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28)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28화(28/207)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1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그럼 황자님, 이제 3황녀님께 방문하는 것은 오늘부로 그만두시는…….”
“그게 아니라.”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족제비들의 털을 고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으면 꼭 내가 아스포델에게 강요하는 것 같잖아. 난 그런 식으로 그 애를 만나고 싶은 게 아니야.”
1황자의 전담 궁인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마가렛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장식장 뒤에 숨은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은 많은 의미를 담은 듯했다.
마가렛은 1황자의 품성과 배려에 깊이 감명받은 눈치였다.
“할 수 없군. 다음에 다시 오지.”
“예, 1황자님. 로잔티나의 별께 태양의 가호가 내리기를.”
1황자를 배웅하러 나간 마가렛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후다닥 뒷문으로 뛰어갔다.
칫, 왠지 마가렛이 1황자에게 낚인 것 같은데.
지금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면 또 1황자님과 어서 화해하는 게 좋지 않겠냐느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1황자님과 만나서 얘기라도 나눠보는 게 좋지 않겠냐느니 하며 나를 회유하려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난 1황자와 싸운 게 아니라 화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나한테 따지러 온 건 줄 알았는데.’
1황자의 말을 떠올리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1황자 녀석이 어디에서 듣기 싫은 말을 들어봤겠는가.
게다가 저놈 입장에서는 내가 갑자기 돌변해 꺼지란 듯이 말했으니 느닷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테고.
그래서 당연히 기분이 상했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왠지 그다지 화나지 않은 것 같아서 의아했다.
‘흥, 그래도 나한테 얼마 없던 정은 다 떨어졌겠지. 저놈이 얼마나 냉정한 놈인데. 어쩌면 저렇게 끈질기게 자꾸 찾아오는 것도 그냥 오기가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1황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배웠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앞날에 도움이 되는 인재 발굴에 집중해야지!’
난 우다다 뛰어서 신수 둥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
“황녀님?”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요?”
……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뒷문을 나서기 전에 다른 궁인들에게 걸려 버렸다.
“으아니, 그냥…….”
“우리 황녀님이 심심하신가 봐요. 저희랑 놀이방에 가시겠어요?”
“아니…….”
“그럼 정원에 산책이라도 가실래요? 족제비들이랑 같이 술래잡기라도 할까요?”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하, 자유의 몸이 되기 참 어렵다…….
“황녀님! 설마 이 마가렛을 두고 혼자 밖으로 나가시려고 한 거예요?”
급기야 마가렛까지 날 찾아냈다.
또 내가 몰래 궁을 빠져나가려 한 걸 알았는지, 마가렛이 나한테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걸 한참이나 한 귀로 흘려듣고 나서야 신수 둥지로 향할 수 있었다.
* * *
“꺄꺙!”
“꺄, 이쪽이다아~!”
말랑한 찹쌀떡들이 날 따라 통통통 튀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구구, 우리 애기들. 오늘도 너무너무 귀여워라!
“잘한다, 잘한다, 오구오구, 우리 애기들! 후오오오!”
“컁컁!”
오늘도 분홍 갈대 풀을 열과 성을 다해 현란하게 흔들며 새끼 신수들과 놀아줬다.
“3황녀님, 오늘도 신수들과 정말 잘 놀아주시네요.”
아, 앗!
잠깐 구경꾼이 있다는 걸 잊고 너무 심취했다.
뒤늦은 수치심에 난 뻣뻣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으, 으응. 조슈아도 해볼래?”
“전 황녀님처럼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서…….”
“무슨 소리야! 이런 건 원래 마음으로 하는 거야!”
“그, 그런가요?”
난 조슈아에게 억지로 분홍 갈대 풀을 쥐여줬다.
조슈아는 어정쩡하게 그걸 손에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 잘한다, 잘한다.”
아이구, 딱딱해라. 무슨 로봇이 말하는 줄 알겠네.
“꿍!”
“꺄앙!”
그래도 역시 신수의 사랑을 받는 자답게 조슈아가 분홍 털 뭉치를 조금 흔들자마자 말랑이들이 무섭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 으어어!”
와, 1초 컷이네.
조슈아가 새끼 신수들에게 파묻히는 데 걸린 시간…….
“조슈아, 진짜 운동신경 없구나.”
“황녀님…….”
내 감탄에 조슈아가 부끄러워했다.
이제는 조슈아도 날 보면 곧잘 먼저 알은척을 하고, 대화도 조금씩 하게 되었다.
