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205)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206화(205/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안됐지만 형은 바스티온에서 어머니 못지않게 바쁘거든요. 동생인 나조차 하루에 한 번 직접 만나 얘기하기도 어려울 정도라고요. 그러니까 형이 놀아줄 걸 기대하고 여기 온 거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보나마나 실망만 할 테니까.”
나를 비웃듯이 빈정거리며 어그로를 끄는 카일의 모습이 꼭 초딩 같았다.
아니지, 지금 나이면 초딩이 맞나?
나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카일에게 안내받아 성채를 돌다가, 레예스가 저 멀리서 회랑을 지나가고 있는 걸 방금 우연히 목격한 참이다.
레예스는 길란, 아이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안에서 미성숙한 소년은 레예스 혼자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만찬장에서도 느낀 건데, 왠지 바스티온에 도착하고 나서 레예스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지금도 바스티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레예스는 평소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그가 이 성채의 후계자라는 게 여실히 와닿았다.
‘내가 아는 레예스는 사계절 중에는 봄을 닮았고, 또 낮과 밤 중에서는 온화하게 따뜻하고 밝은 오전 시간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정작 실제의 그는 이 한기 가득한 겨울 나라의 왕자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외로 레예스의 첫인상은 좀 서늘한 편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기도 했고, 또 이후에 내가 본 레예스의 모습은 언제나 산들산들한 봄바람 같은 이미지라 당시의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말이다.
“뭐, 그래 보이네. 근데 괜찮아. 레예스가 바빠도 네가 있잖아.”
어쩌면 둘째의 비애일 수도 있지만, 나는 카일 녀석이 자기 형을 좋아하면서도 비교하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마음으로 너도 썩 나쁘진 않다고 말해줬다.
카일도 황녀님의 넓은 자애심을 느꼈는지 일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를 향한 카일의 푸른 눈에는 반항심이 어려 있었다.
“지금 꿩 대신 닭이라는 의미…….”
“어휴, 그런 의미겠냐?”
손으로 카일의 등짝을 철썩! 후려쳤다.
귀에 달라붙을 듯한 찰진 소리가 눈 쌓인 성채에 울렸다.
내 등짝 스매싱 한 대에 카일의 안에서 뭉쳐가던 검은 기운도 흩어졌다.
카일은 내 불시의 기습에 몸을 굳힌 채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빠진 반응이었다.
“지금…… 날 때렸어?”
“이게 뭘 때린 거라고? 그냥 가벼운 접촉이지, 접촉. 이 정도면 쓰다듬은 거나 마찬가지구먼.”
나는 내친김에 카일을 몇 대 더 팡팡 쳤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도 삐뚤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놈이라니까?
사람 말을 제멋대로 꼬아서 듣고는, 이렇게 부정적인 기운을 키우려고 혼자서 드릉드릉 시동을 넣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에, 여기저기서 이 성녀님의 애정 어린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애들이 많아서 영 성가셨다.
카일은 또래 여자애한테서 처음 당해 보는 서슴없는 손찌검(?)에 당황한 듯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정색하며 내게 물었다.
“설마 형도 이런 식으로 대했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한 카일을 보니, 갑자기 자기 형의 대우가 의심스러워진 모양이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카일이 울컥했다.
“근데 난 왜 때려?”
“넌 맷집이 세 보여서?”
그 순간 카일은 아까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카일이 더욱 발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건…… 형보다 내가 더 강해 보인다는 뜻이야?”
“호오. 아스포델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상당히 자신 있나 봐?”
“헉!”
그래, 네가 이때쯤 등장할 줄 알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유클레드의 존재를 이제야 눈치챈 듯이 카일이 소스라쳤다.
물론 유클레드는 사정 봐주지 않고 카일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바스티온의 연무장이 궁금해서 잠깐 다녀온 참인데. 마침 구석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하니 잠깐 우리 둘이서 쓰면 되겠네. 자, 가자.”
“아! 아, 잠깐만요……!”
카일은 그렇게 나한테 어그로를 넣기 무섭게 유클레드에게 끌려갔다.
“아델, 이만하면 성안은 충분히 둘러본 것 같으니 우리도 이만 들어가자.”
