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2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26화(26/207)
“오늘은 열매가 많이 피곤한가 봐. 까꿍이 쉬게 그만 가요, 아빠.”
나는 교활한 놈에게 동화되기 전에 매정하게 손을 뗐다.
“그래요? 그럼 저도 오늘은 일찍 까꿍이랑 인사해야겠네요.”
카루스가 내 말을 듣고 아쉬운 듯이 열매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이 열매가 이렇게 하루하루 빠르게 시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까꿍아, 아빠 갈게. 푹 쉬고, 내일 또 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어.”
카루스가 열매에 손을 댄 순간, 그에게 묻어 있던 사기가 반질반질한 표면으로 흘러들었다.
열매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어? 까꿍이가 움직였어요.”
“그래도 열매가 조금 기운을 차렸나 보군.”
“혹시 아빠 손을 알아보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열매도 살아 있는 생명이니까. 게다가 자네가 이렇게 매일 와서 말을 걸어주고 있으니.”
“그럼 전 조금 더 이렇게 까꿍이를 만져 줘야겠어요.”
카루스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아까보다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가보도록 하지.”
나는 처절하게 통증을 호소하며 허덕이는 열매를 굳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카루스는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열매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어느새 구겨진 얼굴을 아버지의 어깨에 파묻었다.
심장이 쿵쿵 엇박자로 뛰었다.
내 귀에만 들리는 끔찍한 비명이 점점 멀어졌다.
그걸 듣지 못한 것처럼 외면했다.
그러고 나서 검은 기운에 물든 카루스와 열매를 두고 아버지와 함께 로사리움을 빠져나왔다.
* * *
다음 날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기분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누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웬 땅꼬마가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를 잡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짜증 나.”
때때로 로사리움에서 들었던 4황자 놈의 처절한 비명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분노마저 치솟았다.
날 먼저 배신하고 죽인 건 그놈인데.
오히려 나는 지금까지 아스포델로 살면서 늘 그와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려고 아등바등 혼자 발버둥 쳤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꼭 내가 아주 나쁜 사람이고, 또 그만큼 아주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개화하지도 않은 열매는 너무 작고 연약했다.
그래서 그것을 대상으로 살의를 품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인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끼끼뀨.”
“끼이우.”
그때, 어느샌가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온 족제비들이 무릎 위로 올라와 기웃거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솜털 보송한 앞발로 내 손을 살살 매만지는 모습이 꼭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날 걱정해 위로해 주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 그래도 너희가 있었지.”
그래, 내가 형제 복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역마 복은 있었어.
갑자기 마음이 촉촉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족제비들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에구, 귀여운 것들……. 응? 그런데 이게 뭐야.”
족제비들의 보송한 털에 얼굴을 비비다가 뺨에 뭐가 묻은 걸 깨달았다.
뭐야? 이거 잼 같은데?
이 하얀 건 크림인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지난번처럼 배가 빵빵하네. 어쩐지 묵직하더라니.
“너희, 어디서 뭘 먹고 온…….”
그러다 나는 문밖이 다른 때보다 약간 시끄러운 걸 알아차렸다.
“응? 무슨 일이지?”
족제비들을 양팔에 하나씩 안고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자, 응접실 앞에서 마가렛에게 울먹이며 불만을 토로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3황녀님의 애완동물 때문에 저희 궁이…….”
잘 보니 그는 3황자 놈을 양육하는 전담 궁인이었다.
지난번에 길에서 마주쳤을 때 수행인들 사이에 저 남자가 있었던 게 기억났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자리 비우고 없는데, 그래서인지 마가렛 혼자 조금 난처한 듯이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니 우리 쪽에서 뭔가 저쪽에 실수한 게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난 조금 전에 귀에 박힌 애완동물이란 말을 곱씹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 피오, 키노. 너희 거기 딱 서 봐.”
어느새 내 팔에서 빠져나가 슬금슬금 멀어지던 녀석들이 음산하게 흘러나온 내 목소리를 듣고 얼음처럼 굳어졌다.
“너희 설마 지금 3황자 궁에 다녀온 거야?”
애써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족제비들을 천천히 돌아봤다.
하지만 내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음침했는지, 녀석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도 2황자랑 3황자 쫓아갔었잖아. 거기서 뭐 했어?”
기껏해야 그냥 가벼운 장난 정도 쳤겠거니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때 한 번으로 끝난 줄 알았고.
