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5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56화(156/207)
시간은 흘러 드디어 지혜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다른 황녀, 황자들처럼 공부에 열 올리지 않고 일개미들 옆에서 게으름 부리는 베짱이처럼 혼자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아스포델, 너 진짜 공부 안 해? 어려운 과목 있으면 내가 봐주겠다니까.”
“유클레드 오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야.”
“너……. 휴, 그래. 넌 아직 열 살 애기니까. 차라리 지금 놀아두는 것도 괜찮겠지.”
이 녀석이? 자기는 열 살 때 다 자란 어른인 척했으면서 나는 또 애기 취급이야?
“유르 오빠, 아스포델한테 시험 얘기는 그만해.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그런 걸로 압박감을 느끼면 가엽잖아.”
나는 유클레드에게 또 한번 애기의 주먹맛을 보여주려고 했으나, 운이 좋게도 옆에서 타마린느가 끼어들어서 유클레드는 내 응징을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나이 때 공부하기 싫은 건 너무 당연한 거야. 나도 휴식 시간에까지 시험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걸?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공부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
나는 타마린느의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카락을 내준 상태로 ‘옳소, 옳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버베나 궁의 휴식실.
나는 유클레드, 타마린느 쌍둥이 남매와 함께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황족들만 듣는 합동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제왕학에 속하는 과목이라, 황족들과 함께 아스트리움의 수업을 듣는 다른 귀족 자제들은 오늘 아예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
“아스포델은 어쩜 이렇게 머리카락이 부드럽고 예뻐? 꼭 백조 깃털 같아.”
그리고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에 타마린느는 이렇게 옆에서 내 머리카락을 땋으며 놀고 있었다.
알렉시아는 우리와 있다가 어느 교수가 불러서 잠깐 자리를 비웠고, 루벨리오와 헬리만은 애초부터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나도 가만히 앉아 인형 취급을 당하는 건 좀이 쑤셨지만, 이러면 시험공부에 대한 스트레스트가 풀린다고 해서 그냥 타마린느에게 흔쾌히 머리를 내주고 있었다.
“타마린느 언니가 더 예뻐. 언니 머리카락은 꼭 글로리오사 꽃 같은걸.”
사이좋게 주고받은 덕담에 타마린느가 빙긋이 웃었다.
“정말?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 글로리오사도 장미처럼 빨간 꽃인가 보네. 어떤 꽃인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꽃인데 글로리오사는 ‘빛나다’라는 어원에서 붙은 이름이래. 꽃잎이 불꽃 모양이야.”
물론 타마린느야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황녀님이라는 말을 어디에서나 듣고 있었지만, 나는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이 꽃이 그녀와 더욱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꽃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장미도 좋지만, 내 생각에 타마린느 언니는 밝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글로리오사를 더 닮은 것 같아.”
나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내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누비던 타마린느의 손이 문득 멈췄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어째서인지 타마린느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서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녹음이 담긴 듯한 녹색 눈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작게 일렁였다.
하지만 뒤이어 유클레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낸 순간, 타마린느는 시선을 내리깔아 내게서 눈빛을 감췄다.
“난 공개 시험 때 혹시라도 아스포델이 속상해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너도 우리 첫 시험 때 생각해 봐.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유클레드는 진심으로 내가 걱정되는지 부진아를 보는 듯한 염려 섞인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또 나를 살짝 울컥하게 만들어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타마린느가 다시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에 리본을 마저 묶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뜻 모를 감정적 동요가 완전히 가신, 유클레드와 닮은 우려 섞인 어두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그러네……. 그럼 유르 오빠. 우리가 열 살 때 시험 본 내용을 기억해 내서 알려주면 어때? 물론 선생님이 다르니까 똑같은 문제가 나오진 않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타마린느, 너……. 괜찮은 생각인데? 지금 생각나는 문제 있어?”
“음, 으음…….”
유클레드의 물음에 타마린느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휴식 시간에 시험 얘기를 하지 말자고 방금 말했던 걸 잊었는지, 어느새 유클레드와 머리를 맞대고 기억을 쥐어짜고 있었다.
