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2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29화(129/207)
“흥. 그래,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가 선심 써서 그냥 넘어가 주지. 자, 이것부터 받아.”
내가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자, 모르페우스가 눈을 슬쩍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 직후, 모르페우스가 멈칫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꽃을 보며 미심쩍은 듯이 눈매를 찌푸렸다.
“설마 저한테 주시는 선물…….”
“일 것 같아?”
“……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르페우스는 곧바로 자신이 허튼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몸을 바로 세우고 내가 내민 것을 가져갔다.
“신수 서식지에서 피는 꽃이군요. 이걸 왜 주신 겁니까?”
“거기에서 뭔가 느껴지는 게 없어?”
내 물음에 모르페우스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것을 자신에게 준 것을 눈치챘는지, 꽃을 살펴보는 시선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모르페우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짙은 검보랏빛 머리칼과 대조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예전보다는 확실히 혈색이 좋았다.
‘전에는 완전히 뱀파이어 같았다고 하면, 지금은 뱀파이어 혼혈 정도로 보인다고 할까?’
내 신성력으로 모르페우스의 지병을 목숨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시켜 주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왜, 예전에 모르페우스가 뜬금없이 내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던 일을 기억하는가?
‘황녀님의 신성력이…… 아니, 오직 황녀님의 신성력만이 제 죽어가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자,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어서 제 목에 목줄을 채우십시오.’
모르페우스는 그렇게 나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뒤부터 내 말도 나름대로 잘 듣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이 흑막 놈이 완전히 갱생해서 착해진 건 절대로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틈만 나면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계약서상 내가 갑이고 모르페우스가 을인데, 일명 ‘을의 하극상’을 노리고 있다고나 할까?
모르페우스와 나는 진짜 서로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각자 원하는 것을 위해 동맹을 맺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모르페우스의 목숨줄이 내게 있는 셈이라 이렇게 얌전히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본성을 숨기고 반 갱생한 흑막으로 살고 있을 리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만……. 혹시 오늘 전당에서 있었던 일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흠, 뭐. 아무런 느낌도 안 들면 됐어.”
나는 일부러 별것 아닌 것처럼 흥흥거리면서 그에게 보라고 줬던 클로비스 꽃을 홀랑 회수해 갔다.
모르페우스는 찌푸린 눈으로 내 주머니에 들어가는 꽃을 바라보았다.
모르페우스에게 충분히 살펴볼 시간을 줬는데도 이상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면,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이건 아까 제르카인과 만났을 때 찝찝해서 다시 가져온 거였다.
내가 봤을 때도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모르페우스에게 확인해 보라고 한 것이었다.
내가 준 이 꽃에 문제가 있어서 오늘 제르카인에게 그런 일이 생겼던 게 아닌지 조금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제르카인의 의상이나 신성 의식에 사용된 심연의 거울, 혹은 길잡이 꽃 같은 물품들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지금 황실에서 신관들과 함께 확인하는 중이다.
이 클로비스 꽃도 다른 신관들이 언뜻 확인하고는 별문제가 없다고 옆으로 치워둔 것이었다.
하지만 찜찜한 마음이 여전히 조금은 남아 있어서, 신관 중에 가장 짬밥이 있는 모르페우스에게 이렇게 직접 보여준 거였다.
‘그런데 이 녀석도 이상이 없다고 하면 믿을 만하지. 내가 이 정도로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다니, 영광인 줄 알아라!’
“그보다, 신관님은 오늘 일에 대해서 나한테 뭔가 말할 게 없나?”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거라면,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떠보듯이 던진 물음에 모르페우스가 대번에 정색했다.
“뭐야, 내가 언제 신관님을 의심한다고 그랬어?”
“그럼 저를 믿으십니까?”
“당연히! 그건 아니지.”
“그것 보십시오.”
이 자식, 눈치가 있다고 칭찬해 줘야 해, 아니면 성가시다고 해야 해?
