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3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37화(37/207)
청년이 맑게 웃음 지은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그보다 저희, 구면이지요?”
그 말이 맞았다.
처음에는 워낙 희끄무레한 이목구비라 긴가민가했는데, 그는 지난번에 봤던 엑스트라 신관이었다.
“신관님!”
난 반갑게 그를 불렀다.
가짜로 그런 척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진짜 눈물 나게 반가웠다.
갑자기 힘숨찐 최종 보스가 튀어나오다니, 진짜 기절할 정도로 놀랐단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내 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듯하던 황금색 눈이 엑스트라 신관에게 옮겨 가서 좀 살 것 같았다.
“허허, 예.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제 소개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지요. 아이작입니다.”
그런데 내 착각인가?
어째 날 빤히 내려다보는 엑스트라 신관의 눈빛이 좀 묘했다.
왜인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킨 뒤, 그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도 묘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3황녀님이 신의 정원에서 열매로 맺히신 날과 개화하신 날의 년도와 월일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어봐도 될지…….”
“예?”
뜬금없는 소리에 마가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도 의아해져서 눈썹 사이를 좁혔다.
지난 모든 인생을 통틀어 이 신관이 나한테 저런 걸 물어본 건 처음이라서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아니, 이상한 걸로 치면 이 단발성 엑스트라가 지금 이렇게 두 번째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부터 이상했지만.
그런데 엑스트라 신관이 내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순간, 어째서인지 모르페우스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모르페우스 신관님! 아이작 신관님!”
하지만 엑스트라 신관이 말을 잇기도 전에 멀리서 누군가 그들을 애타게 불러왔다.
“아, 이런. 시간이 얼마 없는 걸 깜빡했군요! 3황녀님을 만나 뵙자마자 아쉽지만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쉬움을 담은 연갈색 눈이 나를 응시했다.
힘숨찐 악역의 눈도 다시 나를 향했다.
“아이작 신관의 말대로 곧 알현 시간인지라 이만 가봐야겠군요.”
나는 겨우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엑스트라 신관이 의외로 질척였다.
“저, 혹시 다음에 한번 3황녀님을 따로 찾아 뵈어도 되겠습니까?”
“데메테아 님의 권속인 신관님께서 찾아주신다면 저희 황녀님께도 기쁨이겠습니다만……. 공식으로 서한을 주시면 4부군님께서 답변을 주실 겁니다.”
마가렛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문과 경계심이 미약하게 깃든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밝은 얼굴로 돌아섰다.
모르페우스 신관도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 * *
마가렛에게 안겨 궁을 빠져나오는 길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입술을 잘근거렸다.
‘쓰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개막장 전개도 정도가 있지!’
원래대로라면 소설의 중반 이후에나 슬슬 등장해야 할 힘숨찐 악당이 느닷없이 지금 황성에 출몰하다니!
엑스트라 신관도 오늘따라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모르페우스 신관에게 내 모든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이 시점에 황궁에 온 거지?
같은 맥락으로 신경 쓰이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현재 위스테리아 궁에 머물고 있는 사기 덩어리의 어린 소년.
신관들과 함께 황궁에 온 데다, 황제를 직접 알현할 정도면 고귀한 신분의 아이일 터다.
무엇보다도, 남주인공과 닮은 그 얼굴이 계속 눈에 밟혔다.
“마가렛, 지금 손님 궁에 있는 사람들 전부 신관이야?”
내가 원래 상태로 돌아와 묻자 마가렛은 안심한 듯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예, 대신전에서 온 분들이에요. 1황자님도 신관님께 치료받으셨고요.”
“아까 그 신관님이 직접 치료해 줘써?”
“네, 아까 만나 뵈었던 아이작 신관님 있죠? 그분이 1황자님의 궁에 방문하셨었다고 들었어요.”
그럼 1황자에게 사기를 직접 묻힌 게 적어도 모르페우스 신관은 아니라는 거로군.
어쩐지 힘숨찐 악역 짓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잡한 방식이었지.
난 내친김에 궁금했던 걸 하나 더 물어봤다.
“근데 위스테리아 궁에 웬 어린애도 하나 있던데? 견습 신관도 같이 온 거…….”
“황녀님! 아까 궁에서 아무도 안 만났다고 하셨잖아요?”
아차!
“멀리서 잠깐 봐써. 잔디밭에 누워서 자는 것 같길래 조용히 다시 나왔는걸?”
“혹시 가까이 가진 않으셨지요?”
