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51)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51화(151/207)
“황녀님, 동생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
“아, 됐어, 됐어. 오랜만에 보는데 그런 딱딱한 얘기나 할 거야? 시간도 얼마 없는데 빨리 여기 앉기나 해.”
나는 레예스의 말을 막으며 다시 옆자리를 두드렸다.
“모처럼 둘만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끼워 넣지 말고 우리 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레예스는 안 그래?”
음? 그런데 말하고 보니까 왠지 내용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익숙하다?
아, 맞다. 카일 녀석에게 방금 들은 소리와 좀 비슷하군.
물론 나는 레예스를 꼬드기려는 흑심을 품고 일부러 플러팅을 날린 게 아니지만 말이지.
이 몸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당연히 레예스도 나를 오해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황녀님은 여전하시네요.”
그는 이온 음료 광고의 아역 모델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청량한 미소를 옅게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네, 그럼 지금부터는 우리 둘 얘기만 하지요. 저도 그게 더 좋으니까요.”
족제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레예스의 다리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히야, 좋은 냄새. 난 역시 방금 걔보다 얘가 더 좋아!] [나도. 바스티온의 둘째도 귀엽긴 했지만.] [티타니아가 하는 말에 의하면 연하는 발칙하고 도발적인 매력이, 연상은 안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매력이 있다고 했어! 그 말이 정말인가 봐!] [그렇게 따지면 앤디미온이 우리 중에 제일 연상인데?] [앗, 진짜네……! 에이, 그럼 이거 틀린 말이네.]족제비들은 나나 모르페우스가 가진 신성력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레예스에게도 곧잘 친근하게 달라붙어 있는 편이었다.
물론 레예스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만든 성력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나와 비슷한 냄새가 좀 나는 모양이었다.
“몸은 좀 어때?”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레예스의 말에 혀를 찼다.
내가 서슴없이 손을 붙잡자, 레예스가 잠깐 멈칫했다.
“다른 사람 올 때까지는 잡고 있자. 그래도 직접 닿는 게 효과가 빠르잖아.”
나는 레예스의 손을 꽉 움켜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폈다.
다행히 다른 수행인들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도 꽃 덤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러려고 벤치로 온 건 아니었는데, 카일이 또 본의 아니게 자기 형을 도와준 셈이었다.
참나, 그런데 카일 녀석.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황당하잖아?
내가 빙의 1회차 때, 중반까지는 원작 루트 좀 타보려고 그렇게 친한 척 들이대도 철벽 방어하더니.
알고 보니 그 녀석의 공략법은 형인 레예스였던 건가?
방금 카일이 나한테 고백도 아닌 선전포고를 날릴 걸 떠올리자 더욱이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무심코 조금 전의 일을 잠깐 상기하다가, 문득 손에 잡히는 느낌이 묘하게 이상해서 고개를 숙였다.
“우와, 그런데 레예스. 손 크기가 1년 전이랑 좀 다른 것 같네? 검술 연습도 열심히 했나 봐, 손바닥도 더 단단해졌어. 참, 키는 얼마나 큰 거야? 나도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분발했는데, 레예스보다는 덜 자란 것 같아.”
나는 신기한 마음에 레예스의 손을 여기저기 살피며 주물럭거렸다.
그냥 보면 손가락이 길쭉길쭉하고 손톱도 예뻐서 마냥 우아하고 고운 귀공자의 손인 것 같은데, 막상 직접 만져 보니 느낌이 달랐다.
이건 제법 육체 단련을 즐기는 유클레드와 비슷한 느낌의 손 아닌가?
우왁, 게다가 팔에도 나름대로 근육이 잡혀 있잖아?
물론 아직은 덜 성숙한 소년인 만큼 완전히 눈에 띄게 두드러진 근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근육은 근육이었다.
와아, 레예스 그렇게 안 봤는데…….
바스티온에서 지난 1년 동안 뭔가 혹독한 단련을 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만지시면 조금 부끄러운데요.”
내가 손에 이어 팔까지 쿡쿡 누르면서 만지작거리자, 레예스가 살짝 난감한 듯이 웃었다.
“진짜? 부끄러워? 그래도 좀 더 만지고 싶은데.”
