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7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77화(177/207)
“그런데 1황자님은 참 아름다운 황금안을 가지고 계시네요. 황자님 중에 신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1황자님이셨군요?”
바로 그때, 알렉시아에게 홀린 에스텔이 무심코 큰 실수를 했다.
짓궂은 마음으로 정체를 바로 알리지 않았다고 알렉시아에게 뭐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로잔티나 제국민이 황금안을 가진 황족이 누구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에스텔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로잔티나 제국민이 아니라 크리오스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흠, 이제 보니 에스텔 양은……. 굉장히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인 것 같네.”
알렉시아의 눈에 예리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어디 깊은 산골짜기라도 살다 와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는 소리였다.
주변에 있던 궁인들도 에스텔을 의아한 눈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맑고 순수하다는 말을 좀 많이 듣는 편이에요.”
에스텔은 알렉시아의 말이 칭찬인 줄 알고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에스텔 양은 출신이 어디야? 대신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에서 지냈어?”
그때, 타마린느가 상냥한 목소리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억양을 들어보니 동부의 콴델 지역이 떠오르는데, 혹시 그곳 출신인가?”
앗! 그런데 타마린느는 예리했다.
크리오스는 확실히 로잔티나의 동쪽에 붙은 이웃국이었고, 콴델은 그 동쪽 국경에 접한 지역이었다.
한데 미세한 억양 차이만으로 비슷하게 알아맞히다니?
심지어 지금까지 에스텔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에스텔은 불시의 기습에 깜짝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알렉시아의 앞에서 배배 꼬고 있던 그녀의 몸이 경각심으로 다림질되기라도 한 것처럼 슬그머니 곧게 펴졌다.
정신을 차린 에스텔이 뒤늦게 성녀다운 차분한 모습을 보이며 짐짓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데메테아 님께 선택받은 날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이전의 출신과 이름은 제게 아무 의미도 없답니다.”
“아, 에스텔이란 이름도 본명이 아니야?”
“예, 데메테아 님께 직접 받은 이름이에요.”
에스텔은 여신의 은총에 감사를 표하듯이 손가락으로 작은 성호를 그렸다.
수백 번 연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동작에서만큼은 성스러움이 넘쳐흘러서, 궁인들이 작게 감탄했다.
이번에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알렉시아가 웃는 낯으로 에스텔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에스텔 양은 왜 눈이 황금안이 아닐까? 데메테아 님의 선택을 받은 성녀라면 모르페우스 신관님이나 우리만큼 선명한 황금안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에스텔은 누군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할 줄 알고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
“제 힘은 아직 완전히 개화한 게 아니니까요.”
“완전히 개화한 게 아니라고?”
“예, 제 신성력은 앞으로 몇 차례의 각성을 통해 더욱 강해질 거랍니다. 데메테아 신께서 직접 제게 강림하시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텔의 당당한 답변에 궁인들이 수군거렸다.
“어쩐지……. 눈이 황금안이 아닌 게 이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아직 완전히 성장하신 것도 아닌데, 황궁 의원과 신관님도 치료하지 못한 부상자를 단번에 낫게 할 정도의 힘이라니……. 대단하네요!”
“대신전에서 인정한 성녀님이라잖아요.”
겸손한 척하고 있던 에스텔의 눈에 득의양양한 빛이 깃들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허영심을 좀 더 충족시키고 싶은지, 나를 향해 친절하게 권유했다.
“3황녀님, 그러고 보니 록샨 님께서는 이제 완전히 쾌차하셨나요? 혹시 불편한 데가 있으시면 언제든 절 찾으셔도 좋아요. 황궁 의원과 다른 신관님들이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나 병도 제 신성력으로는 치료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요. 아니면 제가 한번 직접 찾아뵙고 상태를 살펴봐 드려도 되고요.”
그렇지 않아도 라 벨리카 황제가 이번 마수 토벌대의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황명으로 선언했을 때, 에스텔은 은근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내 아버지를 치료한 일까지 어디에도 자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늘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끝마다 자신이 내 아버지를 구했다며 있는 대로 생색을 내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은인에게 백 번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 마땅하겠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어마마마 앞에서는 우리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더니, 사실은 치료가 완전히 다 된 게 아니라는 뜻이야?”
“예?”
“상태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그럼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는 의미냐고?”
내가 누구던가.
