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4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47화(147/207)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었지? 둘이 막상막하였는데?
갑자기 너무 장르 이탈 같은 장면을 봐서 그런지 잠깐 넋이 나갔었군.
“아, 앗! 시험, 정답, 저도 아는데! 갑자기 재채기가, 단상이……!”
아이작도 뒤통수 박살의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모르페우스의 멋짐에 진한 여운을 느끼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망가진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그는 잠깐 승패를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부들거렸다.
하지만 곧 ‘크흑!’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년 만화 속 주인공이 라이벌에게 하는 대사를 내뱉었다.
“제, 제가 졌습니다! 운도 여신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라는 말이 있지요……. 제 신심이 아직 부족했었나 봅니다. 게다가 모르페우스 신관님은 뛰어난 실력과 인성까지 갖추고 계시니……. 이 아이작이 졌습니다. 큽.”
눈까지 질끈 감은 아이작의 모습에서 그득그득한 아쉬움과 미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과연 누구보다 데메테아의 신도다운 신관답게, 더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승복했다.
“특히 인성에 대한 부분은 제가 모르페우스 신관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동안 신의 교리에 맞지 않는 의심 어린 시선으로 모르페우스 신관님을 보고 있었던 점, 이 기회에 같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이 왜 이렇게 모르페우스 대신 황궁에 들어오려고 혈안이 되었나 했더니, 내심 그를 향한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엑스트라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남주인공과 같은 핏줄을 타고났다 이건가?
의외로 아이작은 예리한 촉을 가지고 있었다.
“나야말로 좋은 승부였네, 아이작 신관. 여신께서 그대의 신심을 알아주실 것이네.”
“모르페우스 신관님……!”
어쨌든, 겉보기에는 제법 훈훈한 장면이었다.
나는 모르페우스가 황궁에 남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결과가 이렇게 되자 살짝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아델 누나, 혹시 다른 신관님을 응원했어요?”
“으, 응? 아냐.”
내 표정을 살피던 제르카인이 조용히 소곤거렸다.
사실은 맞지만, 아까처럼 혹시 또 모르페우스가 제르카인의 말을 듣고 흑화해서 성가시게 굴까 봐 일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아련해지는 눈빛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 밤톨 신관이 지다니, 다 끝났어…….”
루벨리오는 아까부터 손에 땀을 쥐고 아이작을 응원하다가 망연자실해진 눈치였다.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이 서둘러 일어나서 신관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추켜세웠다.
“신관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 참, 두 분의 열의와 의욕이 돋보이는 명승부였습니다.”
“여신의 성언을 전하기 위한 일이니 이 정도 열의는 당연하지요. 자, 그럼 다음은 학자님들 차례입니다. 단상 위로 올라오십시오.”
“예?”
“양해해 주신 덕분에 저희 신관들의 선발을 먼저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과목의 교사 선발을 위한 시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에?”
아이작의 말에 학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아니, 그게 무슨……. 다른 과목 시험이라니요?”
“예?”
이번에는 신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스트리움의 다른 학자님들도 오늘 저희와 함께 공개 선발 시험을 볼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 저희가요? 금시초문입니다만.”
“그럴 리가요?”
학자들의 떨떠름한 반응에, 신관들이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공문으로 떡하니 적혀 있는데요.”
“공문?”
한 신관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매 속에서 접힌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꺼냈다.
“오늘 황족 자제분들께서 수학하실 각 과목의 교수진을 모두 공개 시험으로 선출할 거라고 이렇게 버젓이 쓰여 있지 않습니까? 다만 저희 신관들은 아스트리움에 속해 있지 않으니 알아서 선출 방법을 정해 오라고 하셨지요.”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이 깜짝 놀라서 신관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당연했다.
거기에는 신관들의 말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을 테니까.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런 공문을 애초에 아스트리움에서 보냈을 리도 없고요!”
“뭐야, 저희도 똑같은 걸 받았는데요?”
“1황자님?! 황자님도 공문을 받으셨다고요?”
학자들이 웅성거리며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 내 이부 형제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희도 오늘 신관님들과 학자님들이 같이 선발 시험을 보실 거라고 알고 왔어요.”
“여기에 아스트리움의 도장도 찍혀 있는데요?”
타마린느와 제르카인이 꼼꼼하게 챙겨 온 종이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정말 떡하니, 아스트리움을 상징하는 날개 모양의 도장까지 박혀 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오직 그 아스트리움에 속한 학자들뿐이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학자들은 서둘러 공문의 내용을 부정했다.
