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28)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28화(128/207)
그러고 나자, 헬리만을 지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던 루벨리오도 눈치껏 말을 돌렸다.
“크흠. 인생에 한 번뿐인 신성 의식이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상심이 크겠네.”
“뭐야, 그 말은. 설마 지금 약 올리는 거야?”
“유클레드 형님, 아까부터 저에 대한 오해가 너무 깊으시네요. 이건 당연히 위로의 말이죠? 네 상심이 클 테니 우리 남매들이 일부러 이렇게 너를 직접 위로하러 왔다, 그러니 너도 마음을 좀 가볍게 가져라, 이런 뜻인 게 당연하잖아요?”
“중요한 내용은 죄다 숨겨져 있어서, 앞에 한 말만 듣고는 아무도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것 같은데……?”
물론 루벨리오도 딱히 남을 배려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헬리만과 똑같이 굴다가 쫓겨나기에는 창피하니 그냥 조용히 있기로 한 것 같았다.
“제르, 그러고 보니 카루스 아버지는 어디에 있어?”
“아까…… 제가 거울 조각에 팔을 살짝 베여서 신관님들이 와서 치료해 주셨는데요. 아버지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잠깐 나가셨어요.”
하씨, 아까 거울이 요란하게도 깨지더니만, 역시 다쳤구나?
하긴, 제르카인이 바로 거울 앞에 있었지. 어쩐지 지금 보니 옷이 살짝 찢어져 있다.
“제르카인, 백색 심연에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유클레드가 제법 맏이다운 듬직한 느낌을 풍기며 제르카인에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백색 심연에서 보고 들은 거라든가……. 이상했던 건 없어?”
“아무것도 못 봤어요. 들은 것도 없고요. 그냥…… 거울에 들어갔는데 이상하게 춥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바로 뭔가에 몸이 억지로 떠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떠 보니까 백색 심연 밖이어서…….”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제르카인의 말을 경청했다.
앗, 그런데 표정 관리를 좀 할 걸 그랬나?
집중하느라 저절로 표정이 굳은 거였는데, 어린애한테는 괜히 겁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제르카인이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웅얼거렸다.
“저, 저 진짜 신의 분노를 산 거예요?”
우리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 거울이 성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써서 망가질 때가 되긴 했어.”
“그런 말은 귀담아듣지 마. 귀족들도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야.”
“맞아, 막내야. 여신님이 느닷없이 너한테 왜 화를 내겠어?”
그런데 갑자기 우리의 말을 들은 제르카인이 작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저 사실은…….”
응?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우중충해지는 거지?
이상하게도 제르카인은 꼭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어린애처럼 주저하며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사실은 여신님이 화를 내실 만한 짓을 하긴 했어요.”
앗, 뭐지?
제르카인은 의외로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우리 모두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짓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르카인이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아델 누나랑 똑같은 눈을 갖고 싶어서, 신성 의식 때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앞으로 절대 자기 전에 여신님한테 기도하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옆 나라에 있는 다른 신을 믿을 거라고, 신탁이 내려온 뒤부터 밤마다 매일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신님이 화가 나신 것 같아요.”
제르카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바탕 또 눈물을 터뜨렸지만, 우리 모두는 아련하게 제르카인을 보았다.
바보를 보듯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벨리오를 제외하고, 우리 남매들은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 나서 불쌍하게 훌쩍이고 있는 제르카인을 합심해서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에구에구, 그랬구나? 우리 제르, 그래서 무서웠구나?”
“평소에는 애늙은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애는 애네.”
“이상하다. 유르 오빠, 우리도 이 나이 때 이렇게 귀여운 소리를 했었나?”
“아하하, 우리 막내 참 순진하구나. 여신님은 자애로우셔서 그런 거로는 화 안 내.”
“저, 정말요?”
제르카인은 우리가 몇 번이나 확언해 준 뒤에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제르카인을 위로해 준 남매들을 보면서 속이 말랑말랑, 따끈따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번 회차는 느낌이 좋은데?’