“잠깐만, 벌써 5년 전 일이라서……. 아! 첫 시험 때 봤던 첫 번째 문제는 생각난다. 경제학 과목이었는데.”
“나도 제일 어려웠던 문제는 생각나. 그런데 너무 일부라서……. 열 살 때 우리가 뭘 배웠더라?”
“책을 보면 기억날 것 같기도 한데.”
“맞아, 아스포델! 네 책 좀 보여줘 봐. 우리가 대충 훑어보고 시험에 나올 만한 것만 찍어줄게.”
두 사람이 반짝이는 눈을 나한테 돌리자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 그렇게까지 내 시험 성적이 걱정되더냐?
이만큼이나 나를 생각해 주다니 감격스럽긴 한데, 왠지 좀 머쓱하기도 했다.
“아니, 아니! 진짜 괜찮거든.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때랑 지금은 배우는 것도 다르고 선생님들도 달라서 괜히 헷갈리기만 할걸?”
“그것도 그런가?”
쌍둥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고 싶었는지, 내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긴, 지금은 우리 때랑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해. 선생들도 예전에 비하면 별로 엄격하지 않은 것 같고. 게다가 나나 타마린느 때에 비하면 확실히 공부하는 내용이 쉬워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공부하면 분명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휴우.”
유클레드는 꼭 ‘라떼는 말이야~’ 하고 옛 시절을 반추하는 꼰대처럼 아련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애들은 아직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되겠지. 어차피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시험에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되니까. 루벨리오도 그렇고 헬리만도 요즘 시험공부는 거의 안 하는 것 같던데…….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유클레드도 나름대로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는지, 우리가 부럽다는 듯이 한탄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동생들이 들었다면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을 소리였다.
헬리만이야 먹는 것 말고는 관심이 하나도 없는 녀석이라, 당연히 시험공부도 알렉시아가 억지로 시키는 것만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루벨리오는…….
나는 지난번에 빈 교육실에서 본, 공부한 흔적이 빼곡하던 루벨리오의 책을 떠올렸다.
그때 나한테 공부하는 모습을 들킨 이후로 루벨리오는 교육실에서 쉬는 시간에도 한 번도 따로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아예 시험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매번 느긋하고 한가한 모습만 보였다.
그래서 다른 이부남매들은 루벨리오가 시험을 앞두고도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들과 좀 다른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이건 루벨리오의 예민한 부분인 듯해서 그냥 말을 돌렸다.
“유클레드 오빠,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아저씨 같아.”
“뭐? 오빠한테 아저씨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소리를 할 수 있어? 이 오빠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유클레드가 엄살을 떠는 걸 보며 나는 혀를 쯧쯧 차고, 옆에서 타마린느는 평소처럼 그런 우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너지?! 네가 가져갔지?”
불현듯 휴식실 밖에서 누군가가 격양된 어조로 언성을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방금 우리 사이에서도 잠깐 얘기가 나왔던 루벨리오의 것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의아하게 시선을 마주한 뒤 휴식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육실 앞을 지나가는 널 봤다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어디에 숨겼는지 빨리 말해.”
“루벨리오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 아델 누나를 찾고 있었을 뿐인걸요…….”
어? 루벨리오와 제르카인이잖아?
“거짓말하지 마. 네가 그동안 나한테 엿 먹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걸 모를 줄 알아?”
“루벨리오 형님이 저를 싫어하시는 건 아는데,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는 말아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 어째서인지 화가 난 루벨리오가 제르카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르카인은 루벨리오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 봐도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루벨리오는 오히려 그런 제르카인의 모습에 더욱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하, 누명? 네가 아무리 착한 척 내숭을 부려도, 내 눈은 못 속여! 내가 전에 말했지? 난 너에 대해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아스포델은 지금 아무것도 몰라서 널 옆에 두고 있지만, 분명 너는 나중에……!”
하지만 루벨리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그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던 제르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뭐요? 전부터 저도 궁금했어요. 루벨리오 형님이 도대체 저에 대해 뭘 알고 계신데요?”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