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60)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60화(160/207)
아스포델의 눈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순간, 제르카인은 이미 그녀에게 자신이 한 일을 들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허점이 생긴 것일까?
오늘 보니, 아스포델과 루벨리오의 사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던 것?
아니면 루벨리오가 생각보다 더 예민하게 굴면서 진심으로 화를 내던 것?
‘넌 나중에 아스포델을 배신할 거야.’
어쩌면 루벨리오가 귀에 속삭인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동요한 탓에, 이후의 말이나 행동에서 위화감이 느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순진한 척해도 네가 어떤 녀석인지 나는 다 알아. 데메테아가 내게 미래를 보여줬으니까.’
물론 아스포델이 조금 전에 해준 말처럼 제르카인도 루벨리오의 헛소리를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한 탓일까?
어째서인지 아직도 마음이 다소 불안하고 초조했다.
제르카인은 조용히 손을 들어, 방금 아스포델이 웃으며 쓰다듬어 주었던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긴 제르카인의 짙은 노을빛 눈이 어스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아스포델의 앞에서 반성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스포델은 그에게만 유독 무른 구석이 있어서 이 정도 잘못으로 거리를 두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제르카인이 한 일을 눈치챘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분명 다행이지만…….’
아스포델과 루벨리오는 어쩐지 전보다 한결 친밀해 보이는 모습으로 교육실에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제르카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거리며 차오르는 듯했다.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4황자님.”
그때, 문득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올려진 제르카인의 눈에, 이질적일 정도로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서 있는 모르페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뒤에는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는데, 옷차림을 보니 궁인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신전에서 데려온 사람인 것 같았다.
모르페우스는 제르카인과 시선이 마주친 직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시 한번 고요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혹시 편찮으신 곳이 있으신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제르카인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썹을 움찔 떨었다.
‘왜 모르페우스 신관이 지금 버베나 궁에 있지?’
신학 수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미리 교육실을 보러 오기라도 한 것일까?
하긴, 따지고 보면 제르카인도 아직은 카루스와 함께 사용하는 궁에서 기초 과목을 공부하고 있을 뿐, 아스트리움의 학자들에게 본격적인 수업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스포델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버베나 궁에 와 있었으니, 곧 황족들을 가르치게 될 모르페우스와 지금 이곳에서 마주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관님. 저는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르카인은 담담하게 말하며 입꼬리를 들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소년의 얼굴은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듯이 순진하고 맑아 보이기만 했다.
제르카인을 가만히 응시하던 모르페우스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미끄러졌다.
“오신 방향을 보니, 2황자님과 3황녀님이 함께 계신 교육실에 들렀다 나오신 거겠군요.”
“…….”
“아까 얼핏 본 것이긴 합니다만, 두 분이 제법 우애 좋은 모습으로 뭔가를 찾고 계신 것 같았지요.”
모르페우스는 지나가듯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다시 제르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그림자가 진 모르페우스의 얼굴에 소리 없이 여트막한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3황녀님과 가장 각별한 분은 4황자님이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그 순간 제르카인의 손이 세게 움켜쥐어졌다.
“하긴, 생각해 보면 예전에 2황자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크게 앓으신 적이 있었을 때도 3황녀님이 굉장히 많이 걱정하셨었지요. 아, 그때 4황자님은 너무 어리실 때라 기억나지 않으시겠군요.”
모르페우스는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문득 떠올라서 얘기한다는 듯이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황자, 황녀님들은 결국 같은 피를 이은 남매이니 어느 분과 친하셔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합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오늘 다퉜다가 내일 화해해 더 친해지는 경우도 흔하니 말이지요.”
제르카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모르페우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제르카인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한 발짝씩 가까워질수록, 발밑에 이어진 검은 그림자도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4황자님,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라도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도의 바닥과 벽에 어둡게 칠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신전에서도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 종종 저희 신관을 찾아오는 신도들이 계셨지요. 저희 신관은 신도들의 이야기를 결코 다른 곳에 옮기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수행인들의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모르페우스의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낮게 속삭여졌다.
