌다.
카루스와 내 대화를 들은 근처의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하하. 아스포델은 제르카인과 유독 가까워서 그런지, 지금도 신경이 많이 쓰이나 보구나.”
1부군 테드릭이 재미있다는 듯이 우리를 보고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세대에는 마지막으로 열리는 신성 의식일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좀 묘하긴 해요.”
2황녀 알렉시아도 여전히 쓸데없이 화사한 가상의 꽃을 주변에 흩날리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공감이 가는, 자연스럽게 카루스와 나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우리 아델이 신성 의식을 치르던 날이 떠오르는구나. 그때 아델을 혼자 백색 심연으로 보내면서 어찌나 마음이 소란스럽던지…….”
“록샨 님도 그러셨군요……! 맞아요, 마음 같아서는 거울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다구요.”
“아버지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지.”
“저두요, 아빠! 지금 제르의 신성 의식을 보니까, 그때 아빠 마음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누나의 마음도 비슷한가 보구나.”
아빠가 아주 잠깐 나를 미묘한 눈으로 보다가 곧 따뜻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 딸이 좀 유난인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로 동생을 위하고 아끼다니, 참 기특하고 훌륭하게 잘 컸다고 생각하는 게 꿀을 바른 듯한 눈빛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주변에서는 이제 슬슬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신성 의식의 주인공도 백색 심연으로 들어갔고, 이제 남은 일은 제르카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황족들의 신성 의식은 평균적으로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래서 보통 황제는 그동안 잠깐 자리를 비워 다른 국정을 보고 오기도 했다.
신성 의식의 참관을 위해 모인 신관들과 귀족들도 당연히 특별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다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국경 지대에서 새로운 마수 서식지가 발견되었다면서요?”
“다음 달에 시벨라누스 대신관님께서 기도 수행을 마치고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눈꽃 암벽에서 3년을 넘어 5년 동안이나 외부와 연을 끊고 기도에만 몰두하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엣헴, 우리 막내딸이 이번에 그 어렵다는 황실 기사단 시험에 통과해 서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대화의 장이 이제 막 곳곳에서 열리나 했는데…….
파앗!
갑자기 제르카인이 들어간 심연의 거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응?”
“엥……?”
신성 의식의 주인공이 사라진 지 이제 겨우 1, 2분이나 지났을까?
모두가 지나치게 빠른 거울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라 벨리카 황제도 움직임을 멈추고 선득한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다음 순간, 나는 거울 밖으로 거칠게 튕겨 나온 작은 소년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윽…….”
“제르!”
꼭 백색 심연에서 쫓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무참하게 구르며 엎어진 건 방금 거울 안으로 들어갔던 제르카인이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은 바로 뒤이어 벌어졌다.
와장창!
제르카인을 강제로 토해 낸 거울이 돌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린 것이다.
사방으로 터져 나간 유리 조각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바닥으로 꽂혀 들었다.
그 순간, 전당 안에 소름이 끼치도록 싸늘한 침묵이 고였다.
로잔티나의 역사만큼이나 기나긴 세월 동안 황실의 보물로 취급받았던 성물이 처음으로 신성 의식 도중에 파손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커다란 경악과 당혹감이 신성 의식에 참관한 사람들을 파도처럼 휩쓸며 퍼져나갔다.
아까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볼썽사납게 구겨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어린 소년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제르카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신성 의식을 위한 성물이 파손된 겁니까?”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적인 상황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 있던 사람들이 이윽고 벌 떼처럼 시끄럽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아연실색해서, 누군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격양된 목소리로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말을 쏟아냈다.
“여신의 진노……! 데메테아 여신님이 진노한 게 틀림없어요!”
“어쩐지, 애초에 신탁이 늦게 내려온 것도 이상했습니다!”
“이렇게 성물인 거울이 깨지다니, 여신께서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직접 의지를 보이실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이건 여신께서 저주를 내리셨다고밖에는……!”
바로 그때, 쾅! 하고 큰 소음이 전당 안에 울려 퍼졌다.
불쌍할 정도로 창백하게 얼어붙은 소년에게 꽂혀 있던 날카로운 시선이 큰 소리가 난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물론 그 소리는 내가 의자를 뒤꿈치로 일부러 걷어차 난 소리였다.
“여신의 진노와 저주라고?”
나는 그들을 보며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러고 나서 들으란 듯이 낭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신기해라. 세디엄 가문에서는 황족과 신관들조차 감히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는 여신의 뜻을 아주 잘 알고 있나 보네?”
가장 처음 여신의 진노 소리를 꺼낸 가문을 일부러 언급하자, 내게 저격당한 세디엄 가문의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신성 의식 도중에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후에 제르카인에게 하는 사람들의 꼬락서니를 보니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그래서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굳이 감정을 숨기려 애쓰지 않았다.
“방금 열심히 동조하던 다른 가문들도 마찬가지지. 이 자리에는 데메테아 여신의 혈통을 직접 이은 우리 황족들이 버젓이 자리해 있고, 또 여신의 성음을 대신 전하는 신관들까지 여럿 참관해 있는데. 그런 우리도 지금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먼저 데메테아 여신을 운운하며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본 뒤, 고개를 돌렸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