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7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79화(179/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에스텔이 꺼내 든 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마석이었다.
에스텔은 먼저 방 안에 감시용 마석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소지하고 있던 것을 작동시켰다.
-에스텔?
“성녀님!”
잠시 후, 투명한 이슬이 여린 풀잎 위를 굴러가는 듯한 맑고 청아한 음성이 마석에서 흘러나왔다.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에스텔의 자세는 저절로 공손해졌다.
-왜 벌써 연락했나요? 벌써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아, 아니요. 아직…….”
-그럼 무슨 일인가요?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직 앳되었지만, 듣는 이의 언행을 조심하게 만드는 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실은 마리벨에게 당한 것을 낱낱이 고자질하여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던 마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끔히 가셨다.
왠지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자신의 무능함만 증명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에스텔은 왜 자신이 따라 할 땐 이 느낌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얼른 말을 돌렸다.
“저, 제가 임무 수행 중에 로잔티나의 4부군을 치료한 거 말인데요. 혹시 부작용 같은 게 생기지는 않겠죠……?”
에스텔의 얼굴에는 은근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방금 3황녀를 만났을 때는 당당하게 굴었지만, 내심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스텔이 가진 건 일부이기는 해도, 성유물은 성유물이니 별문제 없을 거예요.
성녀에게서 확답이 나오고 나서야 에스텔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에스텔의 성유물 같은 경우에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들킬 리도 없고요. 혹시 로잔티나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그건 아니고요!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쭈어봤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3황녀, 그 건방진 꼬맹이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성녀의 말대로 에스텔의 신성력은 고명한 성유물의 힘이었다.
비록 에스텔은 진짜 성녀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가진 힘이 완전히 가짜인 건 아니었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부작용 같은 게 생길 리 없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어차피 조만간 크리오스의 사절단과 함께 나도 그곳으로 갈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아, 네! 곧 성녀님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럼 저도 안심이네요.”
-에스텔은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신의 조각이 지금 황성에 있는지 계속 알아보세요. 라 벨리카 황제의 4부군이 빼돌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아야 합니다.
“예, 성녀님!”
-당신이 가진 성유물이 길을 인도할 테니 어렵지 않을 거예요.
에스텔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말하기를, 같은 힘을 근원으로 하는 성유물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성녀가 에스텔을 로잔티나에 보낸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일단 지금은 너무 수상하게 행동하지 말고, 라 벨리카 황제에게 성녀로 인정받는 것부터 성공하세요. 성녀 행세는 이미 한번 해 봤던 일이니까 잘할 수 있겠지요?
“그, 그럼요. 실수 없이 해내겠습니다.”
에스텔은 성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에스텔은 몇 년 전에 크리오스 제국의 공식 성녀가 될 뻔했었다.
물론 에스텔은 제누스 신의 선택을 받은 진짜 성녀가 아니라, 운 좋게 성유물을 손에 넣었을 뿐인 가짜였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필이면 제국민들에게 발표가 나기 직전에 진짜 성녀가 나타나 버렸다.
제누스 신의 사랑을 받는 진짜 성녀는 에스텔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감히 성녀를 사칭한 에스텔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나마 자애로운 성녀에게 용서받아 거두어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신을 기만한 죄로 곧장 화형에 처해졌으리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자 한기가 느껴져서 에스텔은 몸서리쳤다.
-참, 며칠 전에 말했던 대로 더글라스 뷔요른과는 연락을 취해 봤나요? 에스텔을 로잔티나의 대신전에 들여보낸 일등공신이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할 리 없을 텐데요. 라 벨리카 황제의 인정을 받는 데 이용할 수 있다면 그쪽의 도움을 받도록 해요.
“그게, 저도 알아보니 좀 복잡한 사정이 생겨서요.”
-복잡한 사정이요? 혹시 에스텔이 크리오스 사람이라는 걸 들켰나요?
“그건 아니고요.”
에스텔은 얼마 전 황족들의 교육 기관인 아스트리움에서 벌어진 추잡한 사건들을 대충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지금은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네요.
