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5)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5화(15/207)
연회장에서 나온 신관이 1황자를 알은척했다.
지금 마주친 신관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한 갈색 머리칼에 그보다 색이 옅은 연갈색 눈.
세속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선량한 인상.
평범함과 무난함을 평균치 내면 딱 이렇게 생겼을 것처럼, 어디로 보나 엑스트라 같은 외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모브 캐릭터였다.
소설 초반의 생일 연회 사건 때 황성에 와서 마수의 피로 더럽혀진 공간을 정화해 주고 부상자를 치료해 주는 신관.
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둘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번에 손목과 다리를 삔 1황자를 직접 치료해 준 것도 이 신관이었나 보다.
“조금 전, 이 앞에서 마석을 주웠습니다. 아마 정화 후에 실수로 수거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1황자의 말에 신관이 깜짝 놀랐다.
그런데 1황자에게서 마석을 전해 받은 신관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1황자님. 이 마석, 어디에 떨어져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저기쯤에.”
“황자님이 가장 처음 발견하셨습니까?”
“아니요, 그걸 발견해서 주운 건 아스포델입니다.”
“아스포델이라면……. 3황녀님이?”
갑자기 엑스트라 신관이 날 휙 돌아봤다.
“정말 황녀님이 이 마석을 직접 주우셨습니까?”
뭐, 뭐지?
눈빛에 반짝임이 과한 게, 꼭 슬라임 눈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황궁에서 열렸던 연회가 3황녀님의 생신을 맞이해서였지요?”
“그렇습니다만…….”
1황자도 신관의 이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엑스트라 신관은 ‘호오, 호오!’ 하는 촐싹 맞은 소리를 내며 혼자 무언가에 감탄하기 바빴다.
“3황녀님, 혹시 이 마석을 주우실 때 색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앗차!
신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난 내 실책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신관들도 마석의 사기와 독기는 단번에 정화하지 못하지!’
그러니 만약 이 마석이 진짜 여기에 떨어져 있던 게 맞다면, 이곳을 정화할 때 한 번 그 기운을 받아들인 마석은 지금 같은 순백색이 아니어야 했다.
‘헐, 지난 생에 성녀일 때 내 슈퍼 파워로 마석을 단숨에 정화하는 데 익숙해져서 다른 신관들의 능력치는 그 정도가 안 된다는 걸 그만 깜빡했네.’
“아니, 원래 이 색이어써요!”
난 그냥 우기기로 했다.
우기는 데 장사 없다는 옛말이 괜히 있겠어?
“그럴 리가 없는데…….”
“조오기! 조오기 떨어져 있었는데 하얀 보석이 반짝여서 내가 가서 주워써! 근데 오빠가 보석이 아니라 마석이라고 신관님 줘야 한대써!”
내가 뻔뻔하게 나가자 신관도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흠, 그러십니까? 이상하다…….”
에잇, 엑스트라가 뭘 그렇게 따져?
어차피 소설에서도 한 페이지 컷으로 등장했던 양반이 말이야.
다행히 신관은 엑스트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따지지 않고 마석을 챙긴 뒤 우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 마석은 저희 신관들이 실수한 게 맞는 것 같군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는 동안에도 계속 나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신관님이 왜 저러시지?”
1황자가 그런 신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쯧, 이미 떠난 엑스트라를 아련히 쳐다봐서 뭘 하나.’
난 신관을 더 신경 쓰지 않고 1황자의 팔을 아까처럼 찹 붙잡았다.
“앗.”
그러자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가 흠칫하며 날 내려다봤다.
난 1황자에게 그의 짐작이 맞다는 사실을 기꺼이 알려 주었다.
“나 업어.”
“…….”
“나 업고 우리 궁으로 다시 가!”
“하, 그래…….”
그렇게 터덜터덜 걷는 1황자의 등에 업혀 난 우리 궁까지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도 참으로 보람찬 날이었다.
side
1황자 유클레드와 신관 아이작
그날 밤.
“오늘은 일찍 쉬어라, 유르.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는구나.”
“예, 아버지도 쉬세요.”
한 소년이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책을 펼쳤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금발. 진중한 빛을 띤 초록 눈.
1황자 유클레드였다.
유클레드는 책상 앞에 앉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며 책을 읽다가 문득 아까 낮의 일을 떠올렸다.