“아무튼,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애초에 아스트리움에서는 따로 시험을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아니, 그럼 아스트리움에서는 각 과목의 교수들을 어떻게 선출합니까? 아스트리움에 공석이 생기면 이름을 올리기를 바라고 모여드는 학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저희는……. 아스트리움만의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뭐긴 뭐냐? 돈이지!
아스트리움의 낙하산들이 일순간 말문이 막힌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신관들은 당황한 낯빛을 한 학자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어쨌든, 저희 신관들은 이미 공개적인 선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니 아스트리움에서도 똑같이 해주셔야 합니다.”
“애초에 아스트리움에서 이런 공문을 받지 않았다면 저희도 이렇게 두 분 신관님을 보란 듯이 단상에 세우지 않았을 텐데요. 왜 저희 신관들만 구경거리가 되어야 합니까?”
“설마 이제 와서 일부러 공문 내용을 모른 척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런 걸 세속의 언어로 텃세라 하던가요? 이런 부조리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허 참, 역시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황도……!”
신관들이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며 웅성거렸다.
학자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그들이야말로 이대로라면 분위기에 휩쓸려, 눈 뜨고 코 베이듯이 졸지에 모두의 앞에서 공개 시험을 봐야 할 판이었으니까 말이다.
차라리 어린 황녀, 황자들만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잘못 보내진 공문이라 우기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가능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신관들이 이미 공개 선발 과정을 마친 후라 곤란했다.
신관들을 더 화나게 해서 척을 져 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관들은 은근히 끈질기고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지금도 공문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약속을 지키라고 아우성치는 중이었다.
당연히 학자들로서는 당황스럽다 못해 속이 터지고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지금 당장 시험을 보는 건 곤란합니다. 저희는 정말 공문을 보지 못해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마, 맞습니다. 신관님들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저희의 사정도 헤아려 주십시오. 배려와 이해 또한 신께서 전하신 덕목이 아닙니까?”
아무리 낙하산이라 해도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이 멍청이는 아니라, 그들은 금방 신관들의 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왔다.
과연 교리의 내용을 지적하는 말에 신관들이 주춤했다.
“흠,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말고, 내일 이 시간에 아스트리움의 학자님들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내일은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이러시면 저희도 난처합니다. 애초에 저희는 원래 이런 식의 공개 시험을 보지도 않는데…….”
“참,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십니까?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는 법입니다. 저희도 했으니, 학자님들도 이참에 시도해 보시면 되지요. 신께서 새로이 도전하지 않는 인생은 흐르지 않는 고인 물웅덩이와 같다 하셨습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신도님.”
“아, 하하…….”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샐쭉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유클레드 오빠, 곧 지혜의 날이잖아?”
“응? 그렇지.”
내가 말을 걸자 유클레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쳐다봤다.
“그럼 선생님들은 학자답게! 지혜의 날에 지식을 겨루면 딱 좋겠다. 그치?”
일부러 들으란 들이 목소리를 키워서 말하자, 신관들과 학자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마침 그날은 우리가 시험을 보는 날이기도 하니까, 선생님들이 먼저 본보기를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아?”
유클레드가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한순간 눈에 흥미롭다는 듯한 이채를 띠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흐음, 그렇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시험을 보고 신관님들도 시험을 보는데, 선생님들만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스트리움에서도 그래서 이번부터 방침을 바꾸려고 한 건데 전달이 잘 안 된 건가?”
눈치가 제법 비상한 알렉시아도 웃는 얼굴로 옆에서 동조했다.
“유클레드 오빠랑 아스포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도 문제 출제 같은 게 금방 되는 건 아닐 테니까 내일 당장 시험을 보는 건 어렵겠지. 지혜의 날 정도면 적당할 것 같네.”
학자들은 신관들의 등쌀에 떠밀려 내일 당장 시험을 보느니, 차라리 시간이라도 좀 버는 게 낫다고 생각한 듯했다.
“황자님, 황녀님들 말씀이 맞습니다. 곧 지혜의 날이 다가오지요. 저희도 그날 함께하겠습니다.”
“흐음, 나쁘지 않군요. 저희도 지혜의 날에는 어린 황녀님, 황자님들께 축복을 내려드리러 다시 황성에 올 테니까요. 그럼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난데없이 팔자에도 없던 공개 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떫은 표정을 짓는 학자들을 보며 비죽이 웃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