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194)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194화(194/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나는 상석에서 마리벨을 내려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신관들은 신에게도 자격을 검증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고 협박하나 보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신성 모독을 어찌……. 아니, 그보다 어찌 신과 성녀를 동일선상에 둘 수 있…….”
“대신전에서 성녀의 직급이 뭐야?”
내 물음에 마리벨의 입이 다물렸다.
“내가 알기로 성녀는 데메테아 여신의 뜻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따르는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로, 이미 그 자체로 대신전에서 누구보다 높은 권위와 직책을 가질 텐데. 그럼 내가 어디에 있든, 신관에서 나를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데메테아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성녀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
지난 2회차 때야 대신전에 적당히 맞춰주며 살았다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성녀로서 부릴 수 있는 갑질이 어디까지인지 나도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신전과 기 싸움을 좀 해볼 생각이었다.
모르페우스와 마리벨이 날 우습게 알고 건방을 떠니 기분이 영 나빴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대신전에서 제발 어떻게든 자기네 명부에 이름만이라도 올려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만들어 줘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 나를 성녀로 추대해 달라고 했어? 난 지금 이대로도 아주 만족스럽고 좋은데 뭐 하러 대신전에 가서 신관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돼? 귀찮게.”
“하, 하지만…… 신성력을 발현하신 이상 반드시…….”
“성녀로 인정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마. 나도 굳이 그런 거 필요 없어.”
성녀로 추정되는 이가 단순 겸양이 아니라 이렇게 진심으로 성가시다는 듯이 그 자리를 거부하는 건 처음이라 마리벨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대신전에서 성녀로 추대받으신다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니, 로잔티나의 모두가 3황녀님을 우러러볼 겁니다. 그런 자리를 이렇게 쉽게 마다하시겠다는 겁니까?”
“신관님.”
“예, 예?”
“나 황녀야.”
“…….”
내 당당한 발언에 마리벨이 한순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미 로잔티나의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고 있는데?”
“…….”
“게다가 이미 로잔티나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네?”
“…….”
“권력도 명예도 부도, 이미 다 가지고 있어. 다른 건 더 없어?”
물론 성녀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았지만, 그게 아니어도 나는 이미 로잔티나의 황족이었다.
그러니 성녀의 감투가 있든 없든 크게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과연 대신전도 그럴까?
“서, 성녀의 자리는 그런 세속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난 세속적인 사람이라 평생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해 무보수로 봉사하고 싶지 않은걸?”
“어…… 어찌 성녀라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은 에스텔과 나, 둘 중에 누가 성녀인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인데 이 녀석 말려들었군.
아무튼, 나도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마리벨을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신관님, 스스로 원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건 훌륭한 일이지만 그런 걸 타인에게 강요하면 안 되지. 그런 건 아주 오래된 과거에 노예를 부리던 시절에나 만행하던 악덕한 짓이야. 요즘은 고용인 하나를 쓰는 데도 정당한 보수를 지급한다고. 신관님은 오랫동안 신전 생활을 해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영 모르는구나?”
마리벨은 내 말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듯했다.
가끔 반항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그의 말을 잘 따르던 에스텔과 달리 발랑 까진 세속적인 황녀를 눈앞에 두니 영 말문이 막히는 눈치였다.
“게다가 내가 대신전에 들어가도 말이야. 마리벨 신관님은 나만큼 큰 신성력을 가져본 적도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걸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쿠궁!
그렇지 않아도 어버버거리던 마리벨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한 내 말에 싸대기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리벨 신관님이 데리고 있는 에스텔의 품행을 보니 썩……. 신관님은 교육에 그리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쿠구궁!
내 흐린 눈빛을 받은 마리벨이 한 대 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표정으로 휘청거렸다.
“맞는 말이네. 성녀 후보로 데리고 있던 애가 저렇게 엉망인데, 아스포델을 가르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꼭 한 명을 교육 담당으로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신관들 셋 중에 고르는 게 낫지.”
유클레드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마리벨에게 막타를 날렸다.
마리벨은 자신이 하급 신관인 요한보다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자 아주 큰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에스텔도 기절한 척하느라 직접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남편감으로 생각했던 유클레드에게 자신의 품행이 엉망진창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분을 삭였다.
마리벨은 과연 끈질긴 놈답게 포기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가진 자의 의무가…….”
“그만.”
하지만 라 벨리카 황제가 언제까지 그 꼴을 봐주겠는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더 이어지려던 마리벨의 목소리를 댕겅 잘라냈다.
“짐의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황녀에게 억지로 뭘 강요할 수 없다. 마리벨 신관은 자중하라.”
“하지만 폐하! 만약 3황녀님께서 대신전의 방침을 따르지 않으시겠다면, 이단으로 치부하여 신성력을 봉인하는 것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기어이 마리벨이 급발진했다.
그가 흥분해서 외친 순간, 알현실 안의 공기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워졌다.