나는 살짝 떨떠름한 기분을 안은 채 짐짓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신관님이 아니라면 그렇겠지, 뭐.”
우리 사이에는 신뢰고 뭐고 없었지만, 굳이 뭔가를 더 캐묻지는 않았다.
사실 모르페우스는 신성력 도장을 찍어 계약한 내용 때문에 나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물론 틈새를 찾아 두루뭉술하게 모호한 답변을 해서 나를 속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했으니 더 의심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난 그냥 신관님 생각은 어떤지 물은 건데. 아까 그건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제가 속한 신전의 의견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시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신관님 생각이 곧 신전을 대표하는 의견이 될 거잖아.”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 애초에 내가 왜 너하고 계약을 했겠냐?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내 대답에 모르페우스가 잠깐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최소한 의식 전에 성물을 검수할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성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요.”
모르페우스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답변을 생각해 두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 여신의 뜻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모르페우스의 말을 듣고 아까 전당에서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태연히 실소했다.
“뭐야, 재미없게. 신관님도 제르가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리가 하고 싶어?”
“저주는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여신의 개입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나 모르페우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어투로 덧붙였다.
“아까 전당에서 느껴진 건 분명 데메테아 여신의 기운이었으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젠장, 모르페우스도 진짜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야?’
사실 제르카인이 백색 심연에서 돌아온 뒤 거울이 깨질 때, 그 순간 나도 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데메테아 해파리가 현신했을 때 느껴졌던 기운과 언뜻 비슷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코빼기 한번 비춘 적 없던 데메테아가 이제야,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건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착각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모르페우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니 더욱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이상하잖아. 느닷없이 데메테아 여신이 왜 제르카인에게 이런 해코지를 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심하다가 작게 혀를 찼다.
어쨌든, 행운이 찾아오는 꽃을 제르카인에게 줬는데 오히려 불행이 닥치다니 역시 이런 미신은 믿을 게 못 되었다.
이 일로 한동안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뻔해서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칫, 전개가 바뀌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혹시 원작의 억지력이 제르카인을 어떻게든 흑화시키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 아니야?’
“쯧, 신관님도 나이가 들더니 영기가 흐려졌구나? 데메테아 여신님이 진짜 개입하신 거면 성녀인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 속이 시꺼먼 흑막 신관 놈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제르카인이 진짜로 여신에게 밉보여서 신성 의식을 망쳤다는 낙인을 찍어버릴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일부러 비웃음과 측은함이 반씩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모르페우스가 눈매를 꿈틀거렸다.
“나이가 들어 영기가 흐려졌다니, 제 나이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아, 그래? 우리 아버지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네.”
“…….”
그 순간 모르페우스의 말문이 막혔다.
내 아버지뻘이라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정신적 타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신관님은 결혼 안 해? 신관들이 다 결혼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에구, 맞다. 신관님은 성격 때문에 힘들겠구나.”
나는 모르페우스를 더 놀려주려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데메테아 여신님께 일생을 바쳤습니다.”
“에이, 사실 그렇게 신실하지도 않잖아. 내가 신관님을 모를까 봐?”
“제가 데메테아 여신님의 사도이신 3황녀님을 이렇게 성심으로 모시는 것만 봐도 제 신실함은 입증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모르페우스는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름칠한 듯이 혀를 매끄럽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3황녀님, 당신의 첫 번째 종인 이 모르페우스를 위해 성녀의 은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게다가 내가 말을 더 돌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꼭 세례라도 받는 것처럼 아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모르페우스를 살짝 질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참,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공손한 모습이었다.
이럴 때의 모르페우스는 꼭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진짜 신관처럼 보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법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내 팔뚝에는 닭살이 돋았다.
처음에는 모르페우스와 기 싸움을 하느라 내 성력으로 치료를 받을 때마다 공손하게 부탁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내 생각보다 뻔뻔한 낯짝을 가지고 있어서, 금방 이런 상황에 적응한 것 같았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