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5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59화(159/207)
하지만 눈을 한번 깜빡인 사이에 소년의 얼굴에 서려 있던 서늘함은 감쪽같이 사라져서, 그림자 때문에 잘못 봤겠거니 싶기도 했다.
제르카인은 늘 내 앞에서 보이던 온화한 얼굴로 나를 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델 누나, 루벨리오 형님이 잃어버린 거 저도 같이 찾을게요.”
“아까 안색이 안 좋아 보였는데 그냥 쉬지 않고?”
“그래도요. 루벨리오 형님이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돕고 싶어요.”
“그래? 우리 제르 기특하네. 형이랑 누나도 도울 줄 알고.”
나도 평소처럼 제르카인을 우쭈쭈 칭찬해 줬다.
루벨리오는 그걸 보고 울컥한 듯했다.
그는 나와의 대화에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전투태세에 돌입해서 제르카인을 향해 사납게 이를 갈았다.
“웃기고 있네. 네 도움 따위는 필요없…….”
“아, 그냥 가만히 있어. 제르가 찾아준다잖아.”
루벨리오가 초를 치려고 하기에 입을 다물게 하고 다시 제르카인을 쳐다봤다.
“그럼 전 다른 교육실로 가서 찾아볼게요.”
“나도 같이 갈까?”
“아니에요. 루벨리오 형님이 많이 상심하신 것 같은데 아델 누나가 옆에서 달래주세요.”
“상심은 누가, 읍!”
제르카인이 어딘가 급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나는 루벨리오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루벨리오가 열 받은 듯이 씩씩거렸다.
“뭐야, 저 녀석? 지금 병 주고 약 주나? 뻔뻔스럽게…….”
“수업 시작하기 전에 책 찾고 싶으면 그냥 좀 가만히 있어 봐.”
그때부터는 나도 한가하게 쭈그려 앉아 소식을 기다렸다.
“2황자님, 찾았어요!”
역시나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루벨리오의 수행인이 꼭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환한 얼굴로 교육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진짜?! 찾았어? 어디서?”
“네! 창가 밑 화단에 떨어져 있었어요.”
“진짜 네가 찾은 거 맞아? 제르카인, 그 녀석이 너한테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그냥 제가 혹시 몰라서 주변을 뒤지다가 찾았어요!”
루벨리오는 수행인이 건넨 책을 재빨리 낚아채 확인한 뒤 의심스럽게 문밖을 기웃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큰 소리로 제르카인을 불렀다.
“제르, 루벨리오 오빠가 잃어버린 거 찾았대!”
“정말요?”
잠시 후 거리가 조금 떨어진 빈 교육실에서 작은 소년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내가 손짓하자 그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구, 먼지 좀 봐. 여기저기 열심히 뒤졌나 보네?”
나는 제르카인의 머리를 괜히 호들갑스럽게 탈탈 털어줬다.
제르카인은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다행이네요. 루벨리오 형님한테 많이 중요한 물건이었던 것 같은데.”
“아까 말했지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거든?”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남은 책을 수거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는지, 루벨리오가 아까보다 차분해진 얼굴로 제르카인을 쏘아봤다.
“그런데 찾으시던 건 어디에서 발견했어요?”
“창밖에 있는 화단에 떨어져 있었대.”
내 대답을 듣고 제르카인이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혹시 창가에 올려두셨다가 바람이 불어서 떨어진 걸까요?”
“창가에 올려둔 적 없어. 난 분명 책상에 뒀으니까.”
루벨리오는 여전히 제르카인을 의심하는지, 그에게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제르카인에게 뭐라고 더 하지는 않는 걸로 봐서, 이 이상 잘잘못을 따질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제르카인도 루벨리오에게서 바로 시선을 떼고 다시 내게 눈을 돌렸다.
내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는 제르카인의 눈빛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금방 찾아서 다행이다. 오늘은 날씨도 흐려서 비가 오기라도 했으면 화단에 있는 물건이 젖을 뻔했는데 말이야.”
“네……. 정말 다행이에요.”
“응, 제르가 도와줘서 더 빨리 찾은 것 같네?”
제르카인은 내가 웃고 나서야 안심한 듯이 표정을 폈다.
물론 지나가듯이 덧붙여진 내 말에 살짝 얼굴을 굳히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나쁜 사람이 루벨리오 오빠의 책을 가져가서 이상한 데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러게요.”