궁인들과 기사들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황실 사람들 모두가 차디찬 눈으로 마리벨을 주시했다.
뼛속까지 파고들 듯한 한기 속에서 제아무리 마리벨 신관이라 한들 주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참 흥미롭군.”
이윽고 라 벨리카 황제의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며 느릿하게 휘어졌다.
말로는 흥미롭다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3황녀를 이단으로 몰아 신성력을 봉인하겠다?”
방금 들은 말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뇌는 목소리는 고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한마디씩 울려 퍼질수록 알현실 안에는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돋아났다.
그리고 이내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을 단숨에 얼려버릴 듯이 시린 황금빛 눈이 앞에 있는 마리벨 신관을 꿰뚫듯이 응시했다.
“그래, 그것이 대신전의 뜻인가?”
“아, 아닙니다! 마리벨 신관, 언사를 주의하십시오! 성녀님께 그 무슨 무례입니까!”
“마리벨 신관이 대답하라. 지금 짐의 앞에서 황녀를 협박하고 이런 무례하면서도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대신전의 뜻이냐고 물었다.”
아이작이 사색이 된 얼굴로 서둘러 상황을 중재하려 했으나, 라 벨리카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마리벨 신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마리벨도 자신의 실수를 아는 듯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몸을 작게 떨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은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마리벨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마리벨을 부추겨 총알받이로 앞세운 뒤 잠깐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페우스가 그제야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대신전의 규율과 역대 성녀님들의 전례를 말씀드릴 것일 뿐입니다. 마리벨 신관도 황녀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을 겁니다. 이 사안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래, 방금의 그 시건방진 발언은 마리벨 신관 개인의 뜻이라 이거군. 여봐라, 감히 거만한 세 치 혀로 겁 없이 황족을 협박하고 기만한 신관을 포박하라!”
그러나 라 벨리카 황제는 마리벨을 봐주지 않았다.
단숨에 근위병들에게 붙들린 마리벨이 기함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저는 대신전을 대표해 입궁한 신관……! 정녕 대신전과 척을 지려 하시는 겁니까?”
“방금 그대의 입으로도 잘못을 인정해 놓고 이제 와서 대신전을 방패 삼으려 하는가? 천지 분간 못 하고 몰지각한 망언을 일삼는 일개 신관 하나가 어떻게 대신전을 대표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대신전은 짐이 방금의 일을 명분 삼아 그들 전체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라 벨리카 황제의 싸늘한 일갈은 몹시 타당했기에, 모르페우스와 아이작도 마리벨의 편을 들어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결국 마리벨은 사색이 되어 근위병들에게 끌려갔다. 에스텔도 덤이었다.
“다른 신관들도 그만 물러가라. 오늘은 그대들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라 벨리카 황제의 냉엄한 축객령에 반발할 수 없었다.
“어? 아빠!”
이후에 나머지 사람들도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갈 때, 나는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수려한 남자를 한눈에 발견하고 뛰어갔다.
“아델.”
아버지가 몸을 낮춰 그에게 우다다다 달려간 나를 받아주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혹시 어마마마가 알현실로 부르셨어요? 그런데 벌써 밖에 나와도 돼요? 이제 아픈 데는 없는 거예요?”
훌륭한 물음표 살인마가 된 나를 향해 아버지가 배꽃같이 웃었다.
“조금 전에 일어났단다. 우리 딸이 알현실에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미 자리가 파한 모양이구나. 그리고 이 아빠는 아주 멀쩡하단다. 아델이 아빠를 낫게 해줬다고 들었는데 정말 고맙다.”
아버지도 어젯밤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날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우리 딸이야말로 갑작스럽게 신성력을 발현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니? 예전에 신성 의식 날에 축복을 받았을 때도 피를 흘렸었는데, 이번에는 더 큰 힘을 각성한 셈이니 걱정이구나.”
나를 살피는 아버지의 눈에는 평소와 같은 깊은 애정과 염려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괜찮아요! 아픈 데 하나도 없어요.”
“방금 알현실에서는 별일이 없었고? 위스테리아 궁의 손님들도 불려갔다고 하던데.”
아버지의 예리한 질문에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금방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긴? 신관들이 널 억지로 대신전에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성력 셔틀로 부려먹으려고 했잖아.”
그때, 어느새 나를 따라온 유클레드가 뒤에서 진실에 약간의 사감을 추가한 말을 사납게 던졌다.
“그러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서 성력을 봉인해 버리겠다느니, 얼마나 무섭게 협박을 했었는데 너는……. 네가 평소에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이런 때까지 의연한 척할 필요는 없어.”
아니, 나 진짜 마리벨의 같잖은 협박에 안 쫄았는데…….
오히려 마리벨이 제대로 물 먹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아무래도 유클레드가 또 뭔가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지 말라는 듯이 찌푸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황스럽게도, 그런 유클레드는 약간 속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는 온화한 기세도 변했다.
“신관들이 아델을 협박해서 억지로 대신전에 데려가려고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