아빠가 내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며 주면서 말했다.
“방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4부군님, 3황녀님.”
카일이 떠나자마자 바스티온의 다른 고용인이 다가왔다.
어제 바스티온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할 때 길란과 더불어 앞쪽에 서 있던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고용인들을 총책임지는 메이드장 샤론이었다.
어제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레예스와 카일의 유모 같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밖에 오래 계셔서 추우시지요? 보온용 마석을 새로 가져왔어요. 지금 바스티온의 날씨가 예년보다 따뜻하긴 하지만, 황도는 한창 가을일 테니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으실 테지요.”
샤론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뒤에 있던 마가렛에게도 따뜻한 마석을 나눠줬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오후 중에 눈썰매를 타러 가지 않으시겠어요? 성 옆에 눈썰매를 타기 딱 좋게 얼어붙은 유리 호수와 언덕이 있답니다. 모처럼 도련님들이 황궁의 친구분들을 모시고 오셔서 고용인들도 신이 났어요. 어제 창고에 넣어둔 썰매를 오랜만에 꺼내서 열심히 쓸고 닦더니, 오늘은 순록들까지 전부 안장을 채워 준비해 놨지 뭐예요.”
당연히 샤론은 나를 낚으려고 꺼낸 말이었으나, 나보다는 우리 아버지가 거기에 걸려들었다.
“순록? 그러고 보니 북부에서는 말 대신 다른 짐승들이 마차를 끈다고 들었는데.”
“예, 북부의 늑대개와 순록들은 말처럼 크고 빠르지요.”
아버지는 북부의 동물들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나는 허허 웃었다.
난 진짜 어린애가 아니라서 그런 놀이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 아버지를 위해 한번 눈썰매 맛을 보긴 해야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어릴 때 바스티온에 오니까 샤론한테 눈썰매를 권유받는군?
이전 2회차 때는 어른일 때 카일과 함께 공식 업무차 바스티온에 방문해서 그런지, 다들 한없이 정중하게만 나를 대했었는데 말이다.
샤론이 내게 한번 구경 삼아 카일과 함께 가보라고 권유해 줬던 곳도 눈썰매를 타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 일명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 같은 곳이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카일과 내 연인설을 듣고 뭔가를 착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루돌프……. 아니, 순록들이 끄는 눈썰매를 예약한 뒤 방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에 어디선가 무언가가 부러지고 쏟아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눈이 쌓여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인가 보네요.”
샤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성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혹시 또 눈사태인가?
힐끗 샤론을 쳐다보니,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하얀 눈가루가 물안개처럼 올라오기 시작한 성벽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바스티온의 다른 사람들도 굳은 눈으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퍽 의미심장했다.
그걸 보고 나도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일단은 티 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방으로 향했다.
* * *
“눈사태의 원인은 바스티온에 따뜻한 겨울이 한동안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오후가 되어 성채로 돌아온 가넷 바스티온이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현재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다과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참석자는 가넷 바스티온과 그녀의 두 아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나를 포함한 황족 자제 4명이었다.
“따뜻한 겨울이라고? 이게?”
루벨리오가 바스티온 공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격렬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보온용 마석을 혼자 네 개나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이미 예상하던 일이긴 하지만, 쿤차가 루벨리오를 기껏 바스티온까지 보낸 보람이 없었다.
루벨리오는 춥다고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지금도 바스티온의 주인이 황족들을 다과 시간에 직접 초대해서 마지못해 온 거였다.
나는 루벨리오가 막내인 제르카인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며 혀를 차다가, 문득 가넷 바스티온의 옆에 있던 레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다가 나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반면 카일 녀석은 나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참나, 자기가 유클레드에게 시달린 건 다 자업자득인데 왜 또 나를 저렇게 반항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거람?
그래도 유클레드의 얼굴이 몹시도 상쾌한 걸 보니, 긴 여정에 찌뿌둥하던 몸을 아까 제대로 푼 모양인데…….
카일 녀석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것 같아서, 그냥 저 정도 건방짐은 내가 넓은 아량으로 봐주기로 했다.
“바스티온에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건 레예스가 황도로 떠난 이후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