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8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89화(189/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나도 에스텔을 보내고 다시 아버지가 있는 궁으로 돌아갔다.
“이제 와?”
“어우, 씨!”
그런데 덤불에 잘 가려진 개구멍으로 몸을 들이자마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떨어져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자,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하얀 달빛이 그의 금빛 머리칼을 은백색에 가깝게 물들였다.
나를 못마땅하게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에 무심코 흠칫 몸을 떨었다.
“뭐, 뭐야? 오빠가 왜 여기에 그러고 서 있어?”
“왜긴 왜야, 당연히 널 기다리고 있었지.”
팔짱을 풀고 다가온 유클레드가 인상을 쓰며 나한테 손을 뻗었다.
“방에 가 봤더니 안 보이기에 혹시나 했는데, 또 이 개구멍을 혼자 몰래 쓰고 있었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 정말 나랑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아예 없는 거지? 벌써 나한테 걸린 것만 몇 번이야?”
켁!
유클레드의 잔소리가 또 드릉드릉 시동을 걸 조짐이 보였다.
어릴 때 유클레드와 이 개구멍을 튼(?) 게 실수였다.
그 이후로도 당연히 나 혼자 몰래 이 비밀 출입구를 사용해 궁을 빠져나갈 때가 있었는데, 운 나쁘게도 유클레드에게 그걸 몇 번인가 들킨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도 또 유클레드가 잔소리 스킬을 발동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러는 유클레드 오빠야말로 이 늦은 시간에 안 자고 왜 우리 궁에 왔는데?”
“당연히 록샨 님하고 네가 걱정되니까 와본 거 아니야. 나 말고도 지금 안에 있는 사람들 더 있어. 참고로 조금 전에는 어마마마도 오셨고.”
“진짜?!”
물론 우리 아버지의 덕후인 알렉시아나 카루스 정도는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아버지 옆에 있다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라 벨리카 황제까지 이렇게 금방 다시 돌아왔다니, 하마터면 내 부재를 그녀에게도 들킬 뻔했다.
“네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내가 직접 밖으로 찾으러 가려고 했어. 나 참, 그 수상쩍은 계집애도 지금 황궁 안을 들쑤시면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조그만 게 혼자 겁도 없이 말이야.”
유클레드는 입으로 계속 나를 타박하면서도 제법 세심한 손길로 내 옷과 머리에 붙은 이파리와 먼지 같은 걸 부지런히 떼어줬다.
“보나 마나 그 성녀라는 이상한 계집애를 감시하러 갔든가, 아니면 록샨 님의 상태를 악화시켰다는 그 삿된 기운이 깃든 게 황궁 안에 진짜 있는지 없는지 같이 찾아보러 갔었겠지. 쯧,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린애가 밤에 잠도 안 자고. 그러니까 네 키가 이렇게 난쟁이 똥자루만 한 거 아니야? 내가 너 때는 말이야…….”
애석하게도 내 말 돌리기 기술보다 유클레드의 잔소리 레벨이 더 높았다.
하지만 나한테도 마지막 보루가 있었다!
나는 한 귀로 흘리기 스킬을 자동 장착했다.
취향의 차이로 가짜 성녀 에스텔에게 뜻하지 않은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유클레드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외모는 동화 속의 잘생긴 왕자님 같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메리엘이 유클레드에게 목을 매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클레드는 내 앞에서 입만 열면 이렇게 손주 걱정에 잠 못 드는 할머니 같은 면모를 드러냈다.
나는 나중에 내 새언니가 될 사람 앞에서는 유클레드의 이미지 관리를 빡세게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쳇. 할 말은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고 들어가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래도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유클레드의 잔소리도 깔끔하게 1절로 끝났다.
살금살금 이동하는 동안 유클레드는 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스포델. 너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그냥 방으로 가서 쉴래? 다른 사람들한테는 방에 가 봤더니 이미 잠들어 있었다고 할게.”
“아냐, 아빠 보러 갈 거야.”
유클레드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지만,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리지는 않았다.
“아, 아스포델 왔구나. 유클레드 오빠가 널 데려오겠다고 하고는 하도 안 와서 무슨 일이 생겼나 했는데.”
“앗, 3황녀님! 세상에, 반나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괜히 저희가 늦은 시간에 와서 휴식을 방해한 게 아닌지…….”
