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8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86화(186/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세게 움켜잡은 것은 에스텔이 아니라 해파리의 몸통이었다.
“처리하라고?”
옆에서 앤디미온이 ‘그러다가 여신님의 연약하신 옥체가 터지겠다’고 기함하며 안절부절못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데메테아에게 싸늘히 말했다.
“아까는 분명 가짜가 가지고 있는 성물만 손에 넣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가진 성물을 빼앗으면 이 가짜가 더는 성녀 시늉을 하지 못할 게 아니냐. 그러니 손쉽게 가짜를 처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아니겠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니라.]해파리는 내가 왜 이렇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진실해 보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의 동요도 없는 눈빛이 퍽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파리는 진정하라는 듯이 촉수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이 자칭 데메테아라는 존재에게서 은연중에 풍겨 나오던 위화감을 나는 이번에야말로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너, 알고 있구나?”
나는 입술에 냉소를 머금고 확신 어린 목소리로 데메테아를 향해 말했다.
“가짜 성녀가 가진 성물을 빼앗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걸.”
바로 그 순간, 방 안에 아주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햇빛이 가득 비치는 실내에 착각처럼 기묘한 한기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옆에 누워 있던 에스텔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킨 건 그때였다.
“날 죽인다니?! 그런데…… 지금 이 방에 다른 사람은 없는데, 방금 그 목소리들은 도대체 뭐지?”
에스텔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열심히 기절한 척하고 있다가 내 말을 듣고 기겁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가 들은 것은 내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이번 회차에서도 그녀에게는 성령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역시 에스텔이 지닌 성물 때문이었다.
데메테아 해파리가 벌떡 일어난 가짜 성녀를 보고 내게 벼락같이 소리쳤다.
[아이야, 어서 서둘러라! 일을 그르치기 전에 조속히 움직여야 하느니라!]“히익! 저건 뭐야? 마, 마물? 그런데 사람 말을 하잖아!”
[뭐라? 어디서 나를 한낱 마물 따위와 비교하느냐! 아이야, 당장 저것의 숨통을 끊어라! 저 건방진 입을 지금 당장 염화의 불꽃으로 지져 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그때까지도 내 손에 붙들려 있던 해파리가 촉수로 나를 마구 치며 재촉했다.
꿈틀거리는 해파리를 본 에스텔이 질겁해서 보인 반응이 몹시도 노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데메테아의 뜻대로 해줄 마음이 없었다.
어쩐지 데메테아의 태도가 기묘하여 이상하다는 생각을 좀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 녀석은 수상했다.
방금, 해파리의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그 말을 그대로 따라야만 할 것 같은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나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하고 불쾌했다.
원래 이 가짜 성녀 에스텔은 로판 클리셰의 법칙에 의해, 조만간 정체를 들키고 파멸하게 될 운명이었다.
물론 이번 회차에는 성녀의 등장과 이후의 전개가 변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 또한 어떻게 진행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나는 이 가짜 성녀를 내버려 둘 마음은 없었다.
에스텔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자기 업보인 셈이라, 딱히 동정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직접 데메테아의 뜻대로 이 녀석에게 손을 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당연히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데메테아가 이렇게 내게 가짜 성녀를 처리하라고 강요하니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했다.
“앤디미온, 넌 그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뭐? 잠깐…….]“피오, 키노. 너희는 저 해파리 데리고 먼저 내 방으로 가 있어.”
[아, 알겠어!] [으응!]앤디미온이 곧장 방에서 사라지고, 족제비들이 해파리 성물의 촉수를 한 짝씩 재빨리 입으로 물었다.
[아이야? 왜 나를 먼저 보내려는……. 잠깐, 이것 놓아라!]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엄지만 한 작은 크기의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짜고짜 가짜 성녀의 입에 처박았다.
“으읍!”
에스텔은 족제비들이 해파리 촉수를 하나씩 입에 물어 나르는 기묘한 광경을 보느라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다가 반사적으로 목구멍으로 넘어간 액체를 꼴깍 삼켰다.
그녀는 조금 얼떨떨해하다가, 곧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한테! 우웩!”
입안에 남은 끔찍한 맛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 모를 수상한 것을 먹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에스텔은 소파 옆으로 얼굴을 내밀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흡수돼서 토해 봤자 소용없을걸. 그거 독이야.”
“뭐……?!”
“그리고 내가 주는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넌 며칠 내로 죽을 거야.”
나는 당황한 에스텔에게 태연히 말했다.
