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20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207화(206/20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
가넷 바스티온은 유유히 찻잔을 기울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부터 빙하가 녹기 시작했지요.”
“빙하가 녹는다고요?”
“예, 영지 곳곳에 전례 없는 눈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 이유도 적설 표면의 물이 녹으면서 하부에 균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 밖에도 아주 가끔 날이 따뜻할 때 며칠 정도 피었다가 지던 꽃이 요 몇 달 내내 군락을 이루어 피어나고, 철새와 나비 떼의 움직임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가넷의 말을 듣던 우리 아버지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그 말은……. 녹색 빙벽을 지키는 바스티온에 봄이 오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봄이 온다는 건 경우에 따라 제법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그 안에 든 뜻은 의미심장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넷 바스티온이 망설임 없이 질문에 수긍해 우리 아버지를 침묵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먼저 보고한 대로 인근 마수 서식지의 생태가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식지 안에 있는 생물의 생태가 달라진다는 것은, 이 기온 변화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황실에 확인 요청을 드린 것이고요.”
나는 가넷의 말을 듣고 혼자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바스티온의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바스티온의 날씨가 따뜻해지면, 필연적으로 마수들이 봉인된 녹색 빙벽의 유지 또한 불가능해진다.
‘마침 바스티온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겸사겸사 지금 와 보길 잘했…….’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깨달음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 아앗……!
잠깐, 그런데 바스티온에서 먼저 황실에 이 일을 보고했었다고?
나는 휙 고개를 돌려서 우리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는 두 눈을 낮게 가라앉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 나 때문에 여기에 온 거 아니었어?
어쩐지 내가 바스티온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 어머니가 너무 쉽게 허락하더라니!
사실은 원래 다른 계획이 있었던 거구나?
아이작이야 바스티온 출신이니까 딸려 보내는 게 이해된다고 쳐도, 전혀 상관없는 조슈아까지 동행시키는 건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바스티온의 마수 서식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의 조수로 그를 붙였다고 하면 이해가 되었다.
‘가만, 근데 이런 얘기를 우리가 다 같이 들어도 되는 거야?’
그래 봤자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진지하게 듣는 건 나와 유클레드 정도밖에 없긴 했다.
“엣, 퉤퉤! 아직도 찻물이 너무 뜨겁잖아! 내 혀는 민감해서 이렇게 뜨거운 건 잘 못 마신단 말이야. 정확히 72도로 맞춰서 다시 가져다줘. 빨리!”
루벨리오는 아까부터 찻물이 뜨겁네 차네 하면서 바스티온의 고용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반면 제르카인은 아까부터 너무 조용해서 나는 그가 앉은 상태로 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깨어 있었다.
단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흐린 눈을 한 채 창밖을 보는 걸 보니, 앞에서 이어지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따분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벨리오에 비하면 몹시도 얌전한 태도로 가만히 앉아 있어서, 나는 역시 제르카인이 루벨리오보다 참을성이 많고 의젓하게 잘 자랐다 싶었다.
한편 유클레드는 확실히 황실의 장남답게 바스티온 공의 말에 관심을 두고 귀담아듣는 눈치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여신의 가호가 남은 바스티온에 갑자기 봄이 오다니, 어째서…….”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티온에는 봄이 오지 않고 한겨울이 지속되는 게 여신의 가호였다.
“글쎄요, 어째서일까요?”
가넷 바스티온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마침내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맞아 여신께서 내리신 바스티온의 역할이 끝나려는 것일까요?”
원래 이런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던 사람은 저절로 성격이 담대해지게 마련인가?
가넷 바스티온은 자신의 영지에서 지극히 중차대한 이변이 일어났음에도 시종일관 동요가 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감정의 굴곡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로, 황족으로서는 쉽게 간과하기 어려운 말을 내뱉었다.
“아니면 반대로, 여신께서 더는 이 땅을 보호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일까요?”
“바스티온 공, 마지막 말씀은 억측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데메테아께서 로잔티나를 위해 직접 내린 가호를 거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유클레드는 방어적으로 반박했다.
“그렇습니까?”
뒤따른 가넷의 반응은 또 맥 빠질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애초에 우리와 언쟁할 마음으로 말을 꺼낸 게 아닌 듯했다.