“네, 그쪽은 제가 상황을 보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건 놓쳐서는 안 되는 좋은 기회예요. 로잔티나 황실에서도 4부군의 목숨을 빚진 셈이니 당신을 소홀히 대할 수 없을 겁니다.
성녀는 에스텔에게 몇 가지 더 당부했다.
-그리고 에스텔. 3황녀를 주의하는 걸 잊지 말아요.
에스텔은 성녀의 말에 마지막까지 공손히 대답한 뒤 통신을 종료했다.
하지만 에스텔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성녀님은 로잔티나의 3황녀를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성격이 좀 나쁠 뿐, 평범한 어린애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멀리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왜 벌써 나오십니까, 에스텔 님?”
“헉!”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나타난 마리벨을 보고 에스텔은 질겁하고 말았다.
“필사를 시작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 벌써 인내심이 다한 건 아니시겠지요?”
“그,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목이 말라서, 물 좀 가져다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에스텔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변명했다.
마리벨은 못내 의심스러운 듯이 에스텔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더 따지지 않았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라 들렀습니다. 오늘 저녁 식단은 설탕과 소금을 제한 통밀빵과 삶은 계란, 그리고 우유입니다.”
과연 마리벨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음식을 보고 에스텔은 또 울컥했다.
“지금 나더러 또 이딴 개밥 같은 걸 먹으라고?!”
“개밥이라니,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물론 뱀처럼 번뜩이는 마리벨의 눈을 마주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에스텔 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관들도 평소에 이런 식사를 합니다. 자고로 우리는 가장 낮은 자세로 신을 모시는 신도가 아닙니까? 특히 에스텔 님은 데메테아 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성녀이니, 더욱 검소한 모습을 보이셔야지요. 세상에는 이 정도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하는 빈곤한 사람가 많습니다. 자, 그러니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뒤 드십시오.”
결국 에스텔은 마리벨이 내민 쟁반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난 대신전에 들어간 후로 한 달 내내 이런 것만 먹었다고……!’
심지어 지금은 산해진미가 가득한 황궁에 왔는데도 빌어먹을 마리벨 때문에 이런 쓰레기만 입에 대야 하다니!
이러다가는 임무를 완수하기도 전에 말라 죽을 게 분명했다.
하루빨리 저 빌어먹을 마리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에스텔은 씩씩거리며 딱딱한 빵을 질겅질겅 씹어먹었다.
고개를 들자, 화려하게 꾸며진 위스테리아 궁의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와본 로잔티나의 황궁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뒤덮인 별세계였다.
황족들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조차 부유해 보였다.
짜증이 서려 있던 에스텔의 눈에 서서히 탐욕이 들어찼다.
‘크리오스든 로잔티나든, 신전 생활은 지겨워. 그냥 이대로 쭉 황궁에서 살면 얼마나 좋아? 더군다나 로잔티나에서는 내가 성녀니까, 다들 날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텐데…….’
처음에는 마리벨이 꼴 보기 싫어 그냥 한번 해본 생각이었지만, 곱씹을수록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안 될 게 뭐가 있어? 진짜 이대로 황궁에 눌어붙으면 되잖아!’
로잔티나에서 성녀로 인정만 받는다면, 크리스오스로 돌아가 성녀의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에스텔은 아까 만난 1황자를 떠올렸다.
그 황홀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금빛 눈. 다정하고 달콤한 미소.
몇 번을 봐도, 1황자 유클레드는 에스텔이 평소에 꿈꿔 왔던 동화 속의 왕자님 같았다.
몽롱해진 에스텔의 눈에서 강렬한 욕망이 일렁였다.
‘만약 내가 황자비가 되면……. 이 황궁이 아예 내 집이 되는 거야. 그럼 성녀이자 황족의 신분을 손에 넣는 거니까, 로잔티나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는 셈이잖아?’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한동안 억눌려 있던 에스텔의 허영심이 바람 넣은 풍선처럼 점점 크게 부풀었다.
물론 성녀가 그녀의 생각을 알면 처음에는 반대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이쪽이 더 좋은 방법 아닌가?
에스텔은 곱씹을수록 마음이 설레서 흥분에 찬 눈을 반짝였다.
딱딱하고 맛없던 빵이 왠지 아까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