볼 때마다 신수가 널 좋아한다, 넌 딱 신수가 좋아할 관상이다, 그런 얘기를 반복해서 해준 덕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해줄 때마다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은 듯이 어색해하고 불편하게 몸을 꼼지락거리던 조슈아가 이제는 같은 말에 수줍게 웃기도 했다.
사실 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잘해주는 것도 있었다.
조슈아가 이곳에서 꽤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가 신수와 각인할 기회를 놓칠까 봐 그냥 모른 체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처럼 신수와 각인하지도 못하고, 또 자존감도 바닥을 쳐서 계속 밑바닥인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조슈아에게도 이게 낫지 않겠느냐고 혼자 합리화를 하면서.
‘차라리 빨리 그 일이 벌어지면 좋을 텐데. 도대체 신수와 각인할 계기가 되는 그 일이 언제 생기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조슈아, 이리루 와. 나랑 같이 이거 먹어. 오늘도 점심 굶었지?”
“네, 사실은……. 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3황녀님.”
오늘도 챙겨 온 간식을 주자 조슈아가 고마워하면서 받아먹었다.
사실 조슈아와 이렇게 짧게나마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황녀랑 노닥거린다고 또 선배들한테 구박받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 나도 눈치를 봐서 조슈아 옆에 다른 사람이 없거나, 그가 짧은 휴식을 취할 때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배고픈 데는 장사 없다고, 굶주린 조슈아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새끼 신수들과 놀아줬더니 배가 꺼져서 허기가 진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간 아무 대화 없이 쭈그려 앉아서 과자를 흠냠냠 나눠 먹었다.
“아스포델.”
누군가의 음산한 목소리가 날 불러온 건 바로 그때였다.
머리 위에 문득 그림자가 생겼다.
난 내 손바닥만큼 큰 과자를 입에 문 채로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역시 네가 맞았군. 어쩐지 이틀 전에도 네가 신수 사육장으로 향하는 걸 봐서 혹시나 했는데.”
컥!
내 눈에 비친 건 다름 아닌 1황자였다!
그의 뒤로 차가운 눈발이 마구 휘날리는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1황자는 과자를 입에 문 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조슈아를 서릿발 같은 눈으로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스치는 자리마다 한기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1황자 놈이 자주 다니는 연무장이 신수 사육장과 가까웠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 로잔티나의 별께 태양의 축복이 내리기를!”
“그래, 난 동생과 할 말이 있으니 그만 가봐.”
1황자가 싸늘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눈이 조슈아의 손에 들린 과자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나한테도 인사를 남긴 뒤 후다닥 사라졌다.
조슈아를 보낸 1황자가 인상을 쓰며 날 돌아봤다.
“아스포델, 너 도대체 왜……. 앗! 어디 가?!”
하지만 나도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뛰어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잠깐만,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단 말이야!”
“난 없어!”
“난 있어!”
황당한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1황자가 진짜 성질이 났는지, 버럭 소리친 뒤 날 쫓아오기 시작했다.
우씨, 다리 길이에서 벌써 승패가 정해져 있잖냐!
당연한 말이었지만, 내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난 다섯 살이고 1황자는 아홉 살이었다.
애초에 내가 그를 따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뜻이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할지, 1황자에게 붙잡히기 전에 난 쓸 만한 방패막이를 하나 발견했다.
한 떨기 고운 분홍 꽃 같은 소년, 2황자 루벨리오였다.
신수 둥지 입구 앞쪽의 황도를 걷고 있던 루벨리오도 나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뭐, 뭐야! 네가 왜 지금 갑자기 거기서 튀어나와?!”
지난번에 나한테 박치기당한 게 어지간히 큰 충격이긴 했었던 듯, 2황자가 경기하듯이 몸서리쳤다.
“저게 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가까이 오지 마! 이 악마……! 으어어!”
하지만 2황자가 나를 피하는 것보다 내 손이 그에게 닿는 게 먼저였다.
난 녀석의 옷을 붙잡고 홀랑 등 뒤로 가서 그를 방패 삼듯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스포델!”
졸지에 나 대신 1황자를 앞에 두게 된 루벨리오는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너 왜 그렇게 날 피해? 그냥 잠깐 얘기만 하자는 건데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1황자는 몹시 억울해 보였다.
나한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만큼 그를 보기 싫었다.
그래서 1황자에게 엄청난 욕을 하며 철벽을 쳤다.
“씨, 자꾸 따라오지 말고 저리 가! 난 너 싫어! 차라리 너보다 얘가 더 좋다고……!”
한마디로 ‘넌 나한테 이 삼류 악역보다도 못해!’이 말이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