나는 물에 빠진 걸 구해준 사람에게 보따리 내놓으라고 다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불순한 눈초리를 정면에서 받은 에스텔이 당황했다.
그녀는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건방지게 꼬나보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태도로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방금 신성력이 완전히 개화하지 않아서 황금안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지금 신성력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거네?”
나는 보란 듯이 이맛살을 왕창 구기며 에스텔에게 따져 물었다.
“혹시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막 치료했을 때 증상이 악화되었던 거 아냐?”
“무, 무슨!”
“지금 우리 아버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 것도 혹시 상처가 다시 도질 게 의심스러워서 그런 거야? 또 부작용이라도 일어날까 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작게 수군거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본인 입으로 신성력 각성을 몇 번 더 해야 한다고 했었죠?”
“그럼 진짜 불완전한 신성력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건가?”
“듣고 보니 저 성녀라는 아이가 신성력을 사용하자마자 록샨 님의 용태가 악화되었던 것도 이상하긴 한데…….”
몇몇 사람은 성녀에게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록샨 님은 데메테아 님께서 제게 주신 힘으로 완전히 치유되었어요.”
에스텔은 그런 반응에 발끈한 듯했다.
“진짜? 확실해?”
“당연하죠! 지금 데메테아 님의 힘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혹시 나중에 상처가 다시 도질 일은 정말 없다는 거지?”
“그럴 일 절대 없어요!”
에스텔은 의심받는 게 분한 듯이 씩씩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쳐다보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까지 확신한다니 일단 믿을 수밖에 없겠네. 그러게 애초에 왜 헷갈리게 말하고 그래?”
“이익!”
에스텔은 번번이 자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내게 제대로 성이 난 듯했다.
그녀는 한순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것처럼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너! 지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데메테아 님의 성총을 받은 성녀인 내게 이 무슨 무례하고 건방진……!”
“에스텔 님!!”
누군가 에스텔에게 크게 호통을 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순간 에스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꼭 황조롱이를 만난 쥐처럼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텔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마리벨이 음산한 기운을 폴폴 풍기며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 마리벨 신관?”
“제가 분명 몇 번이나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대신전의 성녀에 걸맞은 품격 있는 모습을 보이시라고요. 그런데 지금 그 천박한 말버릇은 도대체 뭡니까?”
마리벨은 에스텔을 아주 쌀쌀맞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그녀를 힐난했다.
그래도 지난번에는 나름대로 에스텔의 체면을 생각해 주는 듯하더니, 오늘은 굉장히 야박한 태도였다.
분위기상 마리벨은 에스텔을 보기 전부터 그녀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마지못한 듯이 우리에게 에스텔 대신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저희 에스텔 님이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평생 살아오신 분이라 그런지 아직 예법이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입궁한 터라 황실 법도에는 더더욱 미숙하시지요. 그러니 혹여 황녀님들께 실례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아, 어쩐지.”
에스텔이 시골 출신임을 암시하는 마리벨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알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에스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로잔티나에 대한 기본 지식이 딸리는 이유를 의심받지 않으려고 에스텔이 대신전에 대충 둘러댄 모양인데, 정작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신비로운 모습이 깨지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에스텔 님, 오늘은 방에서 성현들의 경전을 스무 번 베껴 쓰시라고 분명 말씀드렸는데 도중에 허락도 없이 자리를 비우셨군요.”
“나, 나는 그냥 잠깐 답답해서 금방 바람만 좀 쐬고 들어가려고…….”
“에스텔 님은 여신님께 선택받은 분이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습니다. 제아무리 영롱한 보석도 제련 과정 없이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마리벨이 성심성의껏 에스텔 님을 갈고닦아 드리려고 이렇게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제 호의를 매번 이런 식으로 무시하시는군요. 정말이지, 서운하고 서글프기 그지없습니다.”
말로는 서운하고 서글프다고 했지만, 마리벨의 목소리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 뱉는 듯했다.
에스텔을 쏘아보는 눈빛도 정나미 없고 냉담했다.
에스텔은 천적이라도 만난 양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나는 마리벨을 데려온 마가렛을 향해 잘했다는 의미로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고역인 얼굴로 마리벨을 상대하는 에스텔을 보면서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누가 하필이면 로잔티나의 가짜 성녀가 되랬나?’
성녀 괴롭히기의 달인인 마리벨의 손아귀에 굴러들어가다니, 에스텔은 스스로 불행을 자처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