“원래 친밀한 사람의 앞에서 더욱 꺼내기 힘든 이야기도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제르카인을 가까이에서 굽어보는 모르페우스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한층 짙어진 어스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4황자님을 보면 저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 괜히 친밀하게 여겨지는군요.”
그 순간 제르카인은 이유도 모르게 가슴이 약간 선득해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신관을 등지고 먼저 움직일 수도, 마주한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먼저 움직인 건 이번에도 모르페우스였다.
“그럼 제가 한 말을 부디 기억하시길. 이 모르페우스는 언제든 어린 황자님을 환영합니다.”
모르페우스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속삭인 뒤 제르카인을 지나쳐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그러나 제르카인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후로도 얼마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저, 모르페우스 님. 4황자님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중간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만히 있으십시오. 또 시키지도 않은 멍청한 짓거리를 해서 방해하지 말고.”
“허억. 죄, 죄송합니다.”
모르페우스는 자신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따라붙어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젊은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제르카인이 시종으로 생각한 사람은 사실 모르페우스와 함께 대신전에 적을 두고 있는 하급 신관이었다.
그는 제르카인의 신성의식 날 함께 황궁에 방문한 뒤 대신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르페우스의 옆에 남은 사람이었다.
모르페우스에게는 마리벨 신관 외에도 그에게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옆에 있는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저는 어디까지나 모르페우스 신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셨으면 하는 마음에…….”
모르페우스는 뒤에서 변명하듯이 지껄이는 소리를 대충 흘려들었다.
모르페우스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은밀한 확인 끝에, 아스포델이 그의 곁에 있는 신관 대부분의 정보를 이미 습득해 자세히 숙지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 모르페우스가 이미 검증을 끝내 상당히 오래전부터 곁에 두고 부리던 수족 같은 사람들은 모조리 꿰고 있었다.
그래서 모르페우스는 아스포델의 눈을 피해 그의 손과 발이 될 만한 다른 수하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쓸 만한 사람을 새로 키워내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그럭저럭 능력이 있는 사람을 근처에 두면 아스포델이 ‘또 무슨 개수작을 벌이려는 생각이냐’는 듯이 대번에 의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그래도 지금 모르페우스의 등 뒤에 있는 자는 이상하게 흐릿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 아스포델의 의심을 사지 않고 그의 옆에 남는 데 성공했다.
물론 모르페우스의 까다로운 기준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쓸 만한 구석이 있어 앞으로 시험 삼아 몇 가지 일을 시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에도 모르페우스가 시키지도 않은 한심한 짓거리를 벌였다.
일전에 신학 과목의 강론 교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을 때 아이작의 암송을 방해하기 위해 창밖에서 꽃가루 따위를 날리고, 단상을 미리 망가뜨려 아이작에게 부상을 입히려고 하는 등의 허접하고도 꼴불견인 짓거리를 말이다.
모르페우스는 자신을 뒤따르는 남자를 한결 더 강한 멸시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모, 모르페우스 신관님. 지금 저를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신 겁니까? 요…… 욕도 한번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닥치십시오.”
뒤에서 또 ‘허억허억, 후욱후욱’ 같은 괴상한 숨소리가 들렸지만 모르페우스는 짜증스럽게 무시했다.
이렇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만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하고 불결한 자를 곁에 두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모르페우스는 냉혹한 눈을 움직여, 그의 목줄을 쥔 소녀가 있던 방향을 응시했다.
‘안타깝지만,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어디에서나 상호계약의 기본 조건은 평등인 법.
그러니 모르페우스는 소녀가 그를 완전히 길들인 개로 착각해 방심할 때, 그 가느다란 목을 단숨에 물어뜯어 똑같은 목줄을 채워줄 터였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