이번 3회차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4황자 제르카인에게 큰일이 있을 때, 다들 무관심하게 굴지 않고 일부러 찾아와서 달래주고 있는 것만 봐도 이전 회차들과 다른 점이었다.
물론 내가 있으니, 다른 남매들이 없었어도 제르카인이 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옆에 있어 줄 사람이 많은 게 내 마음을 한결 안심시켜 주었다.
사실은 아까 전당에서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도 많은 위로에 제르카인의 멘탈에는 생각보다 큰 충격이 가진 않을 것 같았다.
“참나, 다들 놀고 있네. 내가 이런 징그러운 꼴이나 보려고 여기에 온 줄 알아?”
그렇게 우리가 훈훈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루벨리오가 뒤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초를 쳤다.
“루벨리오 오빠도 부러우면 낄래?”
“됐거든? 제발 와달라고 부탁해도 절대 안 갈 거야!”
내가 슬쩍 고개를 들고 루벨리오를 놀릴 생각으로 권유했으나, 역시 그는 진저리를 치며 거부했다.
루벨리오는 끔찍한 광경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질린 눈으로 우리를 곁눈질하다가, 급격히 피로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 아까는 왜 그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신관님이 뭐라고 하는지 살짝 엿듣고 올까?”
“유클레드 오빠는 너무 눈에 띄잖아. 내가 궁인들한테 물어볼게. 마침 이번에 위스테리아 궁에 파견된 궁인들하고 친해졌거든.”
“알렉시아, 너 이제는 손님들이 머무는 거처에서 일하는 궁인들까지 홀리려고 마수를 뻗치는 거야……?”
“하하, 사람들을 홀리려고 마수를 뻗치다니. 유클레드 오빠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하네.”
물론 대화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제르카인이 많이 진정된 것 같아서 유익했던 남매들과의 시간이었다.
* * *
“부르셨습니까, 3황녀님.”
붉게 저무는 노을 속에서 나타난 남자는 마치 검은 그림자를 끌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명색이 신관인데다 흰옷까지 입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 녀석만 등장하면 분위기가 퇴폐적으로 변하는 거냐?
하여간에, 이런 놈이 있으니까 애초에 원작 소설도 귀염, 발랄한 전개로 잘 나가다가 갑자기 피폐, 암울해졌지.
“그래, 불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내게 다가오는 모르페우스를 탐탁지 않게 흘겨봤다.
“신관님은 왜 갈수록 뻔뻔해져? 그러다가 내가 정떨어져서 계약 파기하면 어쩔 거야?”
“어리시군요. 계약 파기는 한쪽의 의사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지요. 그래도 만약 강행하고 싶다면, 계약 위반에 대한 대가를 치르셔야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리긴 개뿔, 정신연령은 내가 너보다 더 높아!
“신관님, 지금 또 날 화나게 해서 좋을 게 없어. 신관님이 제일 잘 알 텐데?”
오랜만에 만나서 건방지게 구는 모르페우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모르페우스가 입을 다물고 내 얼굴을 탐색하듯이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사죄하듯이 내 앞에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늘 애타게 3황녀님을 뵙고 싶었으나, 한동안 만나주시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초조했었나 봅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모르페우스를 찌푸린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그와 내가 있는 곳은 카루스와 제르카인이 함께 사용하는 궁의 후원이었다.
뜬금없이 왜 여기를 모르페우스와의 접선 장소로 잡았느냐고?
오늘만큼은 의외로 여기만 한 장소가 없었다.
아까 신성 의식 때 있었던 일로 신관들은 거의 반으로 갈라져 한쪽은 깨진 성물을 조사하고, 다른 한쪽은 4황자 제르카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그를 찾았다.
모르페우스는 신성력과 사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최고위 신관이라 양쪽 모두를 책임져 통솔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직접 제르카인을 검사하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에 제르카인을 보러 이 궁에 하도 많이 드나들어서 언제건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모르페우스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지금 모르페우스는 내 앞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날 선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앉아 있던 그네에 조금 더 편하게 몸을 기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