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3)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3화(13/207)
‘원래는 새하얗게 변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직 성력 각성 전이라 검은 마석의 사기가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게 조금 아쉬웠다.
이걸 줍자마자 곧바로 어른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시기가 너무 이르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검은 마석의 존재를 알렸다가 혹시 악당들의 행동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심하게 달라지면 대처하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쿤차는 운 나쁘게 원래 악당들이 버리려던 걸 주워서 이용당한 것뿐이니까 앞으로의 전개에서 빠져도 상관없지.’
어쨌든, 아직 삿된 기운이 남은 마석을 밖으로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어서 얼마간 내 방에 고이 묵혀둘 생각이었다.
“아델, 테드릭 님과 유클레드가 왔구나.”
그리고 그다음 날, 1부군과 1황자가 예상보다 빨리 우리 궁에 찾아왔다.
* * *
“어서 오십시오, 테드릭 님.”
“반겨줘서 고맙네, 록샨.”
1부군 테드릭은 적발, 녹안을 가진 시원시원하고 호방한 인상의 잘생긴 남자였다.
1황자 유클레드는 부친의 옆에서 또 어른스러운 척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언뜻 봐서는 닮은 게 눈밖에 없어 보이는 부자였다.
1황자가 좀 더 섬세하고 고상한 느낌이라 그런가.
그래도 뜯어보면 뚜렷한 이목구비 자체는 많아 닮아 있었다.
“유클레드도 반갑구나. 연회 날 발목을 다쳐 신관을 불렀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떻지?”
“안녕하세요, 4부군님. 염려해 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1황자가 우리 아버지의 물음에 또 의젓한 척하며 답했다.
그런 아들의 머리통을 귀엽다는 듯 한 번 쓰다듬은 1부군 테드릭이 이번에는 내 앞에서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아델, 네가 유르를 도와줬다고 들었다. 하필 그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어 우리 아가가 큰일 날 뻔했는데 고맙구나.”
1부군 테드릭이 유클레드를 부르는 ‘아가’라는 호칭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아가……. 냉혈한 1황자 놈이 아가라니! 우리 아버지도 날 그렇게 안 부르는데.’
이제 겨우 아홉 살 난 꼬마 주제에 한껏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유클레드가 나와 비슷하게 흠칫했다.
그의 귓불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부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 유클레드가 소리 죽여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버지! 제가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녀석, 아가를 아가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냐? 동생 앞이라고 쑥스러운가 보구먼. 하핫!”
그러나 호탕한 테드릭은 아들의 수치스러운 눈빛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부모 눈에 자식은 늘 아기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1황자가 저런 호칭으로 불리는 걸 목격한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영 적응이 안 됐다.
“아델, 우리 유르가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구나.”
테드릭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제 아들을 살짝 내 앞으로 밀었다.
“연회 때는…….”
1황자는 몹시 입이 안 떼지는 얼굴로 뜸을 들이다가, 제 아버지의 채근을 못 이겨 입을 열었다.
“고…….”
하지만 역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하고 살았던 적이 없는 놈이라 그런지 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고마…… 읏.”
그래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고마웠어……! 어쨌든 그날 네가 아니었으면 많이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짜식, 쓸데없이 사족을 붙이기는?
그래도 어쨌거나 나한테 도움을 받은 걸 인정하는군.
그럼 나중에 은혜나 갚아라.
그래도 내가 밀칠 때 발목하고 손목을 다쳐 신관까지 불러 치료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이놈이 2황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치사한 성격은 아니지.
“흠, 아냐. 원래 세상만사 다들 서로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 아니겠어?”
난 1황자의 눈을 마주한 채로 그의 어깨에 턱 손을 올리고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그러니까 정 고마우면 오빠도 나중에 나 도와주면 돼.”
“그, 그래.”
내 겸손한 말을 듣고 감화되었는지, 아버지들과 1황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럼 아델, 우린 옆방에 가 있을 테니 오빠와 함께 놀고 있으렴.”
잠시 후, 아버지들이 먼저 자리를 비키고, 방에는 나와 1황자 둘만이 남았다.
“오랜만에 시간을 낸 거라 그런지…… 아버지들끼리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네.”
궁인들이 다과상을 차릴 동안 1황자는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앞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 일련의 행동은 여느 때처럼 단정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엿보였다.