그런데 오늘은 또 거기서 뭘 했기에 3황자 놈의 궁인이 이렇게 우리 궁까지 찾아와 울먹인단 말인가?
“끼룩?”
“뀨?”
잠깐 굳어 있던 족제비들은 가증스럽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기 시작했다.
이, 이 자식들이.
저걸 보니 갑자기 조금 전 방에서의 일이 떠올라 뒷골이 당겼다.
내가 우울해 보여서 위로해 주려고 다가온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내가 착각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3황자 궁에서 거하게 한탕하고 와서 나한테 혼날까 봐 내 기분이 어떤지 파악할 속셈이었던 거 아냐?
“뭐야,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그래봤자 안 속는……. 앗! 너네 어디 가!”
눈치 빠른 족제비들은 재빨리 도주를 꾀했다.
“거기 서!”
난 그들을 잡으러 달려갔다.
“아스포델, 너 뭐 해?”
1황자 놈과 마주친 건 막 궁의 1층 정문 밖으로 뛰어나가 회랑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 밖에 비도 오는데.”
족제비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1황자는 비를 피하려는 듯, 수행인들을 달고 회랑을 걸어서 건물의 문 쪽으로 오다가 날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씨, 놓쳐 버렸네.
하여간에 쓸데없이 재빨라 가지고.
아니, 그보다 왜 네가 지금 여기 있냐?
“뭐야, 우리 궁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네가 아무 때나 과자 먹으러 오라며. 마침 비 때문에 야외 일정이 취소됐거든.”
순간 나도 모르게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뭐야? 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네가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이거 받아.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가져왔어.”
1황자가 눈짓하자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수행인이 나한테 무언가를 건넸다.
연노란색 포장지에 보라색 리본으로 장식된 꾸러미였다.
“우리 궁 요리사가 만든 과자야.”
“…….”
“내가 갑자기 찾아왔으니까 오늘은 그걸 먹자. 뭐, 딱히 너한테 주려고 준비한 건 아니고.”
왠지 속 보이는 1황자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수행인들이 소리 없이 웃었다.
1황자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약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 뜨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 1황자님이 놀러 오셨군요.”
마침 마가렛이 나타나서 분위기가 환기됐다.
“록샨 님은 지금 궁에 안 계세요. 저희 황녀님과 조금만 같이 이야기하고 계시겠어요? 금방 다과상을 차릴게요.”
“그래. 다른 건 됐으니 차만 내오도록 해. 오늘은 내가 가져온 게 있으니까.”
마가렛이 1황자의 말을 듣고 역시 1황자님은 섬세하시다느니 하면서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마가렛, 이거 줄게.”
더 듣기 싫어서 손에 들고 있던 걸 마가렛에게 떠넘겼다. 1황자 유클레드의 선물을 아예 가지라고 준 것이었는데, 의도가 제대로 전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궁이나 귀족가에서 주인의 물건을 아랫사람이 대신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내가 잠깐 마가렛에게 과자를 맡긴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참, 소문으로 들었는데 너 어마마마한테도 선물 받았다며?”
1황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청 대단한 거라고 하던데. 지난번에 왔을 때 왜 안 보여줬어?”
그걸 내가 너한테 왜 보여줘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삐뚠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삼켜냈다.
오늘은 비가 내려서 그런가?
아침부터 계속 기분도 축축 처지고, 작은 일에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럼, 황녀님. 1황자님과 놀이방에서 잠깐 놀고 계시겠어요?”
“그래……. 따라와.”
마가렛의 권유에 못 이긴 척 1황자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거야?”
잠시 후, 도착한 놀이방에서 1황자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네가 어마마마께 선물 받고 굉장히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흰 수정 안에 든 거대한 마수를 보고 그는 경악한 기색이었다.
“설마 이런 마수일 줄은…….”
나는 박제된 마수를 질린 듯이 올려다보는 1황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렇게 마수를 앞에 둔 1황자를 눈에 담는 동안의 일이었다.
오래전 가슴에 묻었던 너덜너덜한 과거의 기억이 제멋대로 모여들어 형체를 되찾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이번 한 번만 내 말을 믿어줘.’
나는 무심코 떠오른 기억에 흠칫해서 얼굴을 구기며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뭐야? 싫어. 왜 갑자기 떠오른 거야.’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