“아냐, 안 그래써.”
이럴 때는 시치미를 뚝 떼고 뻔뻔하게 나가는 게 최고였다.
내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자 마가렛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말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신관님들과 함께 온 어린 소년이라면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 공자님이실 거예요.”
역시!
바스티온 가문은 로잔티나의 주요 열 개 가문 중 하나였다.
소설 속에서 아스포델과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찍던 남주인공의 가문이기도 했다.
아까 군청 빛 머리를 봤을 때부터 혹시나 싶었다.
하지만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 공자라면…….
“왜 신관님하고 같이 황궁에 온 거야?”
“아이작 신관님의 청으로 같이 방문한 거라고 들었어요. 신관님께서 원래 바스티온 가문분이셨대요.”
앗?!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말에 진짜 깜짝 놀랐다.
그 엑스트라 신관이 남주인공 가문이라고?
아니, 하나도 안 닮았는데?
더군다나 소설이랑 지난 회차들에서도 초반에 한 번 잠깐 나왔다가 존재감 없이 사라졌었고.
“그래서 친척 따라서 황궁에 놀러 온 거야?”
“으음, 그게 아니라…….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 공자님이 좀 아프셔서 현재 대신전에서 지내고 계시거든요. 아마 그것과 연관이 있어서 황성에 들어오신 것 같은데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마가렛의 설명을 듣는 동안 잊고 있던 정보들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가렛이 주변에 들리지 않게 소리를 죽이고 내 귀에 이어서 속닥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저주를 받았다는 말도 있으니 우리 황녀님은 더 관심 두지 마셔요.”
나는 조금 전 위스테리아 궁의 정원에서 보았던 그 새까만 사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래, <황녀 아스포델>의 남주인공에게는 원래 형이 한 명 있었다.
원래 바스티온 가문을 물려받았어야 할 적장자.
하지만 어릴 때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어 작중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마가렛의 말이 맞다면, 지금 내가 정원에서 만나고 온 그 소년이 바로 단명할 남주인공의 형인 게 분명했다.
Chapter 13
남주 말고 남주 형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가 이맘때 신관을 따라 황궁에 들어왔었나?’
그는 소설에서도 그냥 지나가듯이 언급만 되었던 인물이었다.
워낙 어릴 때 죽은 데다 살아생전 남주인공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던 형이라, 그의 죽음은 소설에서도 큰 의미가 없었다.
대신 착한 여주인공 아스포델이 남주인공과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요소로 활용되었다.
소설 <황녀 아스포델>의 남주인공인 ‘카일 바스티온’은 원래 바스티온 가문의 차남이었다.
카일은 죽은 형 대신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완벽하던 형과 그를 가끔 비교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스포델은 그런 남주인공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품었다.
어찌 보면 동질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에도 한번 말했다시피, 아스포델도 사실은 언니인 2황녀 알렉시아에게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소설의 중후반부에 여러 위기가 닥치고 스토리가 우중충해지면서부터는, 언니처럼 심지가 곧고 강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슬퍼하는 아스포델의 모습도 가끔 나왔다.
‘이 구간의 내용이 특히 고구마였지!’
귀염 발랄 햇살 여주인공에게 갑자기 땅굴 파기가 웬 말이오?
어쨌든, 아스포델이 형과 비교당하는 남주인공에게 연민을 품은 것을 시작으로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반면 계략형 남주인공 카일은 사실 그런 말에 귀조차 가렵지 않았지만, 여주인공의 관심이 좋아서 일부러 아스포델 앞에서만 불쌍한 척 가식을 떨곤 했다.
‘그래, 이 부분은 그래도 밤고구마쯤 됐어……. 소설에서 그 여우짓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사랑이 싹트고…….
결국 남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주인공을 구하려다가 불구가 되고…….
‘퉤엣. 망할 피폐 소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볼 일 없어야 할 남주인공의 형을 이 시점에 만나다니.
아니, 남주인공 형까지는 그렇다 쳐.
문제는 힘숨찐 최종 보스 악역이 왜 벌써 튀어나오냐는 거였다.
“으으어어!”
나는 침대에 엎어져 마구 몸부림치며 베개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끼유?”
“끼!”
옆에서 티슈 조각을 갈기갈기 찢으며 놀던 피오와 키노가 하던 것도 멈추고 날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째 이번 회차에서는 뭔가가 지나치게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아? 어?’
갑자기 위기의식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낚인 건 나였나?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