유클레드도 황족으로서 묵과하기 어려운 말에 발끈해서 뭐라고 몇 마디 보태려다가 그런 가넷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가넷은 잠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떴을 시간이군요. 한번 녹색 빙벽에 가보시겠습니까?”
그녀의 제안에 우리는 살짝 크게 떠진 눈을 맞댔다.
“바스티온에 오셨으니 응당 여신의 기적이라 불리는 명소를 직접 보셔야지요.”
* * *
휘이잉!
찬 바람이 내 뺨을 마구 후려쳤다.
“아델. 여기, 아빠가 가진 마석도 주마.”
“개, 갠차나여.”
“괜찮기는, 얼굴이 다 얼었는데.”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자, 아빠가 애잔한 얼굴로 품에서 따뜻한 마석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나는 사양하려다가 포기하고, 아빠가 준 마석을 냉큼 뺨에 붙였다.
그제야 얼어붙어서 감각이 없던 얼굴이 조금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달 떨려서 제대로 말하기 어렵던 입도 조금 얌전해졌다.
바스티온의 모든 사람이 지금이 따뜻한 날씨라고 하고, 나도 이전 회차 때 여기에 와 봐서 그게 사실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였다!
크윽, 내 안에 흐르는 남부의 피가 북부를 거부한다!
눈은 악마의 똥!
남주인공의 고향을 북부로 설정한 모든 작가는 각성하라!
“아니, 안 되겠구나. 아델, 그러지 말고 잠깐 아빠한테 오자.”
아빠는 나한테 보온 마석을 주고도 부족하다 싶은지 마뜩잖은 눈을 하다가, 결국은 아예 나를 안아 들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아빠는 캥거루처럼 그가 입은 털 망토 속에 나를 쑥 집어넣었다.
히야아, 역시 추울 때는 사람 체온이 최고라는 게 사실이었어.
아빠한테 안긴 채 털 망토에 둘둘 감싸이기까지 하자 확실히 조금 전보다 따뜻해졌다.
그래도 어릴 때 여기에 오니까, 이런 장점이 있군.
이전 회차 때는 품위 있는 우아한 황녀님인 척하느라 추워도 춥다고 말도 못 하고, 이를 꽉 문 채 무작정 참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제야 콧물을 훌쩍이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게 녹색 빙벽이야? 생각보다…… 엄청 큰데?”
“로잔티나에서 가장 큰 숲 하나를 통째로 얼린 거라고 하니까요.”
유클레드는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서서, 눈앞에 보이는 장엄한 풍경에 압도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가넷 바스티온의 제안을 따라 녹색 빙벽을 보러 온 상태였다.
다과실에 있던 사람 중에는 루벨리오와 제르카인만 열외였다.
루벨리오는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기겁하더니, 몸이 좋지 않다며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
제르카인은 내 껌딱지답게 녹색 빙벽까지 함께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말렸다.
사실 아빠는 밖이 춥다고 나도 두고 가려고 했지만, 내가 누구냐?
녹색 빙벽을 보러 가는데 내가 빠지는 게 말이 돼?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제외한 황족들과 바스티온의 사람들이 함께 녹색 빙벽으로 향하게 되었다.
“멋지지요? 과연 성지인 눈꽃 암벽에 버금가는 위용과 장엄함 아닙니까?”
아, 깜짝이야! 아이작은 또 언제 왔어?
나는 갑자기 옆에서 쓱 나타나 말을 거는 청년 때문에 흠칫했다.
아이작은 우러러보는 듯한 아련한 눈으로 녹색 빙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족제비 털로 만든 듯한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고 지금 이 자리에 피오가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빙하가 햇빛에 시리게 반짝여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처럼 새하얀 암벽들 사이에 끼어 있는 드넓은 녹색의 빙벽.
그 안에는 한 시대를 고스란히 담은 채 통째로 얼어붙은 초록빛 숲이 있었다.
반질반질한 얼음 속에서 고요하게 반짝이는 숲의 풍경은, 꼭 신이 투명한 얼음 수정으로 만든 거대한 테라리움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상당히 아름다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