유클레드의 밑으로는 이부 형제들이 몇 명 있었지만 쌍둥이인 타마린느를 제외하면 그중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 다른 궁에서 초대장이 오면 예의상으로 한 번씩 방문해 짧게 시간을 보내다 오기도 했다.
하지만 유클레드가 먼저 원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그가 먼저 다른 이부동생을 찾아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원래 세상만사 다들 서로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 아니겠어?’
‘그냥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아까 본 것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제 고작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보인 그 세상사 다 살아본 듯한 염세적인 얼굴과 말투라니.
겁 없이 마수 앞에 뛰어나와 그를 밀쳤을 때부터 보통 어린애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스포델은 생각보다 훨씬 특이한 아이였다.
“생긴 건 그렇게 작고 귀여운데…….”
무심코 혼자 중얼거린 유클레드가 책장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까 아스포델이 복도에서 갑자기 덥석 붙잡았던 손이었다.
‘손도 엄청 작고 말랑했지.’
어린애들 손은 원래 다 그런가?
그 따끈하고 말랑한 감촉이 무척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스포델이 그의 손을 놨을 때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누군가를 등에 업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기분이 영 낯간지럽고 이상했다.
‘나 업어.’
‘뭐?’
‘업어.’
그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던 강렬한 푸른 눈이 떠올라 유클레드는 또다시 무심코 오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여간 이상한 애야.”
이내 유클레드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그런 뒤,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로도 유클레드의 입술은 가끔씩 작게 움찔거렸고, 그의 손에 잡힌 책장은 오랫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았다.
* * *
“이상하군, 이상해…….”
같은 시각.
갈색 머리칼과 눈을 가진 선한 인상의 젊은 신관 한 명이 혼자만의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까 황궁 연회장 앞에서 유클레드와 아스포델을 마주했던 신관 아이작이었다.
명상하듯이 침대 한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앞에는 하얀 마석이 놓여 있었다.
아주 완벽하게 정화되어 사기라곤 티 한 점 남지 않은 순백색 마석.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정화가 덜 끝나 회보라색을 띤 마석이 놓여 있어, 흰 마석과 더욱 대비가 되었다.
신관들이 황성에 침입했던 마수들의 시체에서 수거해 정화 중인 마석은 역시 유클레드가 준 것처럼 깨끗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아까 만난 두 황족 자제를 떠올렸다.
1황자 유클레드와 3황녀 아스포델.
분명 두 아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석이 이런 색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꾸만 둘 중 한 사람이 이 마석을 정화시킨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중 더 높은 확률로 의심이 되는 건 3황녀 아스포델 쪽이었다.
‘……마침 신탁의 주인공도 황족분인 듯했고. 혹시 그분이 이번에 내려온 신탁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순간 아이작의 갈색 눈에 반짝이는 빛이 돌았다.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 대신전에 실로 기적적으로 내려온 신의 음성이 있었다.
그러나 신탁의 내용은 그것을 직접 받은 사람이 공개하지 않는 한 자세히 알 수 없었기에, 아이작도 전체적인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디 그분께서 신이 내린 구원이라면 좋을 텐데…….’
아이작은 눈을 감고 두 손을 간절히 모아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일 새벽 일찍 황성을 떠나, 신탁을 받은 당사자인 그의 어린 조카에게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듯했다.
Chapter 6
네가 고자질하는 것보다 내 주먹이 더 빨라! (2)
“황녀님, 오늘도 화원 쪽으로 놀러 가실 건가요?”
다음 날, 나는 마가렛과 함께 외출했다.
어제 1황자와 함께 숨겨진 비밀 문으로 궁 밖에 나갔던 건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래도 마침 궁인들이 아버지들의 명으로 우리를 찾아 후원을 돌아다니고 있을 무렵이라 하마터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어제의 경험으로 난 이 짧은 다리로 혼자 밖을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자꾸만 나이가 들었을 때를 기준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다섯 살 어린애 몸이 생각보다 더 약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마가렛을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혼자 궁에 두고 마가렛과 다른 수행인들만 동행했다.
아버지는 나한테 선택받지 못해서 몹시 서글퍼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섯 살 생일을 맞아 급격히 독립성을 키우려 하는 딸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촉촉한 눈을 아련히 빛내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마가렛, 잠깐만 기다려 봐!”
난 오늘도 데리고 나온 키노를 향해 속닥거렸다.
“키노, 피오 냄새 좀 맡아봐. 지금 어디 있는 것 같아?”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