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80)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80화(180/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Chapter 36
두 성녀의 동상이몽
마리벨에게 끌려간 가짜 성녀는 다음 날까지 조용했다.
보나 마나 성서나 경전 필사, 황궁 예법 교육, 또 마리벨의 품행 지도 등등으로 한창 머리 터지게 쪼이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일로 많이 놀라셨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모르페우스의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침착하지 못할 건 또 뭐야? 성녀 행세하는 애가 하나 나타난 게 뭐 대수라고.”
모르페우스는 요즘 정기적으로 우리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침대맡에 앉아, 모르페우스의 진료를 받던 중에 조용히 잠든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대신전에 연락을 취해 보니, 정말 한 달 전쯤에 데메테아 여신의 성흔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소녀가 대신전에 스스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모르페우스가 내 무미건조한 반응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듯이 내 얼굴을 살폈다.
“뜻밖에도 마침 그때 마리벨 신관이 직접 성녀에 대한 신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교적 쉽게 성녀의 존재가 대신전에 받아들여졌고, 마리벨 신관은 성녀의 임시 보호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페우스의 설명을 한 귀로 대충 흘려들으며 아버지의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 올려 주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병약미를 내뿜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자 내 마음도 여간 쓰라린 게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몸에 숨어든 독은 지금 당장 치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독이 활성화되지 않게, 휴식을 명목으로 내가 그를 틈틈이 잠재워 놓고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나 다른 궁인들은 큰 부상을 입은 후 기력 회복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아버지의 수면 시간이 늘어난 것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모르페우스도 내가 신성력으로 아버지를 잠재웠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아버지가 도중에 깨어나 엿들을 걸 걱정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또 마리벨 신관의 강력한 요청으로 성녀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황성에 있는 제게도 지금까지 소식이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에스텔의 등장 이력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마친 모르페우스가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래도 제가 없는 사이에 마리벨 신관의 위치가 대신전에서 제법 중요해진 듯합니다. 위스테리아 궁에 있는 마리벨 신관에게 몇 번 접견을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모르페우스의 충실한 발 닦개였던 마리벨이 그의 만남 요청을 정말 몇 번이나 대놓고 거절했다면 확실히 놀라운 일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 알겠어. 할 말 다했으면 그만 나가자. 나도 바로 다음 일정이 있거든.”
이번에도 나는 뜨뜻미지근하게 그냥 그러냐는 듯이 답한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모르페우스는 오히려 이런 내 반응이 심상치 않게 여겨진 모양이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 제가 황녀님께 성녀의 소식을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우시다면 따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황녀님께 거짓을 고하지 못합니다.”
“신관님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든 없든, 가짜 성녀에 대해서는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아.”
어차피 가짜 성녀의 수완은 뻔했고, 그녀의 정체를 밝힐 방법이 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가짜 성녀를 상대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단지 문제는 지금 가짜 성녀의 배후에 누가 있으며, 그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모르페우스는 내 태도가 의외인지 한순간 멈칫하다가, 이내 나를 떠보듯이 말했다.
“가짜라고 단언하시는군요. 그 소녀가 품은 힘은 진짜인 듯했는데 말입니다.”
“한 세대에 같은 나라에서 두 명의 성녀가 나타났다는 말 들은 적 있어?”
“그런 적은 없지요.”
“그러니까.”
나는 문으로 걸어가면서 모르페우스를 쳐다봤다.
“신관님이 보기에는 나보다 걔가 진짜 같아?”
모르페우스는 잠깐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아닙니다.”
그러다가 이내 설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겠느냐는 듯이 순순히 대꾸했다.
“그보다 신관님, 요즘 한가해서 딴짓할 여유가 있는 것 같더라?”
나는 모르페우스가 문을 열기 직전에 지나가듯이 말을 흘렸다.
“우리 제르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신관님의 친구가 되기에는 많이 어릴 텐데.”
그 순간 막 문고리를 돌리던 모르페우스의 손이 멈췄다.
그가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았다.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그저 지나가다가 몇 번 얼굴을 뵙고 인사드린 게 전부입니다.”
“아하, 인사.”
나는 모르페우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모르페우스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요즘 바빠서 제르한테 좀 소홀했는데, 이렇게 신관님이 대신 내 동생에게 신경 써주다니 참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쨌든, 신관님. 요즘 할 일이 없는 건 맞잖아? 어차피 최근에 일어난 아스트리움의 일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서 수업도 미뤄졌으니까. 내가 심심한 신관님한테 부탁할 일이 좀 있어. 들어줄 거야?”
“물론입니다. 제가 황녀님의 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고마워라. 내가 참 사람을 잘 뒀어.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신관님이 옆에 있으니 말이야.”
모르페우스는 내가 웃는 낯으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자 오히려 불안한 듯이 미소 띤 얼굴을 미묘하게 굳혔다.
나는 그런 모르페우스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그의 팔을 툭툭 친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
* * *
“3황녀님, 오셨군요!”
며칠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듯한 조슈아가 나를 보고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조슈아, 일찍 왔네?”
하지만 그는 곧 내 질문에 다시금 긴장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이번 출궁은 폐하께서도 동행하시니 당연히 일찍 나와 봐야지요. 혹시라도 저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면 큰일이니까요.”
조슈아는 최근에 일어난 신수 서식지의 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진술하느라 바빴다.
멀쩡하던 신수 서식지가 갑자기 마수 서식지로 변한 것은 확실히 보통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나와 함께 그 사건의 최초 목격자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의 증언이 중요한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라 벨리카 황제의 허가를 받아 사건이 발생한 그 신수 서식지에 다시 한번 방문할 예정이었다.
나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오늘 함께 출궁하기로 한 라 벨리카 황제와 그녀의 수행인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틈새를 노려 조슈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손짓했다.
조슈아가 눈치 있게 고개를 숙여 나한테 귀를 대주었다.
“조슈아, 너 그날 일 어디까지 말했어?”
“예에? 당연히 전부 다 말씀드렸지요.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높으신 분들을 속이겠어요?”
조슈아는 내 은밀한 물음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전부 다? 거기에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그리고 걔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 소년 말씀이지요? 그럼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일어난 일이 너무 수상하던걸요.”
그날 목격한 일을 떠올리는지, 조슈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눈빛에도 예리함이 더해지자, 훈훈한 옆집 오빠 같던 청년의 모습이 제법 노련한 테이머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조슈아에게 머뭇머뭇 또 다른 질문을 속닥거렸다.
“그러면…… 그것도 말했어? 그 녀석이 나한테, 음…… 그런 거…….”
“뭘 말씀하시는 건지…….”
“그거 있잖아, 그거. 걔가 나한테…… 그, 친한 척한 거?”
“아, 아아!”
내가 에둘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 조슈아가 그제야 깨달은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조슈아의 눈에 갑자기 불이 붙은 듯했다.
“그 수상한 녀석이 감히 황녀님께 함부로 고백한 걸로도 모자라서 제멋대로 황녀님의 뺨을 노린 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어째서인지 그는 몹시도 분개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나는 흥분한 조슈아의 입을 얼른 막았다.
“쉿! 좀 작게 말해!”
애초에 그 수상한 놈과 나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혹시라도 누가 들으면 괜히 오해해서 귀찮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누가 황녀님께 고백을 하고 뺨을 노렸다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슈아의 말을 들은 사람이 바로 나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목소리는 라 벨리카 황제가 아니라 내게 익숙한 소년의 것이었다.
“레예스? 여긴 웬일이야?”
고개를 돌리자,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보고 있는 레예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