제르카인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전 유클레드 형이랑 타마린느 누나가 있는 휴식실에 먼저 가볼게요.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나온 거라서요.”
“아, 얘기 안 하고 왔어? 어쩐지 오빠랑 언니가 널 혼자 보낼 리가 없는데 같이 안 와서 이상했어.”
“네, 루벨리오 형님이 다른 사람한테 잃어버린 게 뭔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저도 그냥 조용히 도와드리려고 했어요.”
“그랬구나! 우리 제르는 참 배려심도 많지.”
나는 제르카인의 동그란 머리를 쓰담쓰담해 줬다.
제르카인을 키운 누나의 느낌상, 루벨리오의 책을 숨긴 건 역시 그가 맞는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제르카인의 행동을 잘했다고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루벨리오가 제르카인에게 얄밉게 굴었던 건 사실이었다.
또, 결국은 제르카인도 이렇게 먼저 와서 루벨리오의 책을 찾는 걸 도왔으니, 이번 한 번은 그래도 어린애의 심술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제르카인이 이렇게 내 눈치를 보며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오늘 한 일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은 나도 제르카인에게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제르, 그리고 아까 루벨리오 오빠가 너한테 한 말은 화가 나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래. 그러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
내가 속닥거리며 귓속말하자 제르카인이 살짝 크게 떠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금방 휴식실로 따라가겠다고 말한 뒤 제르카인을 먼저 보냈다.
루벨리오가 멀어지는 제르카인의 뒷모습을 보며 떨떠름하게 구시렁거렸다.
“저 녀석이 내 책을 숨겼던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역시 찝찝한 녀석이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네 앞에서는 온갖 착한 척을 다 하지만, 나한테는 예전부터 싸하게 굴었다니까.”
“에휴, 따지고 보면 루벨리오 오빠가 먼저 잘못했지, 뭘.”
“뭐, 뭐? 내가 뭘?”
“제르가 아직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루벨리오 오빠가 먼저 재수 없게 굴긴 했잖아.”
“재수 없……. 내가 언제!”
참나, 사람은 이렇게 스스로를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이 생겼지.
루벨리오는 또 아까처럼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나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그럼 아까 제르한테 귓속말로 이상한 소리를 속닥거린 게 잘했다는 거야?”
“이상한 소리라니,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본 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미래가 어쩌구, 나중에 네가 아스포델을 배신할 거고 어쩌구, 그런 소리를 한 게 그럼 잘했다는 거냐고?”
“그건…….”
루벨리오는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당혹감 어린 눈을 깜빡였다.
루벨리오도 역시 아까 제르카인에게 화풀이로 그런 소리를 한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내가 그 녀석한테 한 얘기를 아스포델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
그러다 문득 루벨리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 설마 그 녀석이 벌써 너한테 고자질했어? 역시 웃기는 놈…… 악! 아프잖아!”
“제르는 고자질 같은 거 안 해.”
“너, 너! 우리 아버지도 날 안 때리는데 또 나를……!”
루벨리오가 나한테 고작 딱밤을 한 대 맞아 놓고는 이마를 감싸며 요란법석을 떨었다.
“너…… 역시 착각하지 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 친해지고 싶기는 개뿔!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너같이 난폭한 애를 왜?! 절대로 내가 그럴 리가 없어!”
루벨리오는 열심히 현실 부정을 했지만, 나는 이미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 루벨리오 오빠,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네. 행복은 시험 성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
“시끄러워! 너처럼 공부라고는 하나도 안 하는 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아까 타마린느 언니가 한 말처럼 자꾸 그런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좀 마. 나중에 날 좋아하는 게 맞다고 인정하게 되면, ‘그때 더 잘해 줄걸’ 하고 오빠만 후회한다?”
“아악,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Side
제르카인과 모르페우스
제르카인은 유클레드와 타마린느가 있는 휴식실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햇빛과 그림자가 반씩 걸쳐 있는 복도에 선 어린 소년의 얼굴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말이 없던 제르카인의 눈동자에 이내 깊은 후회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아스포델이 생각하던 것처럼 조금 전에 자신이 저지른 짓을 반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르카인이 지금 후회하는 것은 루벨리오의 책을 몰래 가져가 감춘 일 자체가 아니었다.
‘너무 충동적으로 섣불리 움직였어. 이렇게 쉽게 아델 누나한테 의심을 살 줄 알았으면, 들키지 않게 좀 더 치밀하게 움직이는 건데.’
아스포델이라면 루벨리오 따위보다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