에스텔은 지금 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는 건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우, 웃기지 마! 고작 열 살짜리가 독살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황족에게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에스텔에게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이 일부러 착 내리깐 목소리로 스산하게 덧붙였다.
“황실에 진짜 그 나이처럼 순진한 어린애가 있을 것 같아? 자고로 황족 나이 열 살쯤 되면, 독약 하나 정돈 언제든 쓸 수 있게 가슴에 몰래 품고 다니는 게 당연한 일이지.”
원래 황족이나 귀족이라고 하면 푸른 피를 가진 냉정하고 무자비한 존재라는 이미지가 있지 않던가?
물론 내 이부 형제들은 대부분 모두 착하고 순진했다.
또, 다른 외국의 황실에도 분명 마음씨 고운 황족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내가 싸잡아 말한 것은 틀림없는 오류였지만, 에스텔처럼 제멋대로 황실에 대한 환상을 품은 외부인에게는 그럴듯한 말로 들릴 가능성이 컸다.
“그, 그런! 황족과 귀족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길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하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었어……!”
그리고 역시 에스텔은 귀가 얇았다.
그녀는 내 말에 흠칫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들었잖아. 애초에 내가 여기에 널 데려온 이유도 해코지하려고 그런 건데.”
“나, 난 황궁에 온 손님이야!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마리벨, 마리벨은 어디에 있어?!”
“그래, 지금 내가 너한테 독을 먹였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시도해 봐도 돼. 어차피 검출도 안 되는 독이거든. 그런데 설령 독이 검출된다고 해도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이 황궁 안에서 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까, 내 말을 믿을까?”
내 뻔뻔스러운 말에 에스텔의 눈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넌 어차피 거짓말쟁이잖아. 성녀라는 것도 가짜면서.”
“허억!”
“네가 성물의 힘으로 성녀 흉내 내는 거, 마리벨 신관도 알아?”
내 몰아치는 추궁에 에스텔은 어질어질한 눈치였다.
느닷없이 나한테 가짜 성녀라는 것도, 또 성물을 이용한 것도 들켰으니 당황해서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똑똑!
“아델, 아빠다. 들어가마.”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에스텔에게 소곤거렸다.
“지금은 더 얘기할 시간이 없네. 너, 내가 찾아갈 때까지 지금 여기에서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넌 정체를 들켜서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해독제 없이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야.”
내 협박에 에스텔이 몸을 파들거렸다.
“아델.”
“아빠!”
곧바로 문이 열리고, 우리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푸른 눈이 예리하게 방 안을 살피고, 소파에 앉은 창백한 얼굴의 에스텔을 훑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게 닿은 아버지의 눈빛은 보드랍고 따스하기만 했다.
“위스테리아 궁의 손님이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정신을 차렸구나.”
“네, 방금 깨어났어요! 밖에서 손님이 갑자기 기절했는데, 위스테리아 궁까지는 너무 멀어서 그냥 우리 궁으로 데려왔어요.”
“그래, 우리 아델이 이렇게 착하고 마음씨가 고와서 손님도 금방 눈을 떴나 보다.”
“응, 아델은 아빠 닮아서 예쁘고 귀엽고 착해요!”
가짜 성녀는 알콩달콩한 우리 부녀의 모습을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봤다.
특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협박하던 내가 안면을 싹 바꿔서 아버지에게 순진하고 귀여운 척하는 것이 몹시도 가증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빠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을 자세히 보면 그 안에는 미약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온기 없는 눈으로 에스텔을 응시하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신원이 불명확한 외부 사람과 단둘이 있는 건 위험하단다. 그러니 다음에도 혹시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수행인들과 동석하렴. 알겠니?”
“헤헤, 다음부터는 꼭 그럴게요.”
에스텔은 우리 아버지의 말에 굉장히 억울한 듯이 ‘허, 허어!’ 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기야, 이곳에 와서 오히려 봉변을 당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혼란과 의혹, 또 분노와 두려움 등의 복잡한 감정이 담긴 에스텔의 눈이 우리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스쳤다.
에스텔은 당장에라도 내 만행을 고하고 싶어 입이 근지러운 눈치였다.
“곧 마리벨 신관님과 모르페우스 신관님이 도착할 거다. 두 분이 마침 대화 중이라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구나. 특히 마리벨 신관님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몹시도 놀라서 몇 번이나 에스텔 양의 소식을 물었다고 하던데…….”
“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헐레벌떡 방에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