나는 괜히 짓궂은 기분이 들어서 레예스를 놀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레예스는 놀리는 재미가 없는 강적이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처럼 짐짓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더 만지세요. 황녀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에 찰 때까지 마음껏 만지셔도 돼요.”
오, 뭐야. 이런 부분까지 업그레이드됐군.
원래도 내가 원하면 나한테 몸도 마음도 다 줄 것처럼(?) 굴던 녀석이긴 했지만, 지금은 한술 더 뜨는 느낌이었다.
나도 진짜 레예스를 더 주물럭거릴 생각이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얌전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나 얘기해 봐.”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레예스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레예스가 1년 전 바스티온으로 돌아간 건, 선대 바스티온 가주인 그의 조부가 영면에 들 때가 되어 마지막으로 손자를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레예스의 조부는 그 후로 반년 이상을 더 살았다.
물론 그건 좋은 일이었지만, 레예스의 황도 귀환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예스는 조부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바스티온의 후계자로서 영지에 머무느라 바로 나한테 돌아오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레예스를 이렇게 무리시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레예스의 몸 상태가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져서 바스티온에서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레예스가 지난 1년 동안 바스티온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알 것 같아서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레예스는 지금 언뜻 보면 거의 보통 사람 같았지만, 사실 여전히 눈이 잘 안 보였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겉으로 위화감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물론 내가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면서 상태가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완치는 요원했다.
다만 예전에 레예스는 시력뿐 아니라 온몸의 감각이 전부 다 서서히 죽어가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내가 도와주면서 그런 부분이 전반적으로 나아지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레예스가 1황자 유클레드의 놀이 친구로 처음 황궁에 드나들기 시작해, 아스트리움에서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진작 눈치챘지만 그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지금 레예스의 손에 이만큼이나 굳은살이 박이고 몸을 단련한 티가 나는 것도, 신체의 불균형을 이겨내고 그가 얼마나 성실히 노력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궁금해하셨던 녹색 빙벽이요.”
그렇게 나는 레예스를 대견해하다가, 이어지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영지를 떠나는 당일까지도 제가 직접 가서 살펴봤지만, 말씀하신 균열이나 빙벽이 녹는 것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았어요.”
“레예스가 서신에서 말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뭔데?”
내 물음에 레예스가 어딘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미묘한데, 녹색 빙벽에 나비 떼가 몰려들더군요.”
“나비 떼?”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살짝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네, 하지만 거대한 규모는 아니라 기현상이라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또 어쩌다 한번 일어난 일일 뿐이라서요.”
레예스의 말을 듣고 나도 아리송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말했다시피 바스티온의 녹색 빙벽은 숲이 통째로 얼어붙은 것이다.
그래서 혹여 나비 떼가 몰려든 것을 빙벽이 녹을 징후로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경계심이 들었다.
“어쩌면, 혹시 이것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레예스가 무언가를 챙겨 온 듯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손끝을 작게 움찔거렸다.
하늘색 깃털 모양으로 생긴 저 눈에 익은 꽃은…….
“클로비스 꽃이네.”
“보고를 받고 녹색 빙벽에 가 보니, 그 앞에 흩뿌린 듯이 놓여 있더군요. 나비 떼도 그 주변에 모여 있었어요. 누군가 일부러 가져다 둔 것 같은데, 바스티온 영지 사람 중에는 녹색 빙벽에 굳이 가까이 다가갈 사람이 없어서……. 하지만 어쩌면 지나가던 여행자가 의미 없이 한 일일 수도 있지요.”
레예스가 왜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고 했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나는 레예스의 손수건에 싸여 있던 클로비스 꽃을 들어 올렸다.
클로비스 꽃은 여러 조건이 맞아야만 피어나는 식물이라, 모든 신수 서식지에 자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희귀한 꽃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연인가?
어째서인지 얼마 전에 황궁 근처의 신수 서식지에서 만났던 묘한 분위기의 소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스티온에 남겨두고 온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저 대신 녹색 빙벽을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라고 명했는데, 혹시 달리 조치를 취할 부분이 있을까요?”
“아니, 일단은 그 정도면 돼. 잘했어. 혹시 모르니까 이건 내가 갖고 있어도 돼?”
“얼마든지요.”
레예스가 가져온 클로비스 꽃을 손수건에 다시 감싸고 시선을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곧 유클레드와 카일이 돌아올 것 같기도 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