친하지 않은 남매가 덩그러니 남겨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참, 타마린느는 얼마 전에 아버지 쪽 친척 집에 갔는데 동행한 수행인이 어쩌다 조금 다쳐서 다 나을 때까지 그쪽에 좀 더 머무른다고 아직 오지 못했어. 네 생일 연회 때 내가 말했던가?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는데.”
요놈, 전해 주는 게 너무 늦는 거 아니냐?
타마린느 성격이라면 분명 내 생일 전에 진작 서신을 보내서 양해를 구했을 텐데.
타마린느는 로잔티나의 1황녀로, 1황자 유클레드와 쌍둥이 남매였다. 내 생일 연회에는 방금 이 녀석이 말한 이유 때문에 불참했다.
“그렇구나. 수행인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
하지만 딴죽을 걸기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1황자는 그래도 자신이 연장자라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뒷북으로 약간 서먹한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넌 연회 이후로 어떻게 지냈지?”
난 딱히 1황자랑 친분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파하’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충 답했다.
“그냥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으음, 그래…….”
화제가 벌써 고갈되었는지, 1황자가 말문이 막힌 듯이 침묵했다.
짜식, 쓸데없이 애쓰지 말고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나한테 이용이나 당해라.
“지금 심심하지?”
“뭐? 아니…….”
“나랑 같이 밖에 나가자!”
“어? 지금?”
“응, 지금!”
내가 자리에서 홀랑 일어나자, 1황자도 얼떨결에 날 따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어디 가려는 건데?”
“아, 일단 그냥 와봐.”
내가 시키면 넌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하는 일은 다 너도 좋고 나도 좋자고 하는 일이란다.
“황녀님, 황자님, 어디 가셔요?”
“우리 후원 가서 놀 거야! 오빠 있으니까 안 와두 돼.”
“어머.”
문 앞에 서 있는 궁인들에게 말한 뒤, 1황자와 친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손까지 덥석 붙잡았다.
혹시 뿌리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다행히 1황자는 움찔하기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오빠랑 둘이 비밀 얘기할 거니까 부를 때까지 오면 안 돼!”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 궁인들을 뒤로한 채 1황자를 데리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너, 손…….”
1황자가 나한테 끌려 오며 입을 열었다.
놓으라는 건가?
흥, 역시 오래 참진 못하는구먼.
하지만 나도 더 잡고 있을 마음은 없단 말이다.
애초에 네가 좋아서 잡은 것도 아니고.
“놨어. 됐지?”
난 방 앞에 있던 궁인들의 눈에서 벗어나자마자 잡고 있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러고 나서 1황자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아주 잠시 후, 1황자가 날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작게 ‘……으라는 건 아니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밝은 빛이 쏟아졌다.
뒤에 1황자를 금붕어 똥처럼 달고 초록색 길을 걸었다.
금붕어 똥은 지금 상황이 여전히 어색하고 또 약간의 불만도 있는 듯했으나 그래도 반항하지 않고 일단은 순순히 날 따라왔다.
‘생각보다 말을 잘 듣네. 이번엔 내가 직접 구해줘서 그런가?’
사실 지난 두 번의 생에서는 생일 연회장에서 1황자를 내 손으로 직접 구해주지 못했다.
1회차 때는 느닷없이 빙의한 여파로 얼타느라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마수가 1황자를 덮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다쳤고, 당연히 나하고는 초반 호감도를 형성할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신관을 불러 1황자의 외상은 금방 치료되었지만, 정신적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했다고 들었다.
난 그때 1황자의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왜냐고?
빙의 후에 현실 부정기를 겪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새가 없어서 그랬지.
현실 부정기를 끝낸 후에는 말했다시피, 녀석에게 뼈만 수차례 맞다 끝났었고.
그래도 2회차 때는 한 번 경험이 있어서 1황자를 제때 구해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근위대 기사를 대신 보내서 그런가?
글쎄, 이 괘씸한 놈이 날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더라.
그래도 곁다리로나마 도움이 되긴 해서 그런지, 나중에 1황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 절반 정도는 그의 덕을 볼 수 있었다.
‘흥. 지금은 어쨌거나 날 생명의 은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때가 됐을 때 좀 더 유익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그때, 잠자코 나를 따라오던 1황자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문을 표출했다.
“그런데 지금 어딜 가는 거지? 후원에서 놀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후원을 지나쳐 담벼락이 있는 구석으로 향하는 걸 이제야 눈치챘나 보다.
“여기야, 이제 다 왔어!”
마침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했던 참이라, 난 눈앞에 있는 무성한 담쟁이덩굴을 걷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