예상대로 아버지를 보러 온 알렉시아와 카루스가 보였다.
그들의 옆에는 1부군 테드릭과 제르카인, 그리고 라 벨리카 황제도 있었다.
“아델 누나, 괜찮아요?”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전보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던 제르카인이 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르도 왔구나.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궁에서 쉬지 않고.”
“아델 누나가 걱정돼서 잠이 안 오는걸요.”
“그래도 어린이는 일찍 자야 쑥쑥 크는데.”
옆에서 유클레드가 그게 네가 할 소리냐는 듯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내 앞에 선 제르카인을 티 나지 않게 살폈다.
어린 소년은 오늘도 마냥 순수해 보이는 말간 얼굴에 다정한 염려를 담은 상태였다.
모르페우스가 제르카인에게 남몰래 접근하려고 시도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너 번 우연을 빙자해 마주친 적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제르카인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고, 모르페우스도 나를 의식해서 그런지 제르카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의 교류는 서로에게 몇 마디 안부를 물으며 인사하는 정도까지만 진행된 상태라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 내 성력이 봉인돼서 그런가?
제르카인에게서 어딘가 미묘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제르카인을 쓰다듬는 척 그에게 미약한 신성력이나마 한번 흡수시켜 주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에스텔이 가진 성유물을 빼앗을 걸 그랬나?’
약간의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데메테아의 말대로 그녀를 죽여 성유물을 취하는 건 왠지 찝찝했다.
에스텔의 말대로 황궁 안에 다른 성유물이 하나 더 있다면, 그 힘을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침대맡에 서 있는 라 벨리카 황제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어마마마, 오늘 밤에는 이제 안 오실 줄 알았는데 금방 또 들러 주셨네요?”
“마침 시간이 비어서 와 보았다.”
그녀는 잠든 아버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로는 시간이 나서 왔다고 했지만, 황제가 얼마나 바쁜지 아는 나로서는 그녀가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도 라 벨리카 황제를 따라 침대에 누운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발작을 일으켰던 아버지는 내가 어렵사리 잠재운 상태였다.
정체 모를 마수의 독이 좀 더 퍼진 탓인지, 발작 전보다 그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듯이 이따금 작게 신음하며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그래도 당장 생명을 빼앗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이 위안이 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당장 가짜 성녀를 죽여서 성유물의 힘을 취하고도 남았으리라.
다만 이미 한번 발작이 일어났으니, 앞으로는 그 주기가 점점 빨라질 것이라는 게 염려스러웠다.
“걱정 마라. 록샨은 죽지 않을 테니.”
라 벨리카 황제의 말은 나를 향한 위로 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을 확고부동한 사실을 무심히 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서는 사랑하는 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두려움 같은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정말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아버지가 지금 당장에라도 무사히 깨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라 벨리카 황제의 손이 소리 없이 움직여 아버지의 얼굴을 스치듯이 가볍게 훑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처럼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건 한 사람 더 있었다.
1부군 테드릭이었다.
그는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고요한 눈으로 내 아버지를 어루만지는 라 벨리카 황제의 손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Side
가짜 성녀 에스텔과 위험한 그림자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에스텔은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성 곳곳을 돌아다녀도, 찾아야 하는 물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있는 성유물이 길을 인도할 거라며? 그런데 왜 아무 느낌도 안 오는 건데?’
아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에스텔은 한스러운 심정으로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저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남편이 될 1황자와 미리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설마 그녀가 노린 게 황자가 아니라 황녀였을 줄이야!
게다가 다루기 쉬운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3황녀는 가슴에 독약을 품고 다니는 위험한 열 살짜리 꼬맹이였다.
‘이래서 성녀님이 3황녀를 주의하라고 하셨던 건가? 아아, 제누스 신이시여!’
바스락!
에스텔은 그렇게 한탄하다가 문득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흠칫했다.
혹시 또 3황녀가 돌아왔나 싶어서 급히 뒤돌아보았으나, 스산한 가을바람만 불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기, 기분 탓인가?’
그러나 왠지 느낌이 좀 이상했다.
꼭 보이지 않는 눈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는 것 같았다.
에스텔은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암흑 속에 도사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여 에스텔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